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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 노벨평화상’, 지급 불가!

미 연방정부 예산안에서 국방예산이 7080억달러 규모, ‘전쟁광’ 부시를 상회하는 수준
등록 2010-02-10 14:08 수정 2020-05-03 04:25

‘1초에 730만달러.’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2월1일 ‘2011 회계연도’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동시에 2개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나락으로 떨어졌던 경제는 아직 완연한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일자리 창출과 경기 부양을 위해선 재정지출을 줄일 수 없다. 여기에 ‘100년 만의 개혁’으로 불리는 의료보험 개혁도 앞두고 있다. 이래저래 돈 쓸 일이 산적해 있다. 예산안 공개에 앞서 오바마 대통령이 심란해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2월1일 관련 부처 장관들과 함께 2011 회계연도 예산안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회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REUTERS/ JASON REED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2월1일 관련 부처 장관들과 함께 2011 회계연도 예산안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회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REUTERS/ JASON REED

주류 언론은 재정적자 걱정

“이번 예산안은 미국이 얼마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는지를 반영한다. 두 지역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하고 있고, 지난 2년 동안 7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방탕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지난 10년 세월의 후과로 심각한 재정적자의 늪에 빠져 있으며….”

내년 미 연방정부 예산의 총규모는 3조8천억달러, 국내총생산(GDP)의 25.1%에 이르는 천문학적 액수다. 는 2월3일 인터넷판에서 “원안대로 의회를 통과한다면, 1초에 730만달러씩 지출하게 되는 셈”이라고 전했다. 세부 내용을 보면, 고용 창출을 위한 예산 1천억달러를 포함해 경기 부양책이 대거 포함됐으며, 이로 인해 천문학적으로 불어날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증세 방안도 포함돼 있다. 이 밖에 의료보험 개혁 등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메디케어(노인의료보장) 관련 예산을 축소하는 등의 내용도 담겼다. 메디케어 등 복지예산 삭감은 민주당 쪽에서, 고소득자 증세 등은 공화당 쪽에서 선선히 넘어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눈덩이처럼 커지는 재정적자에 대해서도 비교적 솔직한 평가를 내놨다. 지난 2009 회계연도에 1조4천억달러를 기록했던 재정적자가 오는 9월 말 끝나는 2010 회계연도엔 1조6천억달러까지 늘어날 것이란 암울한 전망이 그것이다. 백악관 쪽은 “2011 회계연도엔 재정적자 폭이 1조3천억달러까지 줄어들 것”이라고 덧붙였지만, 당장 주류 언론을 중심으로 재정적자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는 2월2일 “기록적인 경제성장이나 기적적인 정치적 타협을 통해 향후 10년 안에 전례없는 정치·경제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오바마 대통령과 그 후임자가 국내적으로 새로운 정책적 시도를 할 수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도 같은 날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재정적자가 국가 안보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진보 진영에선 전혀 다른 측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시사주간지 은 2월3일치 인터넷판에서 “엄중한 위기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일자리 만들기와 인프라 투자, 교육과 의료 서비스 확대, 대안에너지 개발 등”이라며 “이를 위해 낭비적인 세금 인하나 부유층에 대한 각종 세제 혜택, 툭하면 예산을 초과하면서 부패의 온상이 되는 국방예산을 대폭 줄여야 한다”고 꼬집었다. 은 “이런 것들이야말로 미국의 안보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측면”이라며 “(예산안에) 더 많은 내용을 담아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핵무기 관련 지출 대폭 늘어

관심의 초점은 단연 7080억달러 규모의 국방예산이다. 전년 대비 3.4%(약 180억달러) 증액된 일반예산 5490억달러에, 이라크·아프간·파키스탄 전쟁 경비 1590억달러가 별도로 잡혔다. 백악관 쪽은 이미 2010 회계연도 전쟁경비 1296억 달러에 아프간 3만 병력 증파에 따른 추가예산 330억달러를 추가로 편성해줄 것을 의회에 요청한 상태다. 천문학적인 재정적자 때문에 향후 3년간 정부의 재량 지출을 동결하겠다고 밝힌 오바마 대통령이 유독 국방비엔 후하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몇 가지만 따져보자.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이전부터 “핵무기 없는 세상”을 역설했다. 지난해 오바마 대통령이 ‘선불제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도 이런 ‘비핵화’ 의지에 대한 후한 평가가 결정적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그럼에도 내년 예산안에서 핵무기 관련 지출이 대폭 늘었다. 〈AP통신〉은 2월1일 “2010년 예산안에서 핵무기 관련 예산이 약 62억달러에 그친 반면, 2011년 예산안에선 관련 예산이 8억달러가량 늘었다”며 “특히 비확산 관련 예산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은 반면 핵무기와 직접 관련된 예산은 대폭 증액됐다”고 전했다. 앞서 영국 는 1월31일치에서 “노벨평화상을 받은 오바마 대통령이 내놓은 핵무기 관련 예산 규모는 ‘전쟁광’ 소리를 듣던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예산안 발표와 때를 맞춰 2월1일 ‘4년차 국방검토 보고서’(QDR)를 내놓으면서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국방예산 투입의 우선순위가 냉전 시절의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보면, 그 차이가 뭔지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은 2월2일 미 국방부의 발표 내용을 따 “무인항공기 실전 배치를 현행 37대에서 2배가량 늘리고, 예멘 등 분쟁 예견 지역에 대한 군사원조를 대폭 확대해 현지에서 알카에다와 맞설 수 있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낯익은 ‘대리전’이요, ‘저강도 전쟁’이다. 냉전과 뭐가 다른가?

특수전 분야에 전체 국방예산의 6%에 이르는 63억달러를 배정한 것도 눈길을 끌 만하다. 이를 통해 “특수전 요원 2800여 명을 늘리는 한편, ‘비정규전 능력’을 대폭 강화할 것”이라는 게 미 국방부의 설명이다. 또 육지·바다·하늘과 마찬가지로 사이버공간 역시 잠재적 분쟁지역으로 상정하고, 사이버 군사력 강화를 위한 노력에도 박차를 가할 예정이란다. 지구촌 전역 4천여 미군기지에 깔린 1만5천여 컴퓨터 네트워크를 방어할 사이버전 전담인력 확보 계획도 포함돼 있단다. 여전히 ‘미국이 세계를 책임지겠다’는 의지가 분명해 보인다.

20년 전 끝난 냉전의 망령

“오바마 행정부 들어서도 여전히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국방예산의 본질적인 문제는 미국이 여전히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려 든다는 점이다.” 진보적 싱크탱크인 정책연구센터(IPS)는 지난 1월 말 펴낸 ‘대안 국방예산 연차보고서’에서 “한 해 2500억달러에 이르는 해외 주둔 미군기지를 줄이면, 국방예산 감축은 물론 미군 주둔으로 인해 툭하면 불거지는 반미 감정까지 낮출 수 있다”고 지적했다. IPS는 이어 “핵무기 등 실전 배치된 무기체계 감축만으로도 줄잡아 600억달러의 예산을 줄일 수 있다”며 “군수업계의 로비가 깊숙이 개입된 국방부의 획득·조달 과정에 낀 낭비적 요소만 없애도 충분히 비슷한 규모의 예산 감축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냉전은 벌써 20년도 전에 끝났다. 조지 부시 행정부가 만들어낸 ‘대테러 전쟁’의 망령도 주춤해진 터다. 언제까지 과거에 기대 살 것인가. 과도한 국방예산이 만들어낸 ‘말단 비대증’에서 벗어날 때도 됐건만.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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