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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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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에서 상연되는 ‘테러의희비극’

“시련 이겨낸 우리 모두가 케냐인”…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이후 정부·매스컴 주도로 사회 통합 캠페인 확산
등록 2013-10-05 16:21 수정 2020-05-03 04:27

아프리카 대륙의 동쪽, ‘아프리카의 뿔’이라고 불리는 지역에 소말리아라는 나라가 있다. 우리에게 빈곤의 대명사로, 그리고 최근에는 해적으로 유명해진 그 나라다. 지난 9월21일 오전(현지시각), 케냐 수도 나이로비의 웨스트게이트 쇼핑몰에서 나흘 동안 3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총격 사건은 소말리아의 이슬람 극단주의 반군단체 반군단체 ‘알샤바브’(Al-Shabaab)가 계획한 테러로 밝혀졌다. 케냐 현지 신문 은 “10~15명으로 알려진 테러 그룹의 일원들이 케냐에 복수를 하러 왔다고 말하며 총을 난사했고, 건물 침입 직후 무슬림들은 살려주겠다면서 이를 증명하기 위해 예언자 무함마드의 어머니 이름을 대라고 요구했다”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보도했다.

2011년부터 확대된 알샤바브의 존재감

2009∼2010년 알샤바브는 소말리아 영토의 절반 이상을 사실상 점령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당시 소말리아 정부가 통제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지만, 케냐에서 알샤바브의 인지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케냐를 처음 방문한 2010년에도 알샤바브에 대한 특별한 언급을 들은 적이 없었고, 단지 소말리아 내전으로 케냐 동북부 ‘다다브 난민캠프’가 소말리아 난민들로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는 뉴스가 나오는 정도였다. 그 다음해에도 현지인에게서 알샤바브에 대한 걱정이나 우려 등을 접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케냐를 찾은 2012년 여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케냐~소말리아 국경 지역, 그리고 나이로비 내 소말리족이 모여 사는 이스틀리 지역을 중심으로 알샤바브의 군소 테러가 빈번해지고 있었다. 이번 테러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지난 5월에도 나이로비 시내 한 건물에 알샤바브의 소행으로 알려진 폭탄테러로 1명이 죽고 36명이 다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케냐 사람들 사이에서는 “소말리아 난민들이 들어올 때 알샤바브의 테러리스트들이 숨어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고, 언론에도 알샤바브와 관련한 보도가 늘어나고 있었다.
알샤바브의 테러는 2011년 말 케냐 정부가 소말리아 정부의 요청으로 소말리아 영토에 군대를 파병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알샤바브 세력은 케냐군과 소말리아군의 협동작전으로 크게 약화했다. 이에 대해 스스로 소말리아의 ‘정통 정부’로 여기는 알샤바브는 “케냐가 소말리아를 침략했다”고 비난하며 ‘보복’을 시작했다. 특히 소말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케냐의 북동쪽 만데라, 와지르 그리고 다다브 난민캠프가 위치한 가리사 카운티(한국의 도와 비슷한 행정구역)와 케냐에서 무슬림 인구가 가장 집중된 해안가의 관광도시 몸바사 등을 중심으로 폭탄이나 수류탄 등을 이용한 알샤바브의 군소 테러가 늘어났다.
이들의 테러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케냐 사회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먼저, 테러의 공간이 교회나 성당 및 기독교 관련 시설에 집중되면서 알샤바브와 케냐의 갈등이 ‘이슬람 대 기독교’의 종교 갈등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기독교(가톨릭·개신교 포함)가 대부분인 케냐에서 이런 식의 갈등이 조장되는 것은 소수인 무슬림 인구에게 특히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고, 종교를 떠나 사회 전반적으로 균열의 씨앗을 뿌린다는 종교지도자들의 우려도 나왔다. 또한 관광산업이 가장 중요한 케냐가 테러 사건으로 외신에 자주 등장하는 것 자체가 국가 차원에서 상당한 경제적 피해로 여겨졌다.

외국인 포함 60명 넘게 희생된 대규모 테러

그러나 이번 테러는 과거와 다른 양상을 띤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먼저, 중무장한 10명 이상의 인원들이 조직적으로 건물을 점거하고 인질극을 진행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군소 테러 사례들과는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테러조직 구성원들의 출신국이 다양하다는 점에서 알샤바브가 소말리아에서 약해진 세력을 보완하기 위해 다국적화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된다. 이번 사건이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건, 케냐인뿐만 아니라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을 포함해 60명이 넘는 인원을 살해했다는 점 때문이다.
테러가 일어난 웨스트게이트 쇼핑몰은 나이로비에서 외국인과 백인 인구가 가장 많이 집중되는 지역에 있다. 이곳은 영국 식민지 시대부터 서쪽은 영국인을 비롯한 유럽인, 동쪽은 아시아인(인도·파키스탄계 노동자)과 아프리카인으로 분리시켜 거주시킨 식민지 도시계획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곳이다. 현재는 부유층 및 중산층 케냐인과 외국인(국제기구나 사업과 관련해 거주하는 사람들), 그리고 관광객이 자주 찾는 곳이다. 나이로비 동쪽과는 달리 ‘안전하다’고 인식돼온 공간에서 벌어진 테러는 알샤바브의 테러 지역 선정에 변화가 생겼음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196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케냐는 키쿠유·루오·루야·칼렌진·캄바의 5개 부족이 70% 이상의 다수를 구성하고, 그 밖에 40여 개 소수 부족이 약 30%를 차지하는 국가다. 케냐의 소수 부족 가운데 하나가 소말리아에서는 국민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소말리족’이다. 소말리아와 케냐 국경 지대에 거주하던 소말리 부족들 중 일부가 케냐로 흡수되면서, 케냐에는 민족적으로는 소말리이지만 케냐 국적을 가진 사람들(Kenyan Somalis)이 있고, 이들 가운데 일부와 소말리아 국적의 소말리 사람(Somali Somalis)들은 서로 다른 국적과 국경선을 초월해 친·인척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케냐 내 소말리아 난민들 가운데 기존에 유지하고 있던 관계망을 따라 케냐로 건너와 정착한 사람도 상당수 있는 것이다.
과거 영국 식민지 시대에 이스틀리 지역은 인도·파키스탄계 아시아인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케냐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중산층 및 부유층으로 성장한 인도·파키스탄계가 다른 거주 지역으로 떠나면서, ‘버려진’ 이스틀리는 소말리계 케냐 사람들로 채워졌다. 게다가 1990년대부터 시작한 소말리아 내전 난민까지 유입되면서, 현재의 이스틀리는 ‘리틀 모가디슈’라고 불린다. 케냐 안의 작은 소말리아다.
2010년 출판된 케냐 내 무슬림 인구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이스틀리 내의 소말리 인구는 케냐 전체 소말리 인구의 절반을 넘는 50만 명에 이른다. 이스틀리는 미국이나 유럽, 그리고 두바이나 예멘 등의 중동 지역까지 흩어진 소말리 디아스포라 네트워크의 핵심이자, 외국에 거주하는 소말리 사람들의 송금 및 값싼 의류나 전자기기 등의 수입상품이 집중되는 소말리 비즈니스의 중심지로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알샤바브가 관여한 테러의 빈도가 높아지면서 케냐 사람들의 대화 속에 이스틀리는 함부로 가면 안 되는 범죄화된 공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이번 테러를 겪으면서 ‘이스틀리에 있는 사람들’이란 말 속에 테러리스트들이 숨어 있다는 막연한 추측이 일반 서민들의 대화에서 들리기도 한다.

“소말리아 무슬림이 아닌 알샤바브의 테러”

이번 테러에서 알샤바브는 이슬람이 아닌 사람들을 겨냥한 살상과 케냐군의 소말리아 내 활동에 대한 보복을 통해 자체적으로 ‘이슬람’과 ‘소말리아’를 대변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케냐에서 이슬람과 소말리아는 어떻게 될까. 케냐에서 이슬람과 소말리아는 이번 테러 이전부터 존재해온 케냐 사회의 일부분이다. 알샤바브만의 전유물은 아닌 것이다. 이미 많은 케냐 내 무슬림 원로들과 다른 종교지도자들이 “알샤바브가 부르짖는 것이 진정한 이슬람이 아니다”라는 성명을 내며 국가적 위기에 대해 종교를 초월한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케냐가 인정하는 소말리아는 ‘알샤바브의 소말리아’가 아니라, 케냐와 함께 알샤바브에 공동으로 대항하는 ‘소말리아 정부의 소말리아’다. 따라서 알샤바브는 소말리아라는 국가공동체와는 분리된 알카에다와 같은, 그리고 실제 알카에다와 연계된 것으로 알려진 테러집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후루 케냐타 케냐 대통령 등 정부 인사들은 이번 사태를 언급하면서 ‘소말리아’라는 단어는 거의 쓰지 않고, “알샤바브의 악의적인 공격에 케냐인들이 모두 함께 훌륭하게 대항했다”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다. 케냐 내 소말리아계 정치인이나 전문가들 역시 케냐인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면서 이번 사태의 해결을 위해 등장했다. 또한 이번 테러에서 사람들을 구출하고 치료하는 데 봉사한 케냐 무슬림들은 신문과 방송에 등장해 “알샤바브의 이슬람이 진정한 이슬람이 아니며, 케냐의 이슬람은 이와 다르다”는 메시지를 알리고 있다.
하지만 테러 직후 보도된 영국 <bbc> 뉴스에서는 리틀 모가디슈에서 살아가는 소말리계 케냐인과 소말리 난민이 앞으로 케냐에서 받을 수 있는 불이익과 보복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물론 알샤바브의 테러를 비난하고 이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케냐 사람들과 같은 입장이지만, 앞으로 케냐 경찰이나 일반 시민들에게 자신들이 어떤 대우를 받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공공의, 사회적 차원에서의 대응이 실제 케냐 사람들의 일상적인 상호작용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미지수인 것이다.
케냐에서는 2007년 대통령 선거 결과 발표 뒤, 선거에서 패배한 라일라 오딩가 전 총리를 지지하는 루오와 칼렌진 부족이 선거에서 승리한 므와이 키바키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키쿠유 부족 사이에 서로 보복 공격을 벌린 폭력 사태가 벌어진 바 있다. 당시 사망하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조사와 보상이 아직까지도 확실히 처리되지 않은 상태다. 또한 이 사건은 동아프리카에서 내전을 치르지 않은 평화로운 나라였던 케냐의 자긍심에 흠집을 냈다. 이 폭력 사태를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현 대통령과 부통령이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됐다. 칼렌진 그룹의 대표적 지도자인 윌리엄 루토 부통령의 재판은 진행 중이며, 키쿠유 출신 케냐타 대통령은 재판을 앞두고 있다.

‘하나의 케냐’ 담론 전략의 성패는

이후 케냐에서는 부족 간 갈등의 재발을 막기 위해 종족집단 이름 대신 ‘케냐’ ‘케냐인’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는 캠페인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균열’의 환경에서 겪은 이번 테러는 공교롭게도 대중매체와 정부의 유도 속에 ‘우리 모두가 케냐인’이며 함께 이 시련을 이겨냈다는 인식과 담론이 확산되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언론을 통해 부상자들을 위해 헌혈하고 봉사하는 종족과 종교를 초월한 케냐인들의 모습은 서로에게 키쿠유냐 칼렌진이냐 또는 무슬림이냐 기독교인이냐 질문을 던지지 않는 케냐인들의 이미지를, 또 너도나도 케냐인이라는 공동의식을 그 어떤 캠페인보다 빠르게 확산시키고 있다. 앞으로 케냐의 모습이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나이로비(케냐)=김태은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인류학 박사과정</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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