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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과 미국 사이 봄이 오는가

오바마 대통령, ‘누루즈’ 축하하는 ‘유튜브 외교’… 이란 반응에 대한 해석은 제각각
등록 2009-04-02 07:43 수정 2020-05-02 19:25

페르시아력으로 새해 첫날을 ‘누루즈’라 부른다. 매년 서력 3월21일을 전후로 누루즈를 맞게 되는데, 말하자면 우리의 ‘입춘’에 해당하는 날이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이날을 봄의 시작으로 여겨 축제를 벌였다. 요즘도 이란의 각급 학교는 이날부터 12일간 봄방학에 들어간다. 이란뿐 아니라 이라크·아프가니스탄·터키·파키스탄 등지에서도 누루즈를 명절로 쇤다.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축제인 게다.

시아파 최고지도자 “뭐가 변했단 말인가”

“누루즈를 맞은 전세계 모든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건넵니다. 누루즈 명절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의례이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날입니다. 가족·친지들과 함께 이 특별한 명절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누루즈’는 봄의 시작. 새 출발을 알리는 명절이다. 지난 3월20일 이란 수도 테헤란의 한 가정집에서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이란 여성이 위성방송을 통해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누루즈 축하 메시지’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 AP PHOTO/ VAHID SALEMI

‘누루즈’는 봄의 시작. 새 출발을 알리는 명절이다. 지난 3월20일 이란 수도 테헤란의 한 가정집에서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이란 여성이 위성방송을 통해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누루즈 축하 메시지’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 AP PHOTO/ VAHID SALEMI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지난 3월19일 누루즈를 앞두고 ‘비디오 축하 메시지’를 내보냈다. 백악관이 홈페이지에 올린 동영상에는 페르시아어 자막이 달려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 스스로도 메시지의 ‘배달처’가 어디인지 분명히 했다. 그는 이란 국민과 함께 ‘이란 지도자들’이란 표현을 여러 차례 입에 올렸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도 누루즈 축하 메시지를 내보낸 적이 있지만, ‘이란 지도자’에 대해 언급한 적은 한 차례도 없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란을 ‘이란 이슬람 공화국’으로 불렀다.

3분35초 분량의 비디오 메시지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30년 세월 두 나라 관계가 순탄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1979년 2월 이슬람 혁명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미국-이란 관계는 그해 말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에 젊은이들이 난입해 들어간 뒤부터 꼭 444일 동안 지속된 ‘이란 인질 사태’로 파국을 맞았다. 그 뒤 두 나라는 공식적인 외교관계 없이 지내왔다. 오바마 대통령은 “두 나라 사이에 오랜 세월 커져온 인식 차가 존재하는 게 현실”이라며 “이제 미국은 외교를 통해 양국 간 현안을 풀어나갈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사실상 ‘대화’를 제안하고 나선 게다. 그는 “미국과 이란, 국제사회가 건설적인 관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정직하고 서로가 존중하는 관계를 추구해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국은 이란이 국제사회에서 격에 맞는 자리를 찾기 바란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책임도 따른다. 테러나 무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란 국민과 문명의 진정한 위대함이 발현될 수 있는 평화적인 방식이어야 한다. 그럴 때만 국제사회에서 당당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란 시인의 시구를 따 “아담의 후예는 서로에게 팔다리와 같은 존재이며, 결국 하나에서 창조돼 나왔다”는 말로 메시지를 마무리했다. 페르시아어로 ‘작별 인사’까지 했으니, ‘예의’는 제대로 갖춘 모양새다. 3월27일 오전까지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대이란 메시지를 조회한 횟수는 모두 55만3천여 건에 이른다. 이쯤되면 ‘유튜브 외교’라는 신조어가 나올 법하다.

중동 언론 “대화 제의 환영” 해석

“미국이 이란에 대한 적대정책을 청산하고 외교정책에서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한, 이란과 미국의 관계엔 어떤 변화도 올 수 없을 게다.” 이란 쪽의 공식 반응은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내놨다. 아야톨라 하메네이는 3월21일 이란의 2대 도시이자 시아파 무슬림의 성지인 마슈하드에서 한 텔레비전 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새로운 시작’을 말했지만, 지금까지 이란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바뀐 것은 전혀 없다”고 꼬집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말대로 ‘변화’가 왔다면, 그 변화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변화의 조짐은 무엇인가? 무엇이 달라졌다는 것인지 분명히 알아볼 수 있도록 해달라.” 아야톨라 하메네이는 이어 이슬람 혁명 이후 미국이 지속해온 대이란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미국이 더 이상 남의 나라 내정에 간섭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지 않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제의’에 대한 ‘답’을 내놨다. “미국의 말이 바뀌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이를 지켜볼 것이고, 그리고 판단할 것이다. 미국이 변한다면, 이란의 행동도 바뀌게 될 것이다.”

이제 ‘해석’이 나올 차례다. 미국의 주요 신문과 방송은 일제히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반응을 비중 있게 다뤘다. 오바마 대통령의 대화 제의에 대해 “즉답을 피했다”거나 “외면했다”는 보도가 대부분이었다. 아예 “대화 제의를 무시했다”거나 “완전히 거부했다”는 분석도 없지 않았다. “이란 쪽에서 말하는 ‘상호 존중’이란 이란의 핵 활동을 용인하고, 테러를 지원하고 있다는 잇따른 비판을 중단하라는 것”이란 지적도 있었다. 등이 내놓은 그나마 ‘점잖은 반응’은 “이란 강경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라도 공식 석상에선 어느 정도 반미적 발언을 해야 한다”거나 “이란의 강경파 지도자들도 미국과의 긴장을 누그러뜨릴 필요성을 느끼고는 있지만, 미국과 ‘통제된 적대감’을 유지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는 분석 정도다. ‘악의 축’인 이란이 쉽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란 얘기다.

반면 중동 지역 언론들은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놨다. “아야톨라 하메네이가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오바마 대통령의 대화 제의를 환영했다”는 분석이 대세를 이뤘다. 특히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연설을 뜯어보면, “과거처럼 미국을 비난하는 내용을 세심하게 들어냈음을 알 수 있다”는 게다. 다만 “구체적이고 합당한 불만을 제시하면서, 대화를 재개하는 데 어떤 조처가 필요한지에 대해 단계적으로 구체적인 내용까지 제시했다”는 평가다. 어느 쪽이 대화를 원하고, 어느 쪽이 그렇지 않은지는 제법 자명해 보인다. 레바논의 정론지 는 3월24일치 사설에서 이렇게 썼다.

이란, 부시에겐 원인·오바마에겐 해법

“연설문을 살펴보면, 아야톨라 하메네이가 대이란 정책을 둘러싸고 워싱턴 정가에서 벌어지는 갑론을박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서 나오는 이란에 대한 비판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과의 대화 재개를 위한 오바마 대통령의 노력이 출발부터 벽에 부딪힌 것은 테헤란의 이슬람 성직자들 때문이 아니다. 화해로 가는 장애물은 낡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미국의 주류 언론이다.”

그간 이란 쪽에선 “오바마 행정부가 부시 행정부와 얼마나 다른지는 기다려보면 알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오바마 대통령의 ‘누루즈 축하 메시지’에서 변화의 단서를 발견해냈을까? 그 가늠자로 3월31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유엔이 주재하는 ‘아프가니스탄 안정화 대책 마련을 위한 국제회의’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유엔의 이름으로 열리긴 하지만, 회의를 소집한 것은 미국이다. 아프간과 파키스탄 쪽은 물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과 아프간 공여국, 관련 국제기구가 회의에 참석한다. 탈레반도 직접 또는 제3자를 통한 간접 참석이 예상된다. 그리고 ‘주요 지역·전략적 이해 당사국’도 초청장을 받았다. 바로 이란이다.

부시 행정부는 이란을 이라크와 아프간 문제의 ‘원인’으로 봤다. 오바마 행정부는 이란을 문제의 ‘해법’으로 보기 시작한 듯싶다. ‘공통의 현안’을 이유로 다자간 회의에서 만나면, 앞으로 양자 접촉의 물꼬를 틀 수 있다. ‘변화’의 시작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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