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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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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열쇠 쥔 ‘밀레니엄 세대’

공화당 “성폭행에도 낙태 반대” 발언에도 초접전 중인 미국 대선… 유권자의 1/3인 젊은층의 투표율이 승부 가를 것
등록 2012-11-03 12:35 수정 2020-05-03 04:27

변했다. 밋 롬니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가 달라졌다. ‘극우’ 성향으로 흐르던 분위기를 ‘중도’로 돌리고 있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그가 ‘대통령’스러워지고 있다. 선거니까, 애초 그렇게 흘러가야 ‘정답’이었다. 선거 막판, 롬니 후보가 판세를 제대로 읽고 있다.
“초당적 입장에서 발언해야 한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국제사회를 이끌어왔다. 그에 맞는 입장을 밝혀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의 정책 가운데 칭찬할 만한 것이 있으면 그리해야 한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외교적 성과에 대해서도 평가를 해줘야 한다. …롬니 후보가 오바마 대통령의 작은 허물까지 들춰낼 필요는 없다.”

롬니, ‘대통령스러워’지기 위해 ‘변신’
2012년 미 대선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후보 초청 텔레비전 토론을 하루 앞둔 지난 10월21일, 공화당 극우 진영의 기관지 격인 는 인터넷판 기사에서 롬니 후보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이 매체는 “현직 대통령과 경쟁을 벌이는 도전자쯤으로 비쳐선 안 되며, 비판만 할 게 아니라 차기 대통령처럼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보다 더욱 ‘대통령스럽게’ 보일 필요가 있다는 게다. 결과는 어땠을까?
10월22일 저녁 플로리다주 보카레이턴의 린대학교에서 열린 대선 후보 초청 3차 토론회에서 롬니 후보는, 말하자면 ‘대통령스럽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고 할 수 있다. 그간 주장했던 외교정책 방향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되레 오바마 대통령의 정책 방향을 지지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날 토론이 끝난 뒤, 를 포함한 대다수 미 주류 언론이 “롬니 후보의 외교정책은 오바마 대통령과 전혀 다르지 않아 보였다”고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 그랬다.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한 것을 축하한다.”
“무인항공기(드론)를 활용한 대테러 전략을 적극 지지한다. 대통령의 정책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믿는다.”
“대통령께서 방금 지적하신 바로 그 점을 나 또한 강조하고 싶다.”
“대통령과 똑같은 생각이다. 강력한 제재 수단을 동원한 것은 탁월한 정책적 판단이었다.”
롬니 후보는, 외교정책을 두고 90분 남짓 벌인 이날 토론에서 사실상 오바마 대통령에 대해 아무런 비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다. 이날의 토론을 두고 는 “오바마 대통령이야말로, 공화당 강경파로 비칠 정도”였다고 전했다.
이를테면 롬니 후보는 “오는 2014년 말까지 아프간에서 철군을 완료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까지도 “아프간에서 철군 시한을 못박는 것은 잘못된 전략”이라며 “탈레반에 시계가 없을지는 모르지만, 그들도 달력은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올 초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롬니 후보는 이라크 전쟁에 대해 “개전 당시에도 찬성했고, 지금도 지지한다”고 한 바 있다. 말이, 너무 다르다.
중동정책에 대한 발언은 가히 ‘상전벽해’다. 이란의 핵무장을 막기 위해 ‘군사개입 불사론’을 강조해온 그간의 주장과 달리, 그는 이날 “이란이 핵무장을 포기할 수 있도록 평화적이고 외교적인 방법을 동원해 설득해야 한다”고 밝혔다. ‘평화로운 중동’을 위해선 “더 나은 교육제도와 경제 지원, 양성평등과 법치주의”가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그의 발언을 두고 는 “군 통수권자로서, 내 첫 번째 과업은 미국민을 안전하게 지키는 일”이라고 강조한 오바마 대통령이 되레 ‘공화당 강경파’로 보일 정도였다고 썼다. ‘괴이한 역할 바꾸기’였다는 게다.
그런데, 이를 어쩐다. 롬니 후보가 ‘대통령스러워’지기 위해 ‘변신’을 거듭하는 사이, 공화당 핵심은 전혀 바뀌지 않은 모양새다. 사연이 긴데, 쉽게 간추려보면 대충 이런 식이다.

“성폭행이라도 생명은 신의 선물”
미 공화당을 대표하는 정치인 가운데 리처드 루거 상원의원이 있다. 1976년 연방 상원에 진출해 내리 6선을 한 ‘거물’이다. 지난 5월, 루거 의원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36년에 걸친 의정활동을 마감하게 됐다. 인디애나주 공화당원들이, 7선 도전에 나선 루거 의원 대신 ‘주 재무장관’ 이력이 전부인 무명의 정치 신예 리처드 머독을 연방 상원의원 후보로 지명한 게다. 경선 결과, 지지율 격차가 무려 20%포인트나 났다. 사실상 공화당을 장악한 극우 성향 풀뿌리 조직 ‘티파티’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이었다. 롬니 후보의 고민도 여기서 출발한다.
“이 문제를 두고 오랜 시간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다. 생명은, 신께서 내리는 선물이다.” 머독 후보는 지난 10월23일 인디애나주 현지 방송사가 주최한 상원의원 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낙태’에 대한 소신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는 이어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니 설령 성폭행 같은 끔찍한 상황에서 생명이 잉태됐다고 하더라도, 이 또한 신께서 그리되게끔 의도하셨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화당 정치인이 ‘생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다, 성폭행 피해여성의 인권을 무시하는 발언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미주리주에서 역시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장을 내민 토드 아킨 하원의원도 지난 8월19일 지역 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진정한 의미의 성폭행 상황에선, 여성의 몸은 임신이 되지 않도록 자기를 방어하는 기제를 작동시킨다”고 주장해 파문을 불렀다.
그래서다. ‘타이밍’이 절묘하다. ‘네오콘’의 날선 발톱을 숨기려고 롬니 후보가 한껏 몸을 낮춘 직후, 공화당 보수 본류는 ‘하고 싶은 말’을 참아내지 못한 게다. 선거 막판, 머독 의원의 발언은 어떤 영향을 끼칠까?
2012년 10월 말, 미 여론은 아직 알 수 없다. 그야말로 ‘초접전’이다. 2008년 대선 당시 3차 텔레비전 토론(10월15일)이 끝난 이후, 오바마 대통령은 존 매케인 후보를 줄곧 5% 안팎으로 여유 있게 앞서나갔다. 올 3차 토론이 끝난 뒤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와 이 10월23일 내놓은 조사 결과, 롬니 후보(48%)가 오바마 대통령(47%)을 오차범위 안에서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같은 날 이 내놓은 결과를 보면, 오바마 대통령(48%)이 롬니 후보(46%)를 역시 오차범위 안에서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열쇠’는 누가 쥐고 있을까? ‘밀레니엄 세대’가 해답을 쥐고 있다. 1980~90년대 태어난 이들은 앞선 대선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퓨리서치센터의 자료를 보면, 2008년 대선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18~29살 연령대에서 66%의 지지를 얻어, 매케인 후보를 2배 이상 앞섰다. 특히 2008년 대선에서 처음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의 69%가 오바마 대통령을 지지했다. 2008년 대선에서 젊은 층 유권자의 투표율은 51.1%, 2004년 대선에 견줘 2.1% 높아졌다. 당시 이들 연령대의 유권자는 약 4800만 명이었다. 올해엔 무려 6400만 명까지 늘었다. 미 전체 유권자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녹록지 않은 오바마의 상황
11월의 첫째 화요일, 올해엔 그달 6일이다. 알다시피, 미 대선은 ‘간선’으로 치러진다. 인구 비례에 따라 50개 주에 할당된 대통령 선거인단을, 누가 얼마나 장악하느냐에 승패가 걸렸다. 단 0.1%포인트라도 승리한다면, 그 주에 걸린 선거인단을 모두 확보하는 ‘승자독식’ 방식이다. 선거인단은 모두 538명, 이 가운데 270명 이상을 확보하면 당선이다.
2008년 대선 때 오바마 대통령은 50개 주 가운데 28개 주에서 승리했다. 확보한 선거인단은 365명이었다. 단순 득표율에서도 52.9%를 얻어, 45.7%를 얻는 데 그친 매케인 후보를 쉽게 앞섰다. 4년여가 지난 지금, 오바마 대통령이 처한 상황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2000년과 2004년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다가 2008년 돌아섰던 노스캐롤라이이나·오하이오·플로리다·콜로라도·버지니아·인디애나 등 이른바 ‘접전지’(스윙스테이트)가 흔들리고 있다. 더러는, 이미 간발의 차로 롬니 후보가 앞서고 있다. 그러니, 문제는 투표율이다. 젊은 층이 얼마나 투표를 하느냐에 오바마 행정부 2기가 달렸다. 롬니 행정부 1기이거나.




타계한 맥거번 전 민주당 상원의원
1972년 대선서 닉슨과 맞붙어 참패한 진보파

유력 정당의 ‘대선 후보’를 지냈다. ‘잘나가는 정치인’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럼에도 평생 그를 따라다닌 ‘불우한 정치인’이란 말도, 아예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닌 듯싶다. 지난 10월21일 90살을 일기로 생을 다한 그의 삶을 평가하는 건 이래저래 쉬운 일이 아니다.
조지 스탠리 맥거번(사진)은 1922년 7월19일 미국 사우스다코타주의 한적한 시골마을 감리교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라디오 방송에 감동해 2차 세계대전에 겁없이 뛰어든 그는 전투기 조종사로 임관해 1944년 막바지로 치닫던 유럽의 전장에 투입됐다. 전쟁이 끝난 뒤 귀국한 그는 ‘제대군인 장학금’을 받아 1953년 노스웨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역사)를 받는다. 그가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은 거대 자본가인 록펠러에 맞선 가난한 노동자들의 투쟁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한 ‘1913~1914년 콜로라도 탄광노동자 파업’이 주제였다.
1952년 아들라이 스티븐스 일리노이 주지사(민주당)의 대선 도전에 참여하며 정계에 입문한 그는 이듬해인 1953년 사우스다코타주 민주당 사무총장을 맡아 강단을 떠났다. 그는 1956년 사우스다코타주 제1선거구에서 4선 의원인 공화당 해럴드 로버와 맞붙어, 온갖 ‘색깔론’이 꼬리를 문 상황에서도 1만 표 이상 앞서며 연방 하원에 무난히 진출했다.
‘존 케네디’ 바람이 거세던 1960년 상원에 도전했다가 패배한 맥거번은 케네디 행정부에서 이른바 ‘평화를 위한 식량 프로그램’(FP) 책임자로 일하며, 시야를 넓혔다. 1962년 선거에서 상원 진출에 성공한 직후부터 농민 권익 향상에 앞장서던 그는 1963년 9월 미국의 베트남 내정간섭을 비판하는 의회 연설에 나섰다. 미 의회에서 처음 나온 반전 목소리였다. 어느새 그는 반전·평화 운동의 구심이 돼가고 있었다.
1971년 1월 맥거번은 민주당 대선 후보 출마를 선언했다. 부통령 출신 후버트 험프리를 꺾고 1972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결정되기까지, 그는 당내에서까지 ‘빨갱이’로 몰리는 등 숱한 곡절을 겪어야 했다. 보수적인 남부지역 민주당원들은 아예 리처드 닉슨 대통령(공화당) 선거 캠프에 합류할 정도였단다.
‘반전’을 기치로 내건 선거였다. 닉슨은 ‘중공’과 ‘소련’ 방문으로 맞대응했다. 여론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1972년 6월엔 워싱턴의 민주당 선거사무소에 ‘좀도둑’이 들기도 했다. 그 유명한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악전고투 끝에 그해 11월7일 치러전 대선에서 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했다. 전국 지지율은 61% 대 37%, 선거인단 수에선 ‘520 대 17’로 밀렸다. 그로부터 불과 1년6개월 남짓 만에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로 자진 사임했다.
1998년 유엔식량농업기구(FAO) 대사를 지내기도 한 그가 말년에 관심을 쏟은 건 인류의 굶주림을 줄이는 방안이었다.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도 거두지 않아, 조지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 “실패한 베트남 전쟁을 되풀이하는 꼴”이라고 질타하기도 했다. 미 진보매체 은 10월21일 인터넷판에서 “마지막 남은 민주당 진보파가 숨을 거뒀다”고 애도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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