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의 거대한 음모가 부활했다. 미국이 변했기 때문에 과거처럼 강력한 효력을 발휘하진 못하겠지만, 그 해악만큼은 여전하다.”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은 지난 10월4일 의 간판 대담 프로그램 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집권 초기 의료보험 개혁을 추진하려다 보수파의 조직적 반발에 밀려 좌절했던 그다. 이후 ‘클린턴 연대기’로 불린 온갖 추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8년 집권 기간 내내 악전고투를 거듭해야 했다. 이쯤되면 ‘음모론’을 입에 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다.
클린턴 정부 흔들던 주역들의 컴백인터넷 매체 이 10월5일 소개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출생과 관련된 논란은 최근 워싱턴 정가를 배회하는 음모론의 백미로 꼽을 만하다. 내용인즉, 오바마 대통령이 케냐에서 태어났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출생증명서까지 있다는 게다. 미 헌법은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흥미로운 건 클린턴 행정부 흔들기를 주도했던 인물들이 8년의 시차를 두고 고스란히 새로운 음모론을 양산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움직임이 눈길을 끌기 시작한 건 지난해 대선전이 한창이던 9월 말께부터다. 이 무렵 ‘전미공화당트러스트’(NRT)란 낯선 단체가 막대한 자금력을 뽐내며 오바마 당시 민주당 후보를 겨냥한 인신공격성 텔레비전 광고를 잇따라 내보냈다. 방송 프로듀서 출신으로 이 단체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스콧 윌러는 1990년대 클린턴 전 대통령의 집권 전 사생활을 집요하게 추적해 각종 인신공격성 루머를 끊임없이 내놓은 인물이다.
윌러뿐이 아니다. 은 “윌러와 함께 클린턴 행정부 흔들기를 주도했던 극우 성향의 월간지 와 인터넷 매체 의 편집자 크리스토퍼 루디 역시 NRT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고 전했다. 전통적인 보수파의 기관지 격인 보다 2배가량 많은 13만 정기독자를 거느린 는 지난 몇 년 새 영향력이 급증하면서, 미 극우파의 본산을 자임하고 있다. 한 달 400만 명가량이 다녀가는 은 지난해에만 3천만달러의 수입을 올렸단다.
이들 매체에 실리는 기사는 러시 림보, 글렌 벡 등 극우 성향의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들의 입을 통해 미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극우 음모론의 증폭기제다. 오바마 행정부에 ‘사회주의’의 딱지를 붙인 것도 이들 매체다. 특히 은 지난 9월 말 익명의 ‘언론인’ 명의로 된 칼럼에서 미 군부에 오바마 행정부에 대항해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은근히 부추기는 글을 올렸다가 파문이 커지자 삭제하기도 했다.
음모론의 발호와 때를 같이해 낯익은 ‘이익집단 정치’도 워싱턴 정가에서 불을 뿜고 있다. 은 10월2일치에서 “거대 제약업체와 의료보험사, 병원과 의료인 단체가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하는 의료보험 개혁의 발목을 잡기 위해 막대한 로비자금을 뿌려대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의료보험 개혁과 관련 활동을 위해 의회에 등록한 로비스트만 따져도 의원 1명당 6명꼴에 이른다”며 “이들 업계가 최근 몇 달 새 의회 로비와 텔레비전 광고, 정치자금 기부 등에 쏟아부은 자금만 줄잡아 3억8천만달러에 이를 것이란 추정치까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하루에 뿌려지는 로비자금 140만 달러”앞서 도 지난 7월6일치에서 일찌감치 이런 상황을 우려한 바 있다. 이미 이 무렵부터 의료보험·제약·병원 업계에서 350명이 넘는 전직 정부·의회 관계자들을 고용해 옛 상사와 동료들을 겨냥한 전방위 로비작전에 나섰다는 게다. 신문은 공개된 로비 관련 자료를 분석해 “이들 업계가 쏟아붓고 있는 각종 로비자금만 하루 140만달러에 이른다”고 전한 바 있다.
업계의 로비가 집중되는 건 민주·공화 양당에서 3명씩 참가해 의료보험 개혁법안 논의를 벌인 이른바 ‘의료 개혁 6인방’로 불리는 6명의 상원의원이다. 은 지난 9월20일치에서 책임정치센터(CRP)의 자료를 따 “이 의원들이 올 들어 지난 6월 말까지 의보업계 등으로부터 받은 정치자금은 평균 7만4600달러”라며 “같은 기간 나머지 상원의원들이 이들 업계로부터 받은 정치자금은 평균 5만9632달러에 그친다”고 전했다.
특히 ‘6인방’의 ‘평균 성적’을 크게 높인 인물은 22만3600달러를 받은 척 그래슬리 의원(공화·아이오와) 과 14만1천달러를 받은 맥스 바커스 의원(민주·몬태나)이다. 이들은 의료보험 개혁의 최대 난제로 꼽히는 재정적자 문제를 관장하는 상원 재정위원회에서 각각 부위원장과 위원장을 맡고 있어, 의보 개혁의 ‘핵심 중 핵심’으로 꼽혀왔다. 미 정치자금 감시단체 ‘책임정치센터’의 자료를 보면, 바커스 의원이 지난해에만 의료부문 업계로부터 받아 챙긴 정치자금은 무려 150만달러에 이른다.
그러니 재정위가 논란 끝에 성안해 내놓은 의료보험 개혁법안에 업계의 바람이 상당 부분 반영돼 있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닌 게다. 제약업계가 극렬 반발해온 약품값 상한선 제도는 흐지부지 사라졌다. 싼값에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의료보험을 도입해 의보시장을 개혁해내겠다며 꺼내들었던 ‘퍼블릭옵션’ 제도 역시 언급이 없다. 공공의보 도입은 의보업계가 가장 두려워한 조항이었다. 여기에 의료보험 의무가입 조항이 신설돼, 재정위 안이 통과되면 신규 가입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래저래 업계로선 ‘보람’을 느낄 만하다.
“재정위 법안에 따르자면 국가가 민간 의보사에 돈을 내도록 강제하겠다는 꼴이다. 그동안 정부가 약속한 것과 판이하다.” ‘전 국민 의료보험제 도입을 위한 의사회’(PNHP) 창설자인 스테피 울핸더 하버드대 교수(의학)는 과 한 인터뷰에서 “결국 의료보험 업계가 완승을 거둔 셈”이라고 꼬집었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 출신으로 지난해 말 오바마 행정부의 정권 인수위에서 경제분과 자문위원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버클리대 교수(공공정책)는 더 음울한 분석을 내놨다.
“오바마 대통령은 클린턴 행정부 시절 의료 개혁을 좌절시킨 (의료보험·제약·병원 등) 업계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다. 돈의 힘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이 때문에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심정으로, 의보 개혁 자체를 살리기 위해 약값 상한선과 퍼블릭옵션 등에서 양보를 하는 대신 의보 개혁에 대한 업계의 지지를 얻는 쪽으로 합의를 이루고 말았다.”
이르면 10월 안 상원 전체회의에 상정될 듯10월8일 미 의회예산처(CBO)는 상원 재정위가 내놓은 의보 개혁법안에 대한 분석 결과를 내놨다. 는 이날 인터넷판에서 CBO의 보고서 내용을 따 “향후 10년 동안 8290만달러의 예산을 투여해 미 국민 2900만 명이 추가로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며 “같은 기간 연방정부 재정적자는 810억달러 줄어들 전망”이라고 전했다. CBO는 “이로써 2019년에 이르면, 미 국민의 의료보험 가입률은 현 83%에서 94%까지 높아질 것”이라며 “2019년까지 의료보험 미가입 인구는 불법체류자를 포함해 2500만 명 선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로써 의보 개혁의 발목을 붙잡아온 재정적자에 대한 부담은 일단 털어냈다. 는 재정위 법안이 위원회 전체 토론을 거쳐, 이르면 10월 안에 상원 전체회의에 부쳐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미 지난 7월 상원 보건·교육·노동·연금위원회가 별도의 개혁법안을 제출해놓은 상태다. 보건위 법안에선 ‘퍼블릭옵션’ 등 쟁점 조항이 살아남았다. 두 법안을 놓고 상원에서 막판 논쟁이 불을 뿜을 무렵, 음모론과 로비의 검은 권모술수도 절정으로 치달을 듯싶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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