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다.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까지는 이제 불과 40여 일이 남았다. 10월에 세 차례 예정돼 있는 텔레비전 토론이 분수령이 될 터다. 쟁점은 숱하다. 낙태·사형제·동성결혼·총기규제 등 전통적인 논쟁거리에서, 건강보험 개혁과 사회보장제도 확대(또는 축소) 등 복지정책과 일자리·재정적자 등 경제정책까지 난제가 산처럼 쌓여 있다. 영화 <무슬림의 무지>가 촉발한 아랍권의 반미 시위가 몰고 온 외교정책을 둘러싼 논쟁도 불을 뿜는다. 우선순위는 어디에 있는가? 핵심은, 역시 ‘살림살이’로 모아진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매한가지다.
빌 게이츠 재산보다 GDP 낮은 126개국
미국 부자들은 돈이 많다. 많아도, 정말 아주 많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을 예로 들어보자.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지난 9월19일 내놓은 ‘2012년 미국 400대 부자’ 자료를 보면, 게이츠 회장의 재산은 약 660억달러(약 73조8천억원)다. 미국부터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투발루까지, 세계은행(WB)이 내놓은 지난해 지구촌 192개국의 국내총생산(GDP) 순위표를 놓고 보면, 게이츠 회장의 개인 자산 규모는 65위를 차지한 에콰도르(670억달러)와 66위를 차지한 크로아티아(638억달러)에 견줄 만하다. 국가 전체가 한 해 만들어내는 경제적 가치가 게이츠 회장의 개인 자산보다 적은 나라가 무려 126개국이나 된다는 뜻이다.
미국의 ‘400대 부자’ 반열에 오르려면, 적어도 174위를 차지한 동티모르(10억5천만달러)나 175위를 차지한 지부티(10억4900만달러)보다 많은 11억달러 이상을 보유해야 한단다. 이들 400명의 평균 재산은 42억달러로, 지난해에 견줘 4억달러나 늘었다. 자산 가치를 합산하면 무려 1조7천억달러에 이른다. 전년 대비 13%나 뛴 규모다. <포브스>는 “2012년 부자들은 더욱 부자가 됐고, 명단에 이름을 올린 갑부 400명 가운데 자산이 많아진 것은 241명이나 된다”며 “주로 주가 상승과 부동산 경기 회복, 희귀 예술품 가격 상승 등이 자산 증가의 주요 원인이 됐다”고 전했다.
대체 이 많은 돈이 어디서 왔을까? 미 시민단체 ‘공정경제연합’(UFE)은 지난 9월20일 내놓은 12쪽 분량의 짤막한 보고서에서 ‘포브스 400대 부자’의 특성을 야구에 빗대 분석했다. 먼저 ‘타석’에서 태어난 이들이다. 보유자산 75억달러로 35위를 차지한 해럴드 햄 콘티넨털리소스시 회장을 비롯해 이른바 중산층 이하 가정에서 태어난 ‘자수성가’형 부자들인데, 400대 부자 가운데 35%가량이 이 부류란다.
‘1루 베이스’에서 태어난 이들은 중산층 이상 가정 출신이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좋은 교육을 받고, 사업을 시작할 종잣돈도 부모에게 빌릴 수 있었던 부류다. 자산 175억달러로 14위에 오른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가 여기에 속하는데, 이들이 전체의 약 22%에 이른다. ‘2루 베이스’에서 태어난 이들은 아예 중소기업체를 물려받거나, 100만달러 이상의 유산을 상속받은 부류다. 전체의 11.5%가 이 부류에 속하는데, 자산 29억달러로 128위에 오른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대표적이다.
상속 유산이 5천만달러 이상인 ‘3루 베이스’에서 태어난 이들도 있다. 자산 250억달러로 4위에 오른 정유재벌 찰스 코크를 비롯해 전체의 7%가 이 부류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태어날 때부터 ‘홈 플레이트’를 밟고 있던 부류가 있다. 자산 138억달러로 부자 순위 20위에 이름을 올린 제과재벌 포페스트 마스는 세계 최대 규모의 과자회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 부류에 속한 부자는 400명 가운데 21.25%나 된다. UFE는 “<포브스>가 부자 명단을 처음 발표한 1982년 이후 미 400대 부자의 자산 총액은 918억달러에서 1조5300만달러로 15배가량 늘어난 반면, 같은 기간 미 평균 가구의 소득은 사실상 정체된 상태”라고 지적했다.
[%%IMAGE3%%]부유층 부과 세금 최저치로 떨어져
실제 미 진보적 격월간지 <머더존스>는 지난해 3·4월호에서 “지난 30년 동안 미국이 이룬 경제성장의 과실 대부분을 가구당 연평균 2700만달러(약 300억원)를 벌어들이는 소득수준 상위 0.01%가 차지했기 때문”이라며 “소득수준 상위 1%가 연평균 101만9089달러의 수입을 올리는 반면, 하위 90%의 평균 소득은 2만9840달러에 그치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가구당 보유 자산 규모도 마찬가지다. 경제위기 직전인 2007년을 기준으로 상위 1%가 미국 전체 자산의 34.6%를 차지한 반면, 하위 90%는 26.9%에 그쳤다. ‘1 대 99의 사회’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더구나 2007~2008년 부동산 거품이 터져 미국의 빈부 격차는 더욱 벌어졌을 것이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자료를 보면, 2007년을 기준으로 자산 규모 하위 60%에 해당하는 가구의 보유자산 가운데 주택이 차지하는 비중이 65%에 이른 반면 상위 1%는 주택 비중이 10% 남짓에 그쳤기 때문이다.
부자들의 자산 규모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사이 깨진 기록이 하나 더 있다. 부유층에 부과하는 세금이 사상 최저치까지 떨어진 게다. 조지 부시 행정부가 2003년부터 역점을 두고 추진한 ‘부자 감세’ 정책이 그 배후다. 미 국세청(IRS)이 지난 6월 초 낸 자료를 보면, 1995년 미국에서 소득이 가장 높은 400가구가 낸 평균세율은 29.93%였던 게 2007년 16.63%까지 떨어졌다. 더구나 400가구 가운데 6가구는 아예 소득세를 한 푼도 물지 않았고, 110가구에는 15% 이하의 세율이 부과됐다. IRS는 “연봉 6만1500달러를 버는 노동자의 평균 소득세율이 15%인 데 비해, 그 정도 금액은 3시간 단위로 벌어들이는 초고소득층 절대다수에겐 이보다 낮은 세율이 부과됐다”고 지적했다.
하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 의회조사국(CRS)이 지난 9월14일 내놓은 20쪽 분량의 ‘조세제도와 경제: 1945년 이후 최고세율에 대한 경제분석’ 보고서를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조세제도는 초고소득층의 세금을 감면해주는 쪽으로 지속적으로 바뀌어왔다. CRS는 보고서에서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까지만 해도 90%에 육박했던 초고소득층에 대한 한계세율(소득 증가액에 대한 세금 증가액의 비율)이 현재 30%까지 떨어진 상태”라며 “(양도소득세를 비롯한) 자본이득세율도 1950년대 25%에서 현재는 15%로 뚝 떨어졌다”고 지적했다.
지난 8월 말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공화당은 이른바 ‘공급 측면의 경제학’을 정강정책에 새삼 명시했다. 부자 감세를 통해 투자를 유발하고, 이를 통해 고용이 창출돼 경제가 성장한다는 논리다. 현실은 어떨까? 분석 결과, 1950년대 4.2%였던 평균 GDP 성장률은 2000년대 들어 1.7%로 뚝 떨어졌다. 같은 기간 1인당 실질 GDP 성장률 역시 2.4%에서 1% 이하로 추락했다. CRS는 “1945년엔 단 4.2%에 그쳤던 소득수준 최상위 0.1%가 미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07년엔 12.3%까지 늘었고, 같은 기간 50%였던 최상위 0.1%의 소득세율은 25%로 절반으로 줄었다”며 “부유층에 대한 세금 감면은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반면, 고용창출이나 경제성장 촉진에는 사실상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역할을 늘려야 한다’39% 그쳐
미국인들은 이런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 이상과 현실, 두 가지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먼저 ‘이상’이다. 마이클 노턴 하버드대학 교수(경영학)와 댄 애릴리 듀크대학 교수(행태경제학)는 지난해 6월 흥미로운 설문조사 결과를 담은 논문을 <심리과학협회지>에 발표했다. 연구팀이 소득과 정치 성향이 미국 평균치에 부합하는 성인 5522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응답자의 약 92%가 상위층보다 하위층과 중산층의 소득 비율이 더 높은 ‘스웨덴식 분배 제도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특히 민주당 지지자(93%)뿐 아니라 공화당 지지자(90.5%)도 엇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애릴리 교수는 이를 두고 “추상적 차원에선 미국인들도 공정한 사회를 원하는 욕구가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현실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9월18일 인터넷판에서 여론조사 전문기관 갤럽이 내놓은 최신 자료를 통해 “미 유권자의 54%는 ‘정부가 지나치게 많을 일을 하고 있다’고 답한 반면, ‘정부의 역할을 늘려야 한다’는 유권자는 전체의 39%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특히 부동층이라고 밝힌 유권자 10명 가운데 6명이 ‘작은 정부론’을 선호한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극심해지는 빈부 격차에 대한 걱정에도, 분배정의 실현을 위해 정부의 역할이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에는 여전히 부정적이란 얘기다.
이런 불일치의 원인은 뭘까? 노턴-애릴리 교수 연구팀은 △빈부 격차의 심각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빈부 격차의 발생 원인을 잘못 짚고 △자신들 역시 언젠가는 ‘부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구팀은 “미국인의 절대다수는 경제적 불평등에 불만을 품고 있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한 공공정책에 대해선 선호도가 크게 엇갈리고 있다”며 “실제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정책에 대해 유권자 대부분이 지지할 가능성이 높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99%다.’ 지난 9월17일 미국 뉴욕 맨해튼 중심가에서 오랜만에 낯익은 풍경이 연출됐다. 1천여 명의 시위대가 여러 부류로 나눠 도심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와 거리행진을 벌였다. 이날은 지난해 주코티 공원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된 ‘월스트리트 점령운동’(OWS)이 1주년을 맞은 날이다. 브로드웨이 등지에서 행진을 시작한 시위대가 향한 곳은 어김없이 뉴욕증권시장이었다. 일찌감치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비한 뉴욕경찰한테 이날 체포된 시위자 수만 150여 명에 이른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미국에서 가장 우려할 만한 현상은 소득과 자산이 극소수 최상위층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권력까지 이들에게 집중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치권력으로 이들은 세금을 내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키우는 데 혈안이 돼 있다. …반면 한때 미국민의 절대다수를 이루던 중산층은 지속적으로 쇠퇴해가고 있다. 중산층의 구매력이 떨어지면 기업도 투자와 신규 고용을 줄이게 되고, 결국 경기도 둔화될 수밖에 없다.”
“지금은 민주주의 자체가 위태로워”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노동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미국 버클리대학 교수(공공정책학)는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둔 지난 8월30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그는 이어 “정부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다. 누구를 위한 정부인지가 중요하다”며 “지금은 민주주의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라이시 교수가 적어놓은 글의 제목이 새삼스럽다. ‘바보야, 문제는 불평등이야!’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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