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타임 탈레반.’
옛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 땅으로 탱크를 몰고 들어온 게 1979년 12월이다. 싸우다 지친 그들이 1989년 2월 아프간 땅에서 완전히 물러간 뒤에도 평화는 오지 않았다. 각지에서 발호한 군벌이 각축하며 5년여 핏빛 내전이 이어졌다. 그 전쟁의 끝자락에서 1996년 수도 카불을 장악한 것은 탈레반이었다. 탈레반 집권 기간에도 총성이 아예 멈춘 것은 아니었고, 2001년 10월 미군의 침공으로 다시 전면전이 불을 뿜었다. 30년 전쟁, 지독한 싸움터다. 성하게 남아 있는 게 많지 않을 수밖에.
“일자리를 찾지 못한 가난한 아프간 젊은이들이 직업 삼아 탈레반에 가담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인터넷 대안매체 운동단체 ‘전쟁과 평화보도 연구소’(IWPR)는 지난 4월23일 이렇게 전했다. 아프간 서부 파라주 푸슈트로드 출신인 20대 청년 2명의 일상을 추적한 기사였다. 압둘라 잔(가명)과 압둘 칼레크, 둘 다 실업 상태에서 일용노동 일자리를 찾아헤매고 있다. 현지에서 일용직 노동자의 일당은 평균 200아프가니, 미화 약 4달러에 해당한단다.
하지만 둘 사이엔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압둘 칼레크는 주로 삽질을 하거나 페인트칠을 해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압둘라 잔은 때로 경찰 검문소를 습격하는 것으로 일당을 벌고 있다. 그의 직업은 ‘시간제 탈레반 전사’다. IWPR는 잔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우리 집 여덟 식구 가운데 내가 유일하게 돈을 벌고 있다. 고향에 있을 때 일자리를 얻으려고 이란 국경을 세 차례나 넘어봤지만, 번번이 추방을 당했다. 빚도 있고 아버지가 도시로 가자고 해서 이사를 했다. 3주간 일자리를 찾아헤맸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덜컥 동생이 아파 병원에도 데려가야 했다. 동생은 결국 숨을 거뒀다. 힘든 상황에서 친구들이 지역 탈레반 조직을 찾아가보라고 권했다.”
잔의 어머니는 극구 반대했단다. 여러 차례 탈레반에 가담하지 말라고 설득까지 했단다. 하지만 아버지는, 무겁게 침묵을 지켰다. 아들이 감수해야 할 위험에 대한 걱정보다 당장의 호구가 절실했을 터다. 잔의 말을 더 들어보자.
“첫 번째 일거리는 구아칸 지역에 있는 경찰 검문소를 습격하는 것이었다. 경찰 4명을 사살했고, 동료 2명을 잃었다. 1명은 크게 다쳤다. 교전은 2시간가량 이어졌다. ‘진짜 탈레반’들이 배후에서 우리를 무전으로 독려했다. 교전이 끝나자 지역 탈레반 사령관이 400아프가니를 줬다. 나중에 더 잘 싸우면 ‘일당’을 올려주겠다고 하더라. 그 뒤 다섯 차례 검문소 습격 사건에 가담했다. 요즘은 일주일에 1천아프가니 정도를 번다.”
잔은 이런 식으로 일주일에 몇 시간씩 탈레반으로 탈바꿈한다. ‘일거리’가 없을 때는 집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총을 비롯해 어떤 무기도 지니고 있지 않다. ‘일’을 하러 가면 필요한 것을 탈레반 쪽이 내주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를 ‘탈레반 전사’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단다. 그저 “돈 때문에 싸우는 것일 뿐”이란다. 불안감이 왜 없을까. 위험은 늘상 엄습해온다. ‘직업이 탈레반’임에도 더러는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기도 한다. 압둘라 잔은 IWPR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라후마툴라라는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 아주 용감한 친구였다. 2주 전에 카레즈 셰크하 검문소를 습격했다가, 총격전 도중 목숨을 잃었다. 그 뒤로 이 일에 정이 뚝 떨어졌다. 빨리 다른 일거리를 찾았으면 좋겠다. 일자리만 찾으면 당장이라도 그만두겠다. 죽고 싶지 않다. 우리 식구 중에 내가 유일하게 돈벌이를 하고 있는데….”
파라주만이 아니다. 남부 헬만드·우루즈간·자불주에서도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발견된다. 모두 탈레반이 드세게 움직이는 곳이다. IWPR는 “탈레반 전체 병력의 70%가량이 이런 식으로 양산된 ‘시간제 전사’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얼굴을 가린 채 총을 든 아프간 청년 절대다수가 오도된 종교적 신심 때문이 아니라, 그저 먹고살기 위해 나섰다는 얘기다.
문제는 폭력의 ‘가혹한 사슬’이다. 일자리 삼아 탈레반으로 변신하는 젊은이들이 늘면서 치안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치안 불안은 경제활동을 위축시키기 마련이다. 재건·복구도 엄두를 낼 수 없다. 일자리는 더욱 줄어들고 있다. 제 발목에 쇠차꼬를 채우고 있는 셈이다.
지난 5월4일 압둘라 잔이 살고 있는 파라주에서 탈레반과 미군·아프간군 사이 격렬한 교전이 벌어졌다. 파라주 발라발룩 지역의 게라니·간자바드 두 마을이 전투의 중심이었다. 만 하루를 넘겨가며 불을 뿜던 전투는 미군의 폭격과 함께 일단락됐다.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건물 잔해 속에서 발견된 주검이 너무 많았다. 아프간 정부와 의회 쪽에선 사망자가 130~140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반면 〈AP통신〉은 “미군 당국이 희생자의 규모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피한 채, ‘사망자에게 지급되는 위로금을 노리고 피해 규모를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오바이둘라 헬랄리 의원을 단장으로 하는 의회 진상조사단이 현지로 급파됐다. 은 5월13일 조사단의 보고서 내용을 따 “현장조사 결과 희생자는 약 140명으로 확인됐으며, 이 가운데 90여 명이 어린이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지난 6년여 전쟁 기간에 발생한 최악의 민간인 피해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앞서 오바마 행정부는 5월11일 데이비드 매키어넌 아프간 주둔군 사령관을 전격 해임하고, 합동특수전 사령관을 지낸 스탠리 매크리스털 중장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무차별 공습은 ‘양날의 칼’이다. 한쪽 날에 베이는 건 다치고 죽어가는 아프간 민간인이다. 미군을 비롯한 아프간 주둔 외국군들도 돌아서는 민심이란 다른 쪽 날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있다. 파라 오폭 사건이 발생한 직후 워싱턴을 방문 중이던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은 잇따른 언론 인터뷰에서 “무차별 공습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이에 대한 미국의 공식 반응은 5월10일 제임스 존스 미 백악관 국가안보좌관이 내놨다. 그는 “한 손을 묶은 채로 전쟁을 치를 순 없다”며 공습 중단 요구를 일축했다.
무차별 공습에 자살폭탄으로 맞서오폭 사건으로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면서 탈레반의 ‘도발’은 한층 과감해졌다. 5월12일부터 14일까지 사흘 동안 남동부 파키스탄 국경지대에선 자살폭탄 공격과 교전이 줄을 이었다. 5월12일엔 남동부 국경도시 코스트에서 시장 공관 등을 겨냥한 자살폭탄 공격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비슷한 시각 무장괴한들이 한때 시 청사를 장악하고 공무원들을 인질 삼아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2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튿날엔 코스트 외곽의 미군기지 캠프 살러노 부근에서 자살폭탄 공격이 벌어져 7명이 죽고 21명이 다쳤다. 5월14일엔 남부 칸다하르주 국경도시 스핀볼다크의 경찰서 앞에서 자살폭탄 공격이 벌어져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혈이 도처에 낭자했다.
파키스탄의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은 아프간에 주둔 중인 미군을 손가락질하며 신병을 끌어모으고 있다. 그래서 아프간은 파키스탄의 미래다. 아프간에서 미군이 언제쯤 빠져나올 수 있느냐에 두 전쟁의 성패가 달려 있다. ‘아프팍’(AfPak)은 하나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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