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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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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애도 뚝 그칠 ‘제거의 달인’

이스라엘 첩보·공작기관 모사드의 역사…
총살·폭탄·미사일·독약 등 수단을 가리지 않는 무자비한 암살로 악명 떨쳐
등록 2010-03-04 18:12 수정 2020-05-03 04:26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지만,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구약성서 잠언 11장 14절의 경구이자,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모토다. 오랜 세월 온갖 악명을 떨치고 있음에도, 모사드는 건국 초기부터 누가 뭐래도 이스라엘의 ‘지략가’이자 ‘모사’였다.

경기 화성시 한 아파트 단지에서 주민 100여 명이 몰려와 정신장애인이 사는 1층 집 밖에서 시위를 벌였다. 정신장애인이 주민을 때린 게 계기였다. 지난해 6월10일이다. 베란다 모기장을 찢어 확성기까지 들이댔다고 가족은 말했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경기 화성시 한 아파트 단지에서 주민 100여 명이 몰려와 정신장애인이 사는 1층 집 밖에서 시위를 벌였다. 정신장애인이 주민을 때린 게 계기였다. 지난해 6월10일이다. 베란다 모기장을 찢어 확성기까지 들이댔다고 가족은 말했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이스라엘 방어 최전선” 집중적으로 육성

모사드의 기원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뒤인 1945년 시온주의 운동가들이 꾸린 ‘하가나’란 비밀조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가나는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을 영국이 신탁통치를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땅으로 수송하는 작전을 주도했다. 유대인 대거 유입이 아랍인과의 갈등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영국 쪽은 ‘하가나 난민’을 태운 선박을 나포해 키프로스에 마련한 수용시설로 보냈다. 하가나 쪽은 점차 영국군을 ‘점령군’으로 여기게 됐고, 그들의 동태를 면밀히 살피는 등 사실상 첩보 활동을 개시했다. 하가나를 모사드의 전신으로 보는 이유다.

1948년 5월 영국군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철수했다. 앞서 유엔총회는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해 5월14일 마침내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됐고, 이어진 핏빛 전투에서 신생 유대인 국가는 용케 살아남았다. 새 나라가 제자리를 잡자, 다비드 벤구리온 초대 총리는 정보기관을 셋으로 나눠 설치했다.

군사 정보는 ‘아만’이 맡았다. 국내 정보는 ‘신베트’에 맡겨졌다. 그리고 해외 정치·경제·군사 정보 수집과 분석을 총괄하는 ‘정치국’을 외교부 산하에 뒀다. 이스라엘 정부는 1947년 창설된 미 중앙정보국(CIA)을 모델로 1951년 3월 ‘정치국’을 모사드로 탈바꿈시킨다. 벤구리온 총리는 당시 모사드를 “적국에 포위된 이스라엘 방어의 최전선”이라 치켜세우며, 예산을 10배나 증액해 힘을 실어줬다.

모사드가 그 이름을 전세계에 알린 것은 창설 4년여 만인 1956년 초다. 그해 2월25일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제20차 당대회에서 전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의 독재를 비판하는 비공개 연설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사드 쪽은 흐루쇼프의 연설문 전문을 입수해 미 CIA에 전달했다. 만만찮은 저력을 선보인 셈이다.

모사드 창설 초기를 대표하는 전설적 요원으로는 볼프강 로츠와 엘리 코헨이 꼽힌다. 이들은 1960년대 초·중반 각각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권력 핵심부에 접근해 온갖 군사기밀을 빼냈다. 1965년 5월 카이로에서 발각된 로츠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포로교환 형식으로 3년여 만에 석방됐지만, 앞서 같은 해 1월 체포된 코헨은 다마스쿠스에서 공개 교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이들이 수집해온 정보로 무장한 이스라엘군은 1967년 6월 벌어진 ‘6일 전쟁’에서 이집트와 시리아를 압도했다.

냉전이 불을 뿜던 1960~70년대 모사드의 위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 세 가지 있다. 첫손에 꼽히는 것은 나치 전범으로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아돌프 아이히만을 15년여 추적 끝에 붙잡은 사건이다. 모사드 요원들은 1960년 5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잠입해 독일계 사업가 행세를 해온 아이히만을 납치해 이스라엘로 끌고 왔다. 8개월여의 재판 끝에 사형에 처해진 아이히만 사건은 전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인질 전원 구출한 ‘엔테베 작전’으로 성가 높여

1972년 9월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검은 9월단’이 독일 뮌헨의 올림픽 선수촌을 급습해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을 인질로 잡는 사건이 벌어졌다. 인질은 끝내 모두 숨졌고, 골다 메이어 당시 이스라엘 총리는 즉각 ‘X위원회’란 이름의 특별기구를 꾸리고 ‘신의 분노’란 작전명으로 보복 공격에 나섰다. 모사드가 이를 주도했음은 물론이다.

1972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현지 지부장 와엘 즈와이테르 암살작전을 시작으로 불과 1년여 만에 PLO 고위인사 10명이 잇따라 ‘제거’됐다. 이 과정에서 모사드는 1973년 7월 노르웨이 휴양도시 릴레함메르에서 ‘검은 9월단’ 작전국장으로 알려진 알리 하산 살라메를 암살하려다 애먼 모로코인 웨이터 아메드 부치키를 죽이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때 모사드 요원 6명이 현지 당국에 체포되기도 했다. 모사드는 1979년 1월22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차량폭탄을 이용해 살라메를 결국 암살했다.

1976년 7월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서 벌인 이른바 ‘엔테베 작전’도 빼놓을 수 없는 ‘전설’이다. 당시 이스라엘 특수전 요원들은 수송기 4대에 나눠 타고 우간다까지 날아가, 야음을 틈타 항공기 납치범들을 사살하고 인질 대부분 무사히 구출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쪽의 유일한 전사자는 현장 전투를 지휘했던 요나탄 네타냐후 중령뿐이다. 그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친형이다.

1980년대 들어 모사드의 활동은 더욱 거침이 없어졌다. 1981년엔 핵무장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이라크의 오시라크 원전을 ‘원정 폭격’하기도 했다. 최대 우방국인 미국의 정보요원을 포섭해 군사기밀을 빼낸 1985년 조너선 폴라드 사건과 1986년 자국의 핵무장 사실을 폭로한 자국민 모르데차이 바누누를 이탈리아 로마에서 납치해 강제 압송한 사건은 우방국마저 모사드의 ‘작전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냉전이 끝난 뒤에도 모사드의 표적 암살은 불을 뿜었다. 1990년 3월 이라크에 다단계 로켓 기술을 넘길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캐나다 출신 탄도탄 전문가 제럴드 불을 벨기에 브뤼셀에서 암살한 게 대표적이다. 이츠하크 라빈 전 총리 주도로 평화협상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1990년대 중반 들어 모사드의 활동은 잠시 주춤하는 듯했다. 하지만 1995년 11월4일 라빈 총리가 극우파의 흉탄에 암살되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반전됐다.

1996년 1월 잇따른 자살폭탄 공격의 배후로 지목돼온 하마스 거물급 인사 야히아 아야쉬를 신종 ‘휴대전화 폭탄’ 공격으로 살해하는 등 표적 암살이 재개됐다. 특히 2000년 9월 제2차 인티파다가 시작된 이후 1년 남짓 만에 팔레스타인 저항단체 지도급 인물 40여 명이 차례로 암살의 표적이 돼 스러져갔다. 이 무렵의 표적 암살은 아예 아파치 공격용 헬기를 동원해 헬파이어 미사일을 발사하는 공개적인 방식으로 이뤄졌다.

냉전 종식 뒤 주춤하다 21세기에 부활

하마스에 대한 모사드의 ‘집착’도 역사가 깊다. 1997년 9월엔 하마스 지도자 칼레드 마샬을 독살하려던 모사드 요원 2명이 요르단 암만에서 체포됐다. 당시 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이스라엘 정부에 강력히 항의했고, 미국·캐나다 등도 이스라엘을 압박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당시 총리는 결국 해독제를 전해주는 한편 체포된 모사드 요원 석방의 대가로 하마스 창설자인 셰이크 아메드 야신을 석방시켰다.

그로부터 7년여 뒤인 2004년 3월22일 이스라엘군은 휠체어를 탄 채 새벽 기도를 마치고 사원을 나서던 야신에게 헬파이어 미사일을 퍼부었다. 그의 후계자로 지명된 압델 아지즈 란티시 역시 그해 4월17일 같은 방식으로 살해됐다. 당시 모사드 국장은 2002년 8월 아리엘 샤론 총리가 임명한 메이어 다간이었다. 2010년 2월 현재도 모사드를 이끌고 있는 그에겐 “창의성이 지나쳐 무모하기까지 한 인물”이란 평가가 따라다닌다. 별명은 ‘총’이란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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