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세롤라소.’ 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즐겨 사용되는 시위 형태다. 거리로 몰려나온 시위대가 냄비와 프라이팬 따위를 수저나 포크 등으로 두드려대며 구호를 외친다.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가 요즘 냄비 두드려대는 소리에 파묻혔다.
지난 8월19일 콜롬비아 전국 32개 주 가운데 11개 주에서 농민들이 들고일어났다. 콜롬비아농민연맹(MIA)이 주도한 이른바 ‘농민 총파업’의 시작이다. 는 지난 8월20일 파업에 나선 농민들이 이런 구호를 외쳤다고 전했다. “존엄을 갖추고, 땅을 갈 수 있도록 해달라.”
사태 발생 초기, 후안 마누엘 산토스 대통령은 “농민이 파업을 하는 게 말이 되느냐. 그런 일은 없다”고 말을 잘랐다. “모든 게 평상시와 다름없다”고도 덧붙였다. 성난 농심에 불을 지른 게다. 곳곳에서 농민들이 고속도로를 가로막고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교통이 마비됐다. 특히 중부 보야카주와 남부 나리노주는 외부와 연결되는 통로가 모두 끊기면서 사실상 고립됐다. 식료품 부족 사태까지 우려되는 상황이 되고서야, 정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꺼내든 카드는 ‘시위 진압 병력 증파’였다.
고속도로 막고 시위…중·남부 일부 주 고립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낮은 임금과 기름값 인상으로 어려움을 호소하던 운송노동자들도 파업 시위에 나섰다. 탄광노동자들도 속속 파업 대열에 가담했다. 2010년 5월 산토스 정부 출범 직후부터 이어진 ‘개방정책’으로 콜롬비아 광산 부문은 다국적기업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터다. 급격한 민영화에 내몰린 보건·의료 노동자들도 어깨를 겯고 나섰다. 인터넷 매체 는 “농민 파업이 열흘째를 맞은 8월29일, 보고타를 중심으로 콜롬비아 전역에서 벌어진 시위에 30만 명가량이 참여했다”고 전했다.
“시위가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다.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뻔하다.”
“총파업은 전체 농업 부문이 겪고 있는 질병의 한 증상일 뿐이다. 병의 근원을 찾아 고쳐야 한다.” 는 8월29일치에서 콜롬비아 커피 재배농 연합단체인 ‘디그니다드 카페테라’ 대표 하비에르 코레라 벨레스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그가 언급한 ‘병의 근원’은 산토스 정부 출범 이후 잇따라 발효된 자유무역협정(FTA)이다. 미국과의 FTA는 이미 지난해 5월 발효됐고, 유럽연합(EU)과의 FTA도 지난 8월1일 시행에 들어갔다.
미 무역대표부(USTR)가 정리해놓은 자료를 보면, FTA 체결 이전까지 콜롬비아 정부는 미국산 제품에 7.4~14.6%의 관세를 부과했다. 하지만 FTA 발효와 함께 기존 관세의 80%가 사라졌다. 나머지 20%도 향후 10년 안에 완전 철폐된다. 특히 농업 분야의 관세는 FTA 발효 직후 쌀·밀·보리·콩·감자·쇠고기·유제품 등 거의 모든 품목의 관세장벽이 사실상 무너졌다. FTA 발효 1주년을 맞은 지난 5월께부터 농민단체들이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인 것도 이 때문이다.
FTA 발효로 미국 농산물 대규모 유입
콜롬비아의 주식은 감자와 쌀이다. 대대로 소농들이 생산을 도맡아왔다. FTA 발효를 전후로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는, 거액의 보조금을 받아 생산된 미국산 농산물과는 경쟁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FTA 발효 이전인 2010년 미국이 콜롬비아에 수출한 농산품은 약 8억3200만달러어치, 남미에서 2위 규모다. 는 보고타에서 활동하고 있는 노동운동가 테오 발르베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FTA 조항에 따라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 사실상 법률로 굳어졌다. 언제든 방향을 돌릴 수 있던 정부 정책이 FTA 조항에 얽매이게 됐다. FTA가 콜롬비아의 경제정책을 틀어쥐고 있는 것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 이후 멕시코에서 벌어졌던 사태가, 고스란히 콜롬비아에서 재연되고 있다. 소농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대표적 ‘독소조항’으로 지목되는 건 이른바 ‘결의 제970조’다. 2006년 협상 개시 직후부터 미국 FTA 체결의 전제 조건으로 이 조항을 내세웠고, 산토스 정부는 출범 직후 이를 입법화했다. 최근 칠레의 영화감독 빅토리아 솔라노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를 보면, 이 조항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위성방송 는 8월26일 인터넷판에서 전한 영화의 내용은 대충 이런 식이다.
한 농민이 종자를 담아놓은 포대를 수북이 쌓아두고 있다. 이내 중무장한 경찰이 들이닥친다. 포대를 압수한 경찰은 그것을 쓰레기 더미에 내던지고 불을 지른다. 농민은 울부짖는다. 콜롬비아 농촌 곳곳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결의 제970조’는 유전자조작 종자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인정하는 게 뼈대다. 농민들이 제 손으로 키워 얻은 씨앗도, 종자로 사용할 수 없게 됐다는 뜻이다. 가난한 농민들이 쌀이며 감자, 커피 따위 모든 농산물의 종자를 해마다 따로 구입해야 한다는 뜻이다. 콜롬비아 종자시장의 92%는 몬샌토 등 다국적 종자업체가 장악하고 있다. 농민 파업의 배후다.
파업 사태가 2주째를 넘기면서, 산토스 대통령은 9월 들어 ‘질서 유지’를 이유로 수도 보고타 일대에만 5만여 병력을 증강 배치했다. 는 9월5일 “콜롬비아 정부의 내년 예산안을 보면, 농업 분야 투자 예산이 전년 대비 44%가량 삭감됐다”고 전했다. 콜롬비아 남부 7개 주의 고속도로는 여전히 막힌 채다.
수도 보고타 일에에 병력 5만 추가 배치
같은 날 은 “산토스 대통령의 지지율이 집권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갤럽이 지난 8월27일~9월2일 실시해 내놓은 조사 결과, 산토스 대통령의 지지율이 단 21%에 그쳤다는 게다. 집권 직후 FARC 쪽과 평화협상을 개시했을 때 그의 지지율은 74%까지 치솟았다. 불과 두 달 전인 지난 6월 말 조사에서도 그는 48%의 지지율을 유지했다. 재임 기간에 이 정도로 낮은 지지율을 보인 역대 대통령은 1999년 안드레스 파스트라나 대통령이 유일하단다. 산토스 대통령은 오는 11월 재선에 도전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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