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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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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5돌 기획] 독자들 스스로 ‘유토피아’를 찾고 있다

프랑스 대표 지성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발행인
“현 위기엔 좌파도 책임…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상상’하자”
등록 2009-04-01 18:30 수정 2020-05-03 04:25
지구촌 경제가 끝 모를 위기로 빠져들고 있다. 그 여파가 사회적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수렁은 깊고, 그늘은 짙어만 간다. 바야흐로 위기의 시대다. 그럼에도 지켜내야 할 ‘가치’는 있다. ‘대안’은 무엇인가?
창간 15돌을 맞은 은 오늘날 인류가 함께 추구할 대안을 탐색하는 세계 지성의 흐름을 국내에 적극 소개하기 위해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지인 와 콘텐츠 공유 등 제휴를 맺기로 했다. 박용현 편집장이 발행인과 세계 금융위기 등 국제 현안과 독립 언론의 앞날에 대해 대담을 나눴다. 또 은 영국·미국·일본을 대표하는 진보매체 편집 책임자들과도 머리를 맞댔다. 위기의 시대, 각 사회가 처한 현실과 진보매체가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눠봤다. 편집자

‘르 디플로’란 애칭으로 통하는 월간 는 프랑스 진보매체의 대표주자 격이다. 프랑스 권위지 의 자매지로 1954년 창간한 이후 국제 문제에 천착해 지금의 ‘이름’을 얻었지만, 차츰 정치·경제·문화·과학 등 전방위적으로 보도 영역을 넓혀왔다. 진보적 가치관을 명확히 드러내는 보도로 “는 여러 의견을 보도하는 신문이지만, 는 자기 관점을 보도하는 매체”란 평가를 듣고 있다. 기사 마감으로 분주한 세르주 알리미 발행인과 전자우편을 이용한 ‘원격 대담’에 나섰다. 알리미 발행인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꼽히는 이냐시오 라모네 전 발행인에 이어 2008년 3월부터 를 이끌고 있다.

-는 국제뉴스 보도의 전문성으로 잘 알려져 있다. 프랑스 언론이 전반적으로 국제뉴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왜 독자들이 지구촌에서 시시각각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위기의 시대, 역설의 시대.’ 세르주 알리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발행인은 ‘신자유주의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말한 ‘유토피아를 좇는 용기’에서 위기의 시대를 돌파하는 영감을 얻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WWW.OUEST-FRANCE.FR

‘위기의 시대, 역설의 시대.’ 세르주 알리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발행인은 ‘신자유주의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말한 ‘유토피아를 좇는 용기’에서 위기의 시대를 돌파하는 영감을 얻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WWW.OUEST-FRANCE.FR

=프랑스 언론 전반이 국제뉴스를 중시한다는 평가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 같다. 프랑스에서도 대부분의 뉴스 소비는 텔레비전을 통해 이뤄지는데, 텔레비전 방송사들은 다른 매체에 비해 특히 국제뉴스 보도가 취약하다. 최근 들어선 해외 지국을 잇따라 폐쇄하고 있다. 비용도 부담이지만, 방송사 처지에선 프랑스군이 직접 파병된 전쟁 얘기가 아니고는 국제뉴스 시청률이 낮다는 점이 주요한 고려사항이었을 게다. 시청자를 광고주들에게 팔아먹어야 하는 상황이니 결론은 간단했다. 국내의 범죄 기사, 연예인 소식, 가십거리, 실용 정보 등이 국제 문제에 대한 심각한 토론을 밀어낸 것이다. 신문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등 3개 신문 정도가 진지한 국제뉴스를 다루고 있다. 이 매체들도 갈수록 국제뉴스 관련 비용과 지면을 줄이고 있다.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경향은 똑같다. 예를 들어 국제뉴스 보도에서 강점을 보여온 가 경영상의 이유로 되레 전문성을 사장시키고 있다.

하지만 는 국제뉴스 비중을 줄이는 건 전혀 선택지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오늘날 미국이나 아시아에서 어떤 정책 결정이 내려졌는지 분석해보지 않고 어떻게 유럽의 경제위기를 이해할 수 있겠나. 그러니 국제뉴스에 관심을 갖는 게 왜 중요하느냐는 질문은 독자들에게 돌려줘야 할 것 같다.

-몇 가지 지구촌 현안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자. 세계적 금융위기는 세계화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금으로선 위기의 끝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다. 한때 ‘유럽의 원더보이’라 불렸던 아이슬란드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위기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새삼 일깨워주는 듯하다.

=아이슬란드뿐 아니다. ‘켈트족의 호랑이’로 불렸던 아일랜드도 추가해야 한다. 유능한 유럽인을 모두 끌어들이는 자석 같았던 영국 런던 금융가의 사치족들과 ‘스페인의 기적’을 일궈냈던 투기꾼들도 마찬가지다. 시장 자유화의 유혹에 빠져든 나라일수록 현재 더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생각해보자. 금융권이 난장판이 된 것은 과도한 규제 완화 때문이다. 민영화된 연기금은 대폭 줄어들거나 아예 사라져버렸다. 공공 부문은 그나마 유일하게 안정적인 경제의 엔진으로 남아 있다. 도처에서 국가가 나서 민간 부문, 특히 은행권을 살려내야 한다는 아우성이 메아리치고 있다. 하긴 우린 이 모든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잊으려 했을 뿐이다. 방치해뒀을 때, 자본주의는 자기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지구촌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비전은 없다. 그저 약삭빠른 이윤 추구와 탐욕뿐이다.

작금의 위기는 적어도 한 가지 ‘미덕’을 갖추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많은 일들이 일시에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부는 금융 부문에 대한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유럽연합 각국의 재정적자 규모를 한정해 유로화 탄생의 기반이 된 ‘유럽안정·성장협약’(European Stability Pact)의 제한 규정도 무시할 수 있게 됐다. 독립성을 강조해온 중앙은행이 정부에 머리를 조아리고 경기 부양책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됐다. 조세 피난처도 ‘블랙리스트’에 올려 감시할 수 있게 됐다. 은행을 살려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가능해진 게다. 지독한 역설이다.

‘새로운 사회를 내놓아라!’ 지난해 말 그리스 전역을 휩쓴 ‘700유로 세대’의 분노에 찬 시위는 전망 없는 시대를 혁파하려는 젊은이들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사진 AP

‘새로운 사회를 내놓아라!’ 지난해 말 그리스 전역을 휩쓴 ‘700유로 세대’의 분노에 찬 시위는 전망 없는 시대를 혁파하려는 젊은이들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사진 AP

-올해로 동유럽이 시장경제를 도입한 지 20년이 된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시장’이 실패하면서 동유럽 각국이 20년 전 베를린장벽 붕괴 직후 겪었던 사회·경제적 혼란 속으로 다시 빨려들고 있다. 서유럽이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동유럽을 지원하지 않으면서, 유럽의 분열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다른 한편에선 심각해지기만 하는 경제위기 속에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말하는 이들도 있다. 옛 체제는 분명 무너졌지만, 새 체제는 아직 오지 않았다. 케인스주의로 돌아가자는 주장도 있지만, 칼 폴라니의 에서 해법을 찾는 이들도 있다( 753호 표지이야기 참조).

=소비에트 제국이 무너진 지 꼭 20년 만에 최대의 적수였던 월스트리트가 같은 상황에 몰렸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동안 시장의 과도한 자유를 제한해 보통 사람들의 삶의 질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때마다 앵무새 같은 설교를 들어야 했다. 베를린장벽은 무너졌다고, 세계화가 대세라고, 이제 시장이 지배하는 세상이 됐다고 말이다. 지난 30년 세월 우리를 덮친 보수 혁명으로 막대한 국가 자산이 금융자본가의 손으로 넘어갔다. 공공 부문은 민영화를 통해 현금인출기로 전락해갔다. 투기가 기승을 부렸고, 시장만능의 이데올로기가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사람들의 태도도 바뀌었다. 더욱 이기적으로, 계산적으로, 공공의 가치는 안중에도 없게 변해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시스템이 송두리째 무너져내리고 있음을 목도하게 됐다.

한데 옛 소비에트연방이 무너질 때와 비슷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재앙을 불러온 세력이 여전히 주도권을 쥐고 있다. 더구나 이들은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기보다 약간의 변형만 가하려 하고 있다. 그저 자기 파괴적 성향만 피하고 보자는 게다. 소련이 붕괴했을 때 그 체제의 선봉장이었던 보리스 옐친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달리 소비에트 체제를 구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밀턴 프리드먼의 지침에 따라 소비에트의 관에 못을 박아버렸다. 말하자면 옐친은 일종의 ‘거대한 변형’을 택한 게다. 반면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나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은 작금의 상황이 ‘거대한 변형’으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선수를 치는 데 골몰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에 대해선, 아직 그 의도가 무엇인지 속단하기 어렵다. 다만 그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미국 경제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는 시점에서, 뒤늦은 감마저 있는 ‘워싱턴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흥미로운 우연이다. ‘오바마의 미국’은 ‘부시의 미국’과 얼마나 다를 것인가. 이를테면 ‘테러와의 전쟁’은 21세기형 냉전, 신자유주의의 정치·군사적 발현이라 할 만하다.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한 지 20주년을 맞은 지난 2월, 오바마 대통령은 ‘제국의 무덤’으로 불려온 아프간에 미군을 증파하겠다고 발표했다. ‘테러와의 전쟁’은 이로써 ‘오바마의 전쟁’이 된 셈인가.

=오바마 대통령과 관련해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다. 1년여 전만 해도 모두들 그의 당선 가능성이 낮다고 봤다. 가능성은 낮지만 그가 당선되기만 하면 2008년 최대의 뉴스가 되리라는 점을 의심하는 이들은 없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상황이 판이했다. 워싱턴에서 이뤄진 정권교체보다 지구촌을 휩쓴 경제위기가 훨씬 큰 관심을 불러왔다. 하긴 이 정도의 위기 국면이 없었다면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정책과 관련해선 두 가지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첫째, 그가 민주당 경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현 국무장관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를 ‘평화 후보’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둘째, 미 연방정부는 막대한 재정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라크와 아프간, 그리고 미국 경제의 침체라는 3개의 적과 동시에 전쟁을 치를 수 없다.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 직후 ‘테러’와 전쟁을 지속하겠다는 뜻을 재확인하긴 했다. 그게 뭘 뜻하는지는 물론 별개 문제다. 중요한 것은 상황이 달라지고 있으며,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이란 게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자멸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오바마 대통령도 이를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라크 침공은 이미 미국에 재앙을 안겼다. 아프간 전쟁도 여지없이 같은 결말로 치달을 게다. 최근 백악관 쪽이 아프간에서 민간 부문 과제의 중요성을 거론하고 나서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닌 게다. ‘서방 동맹국’ 처지에서 보면, 아프간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프랑스로 눈을 돌려보자. 최근 그리스의 이른바 ‘700유로 세대’의 과격시위가 극명히 보여준 것처럼, 일자리가 없는 유럽 젊은이들의 좌절과 고통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에서도 ‘88만원 세대’란 말이 유행어로 떠돌고 있다. 프랑스 사회는 어떤가. 미래 세대를 갉아먹고 있는 청년세대 실업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

=유럽의 60대 이상 노년층은 자신들이 20대 젊은이던 시절, 시간이 갈수록 삶의 질이 나아지리란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것이다. 그들의 부모 세대 역시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 유럽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60대 이하 세대는 끝 모를 ‘위기’와 함께 살아왔다.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이래 위기가 멈춘 적이 있었던가. 거품경제로 흥청이던(물론 그나마 일부에게 국한된 것이지만) 시절에도 세계화와 아웃소싱, 고용 유연화란 망령이 그들을 괴롭혀왔다.

‘주가 폭락, 끝이 안 보인다.’ 지구촌 경제위기는 방치해뒀을 때 시장이 얼마나 자기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사진 EPA/MAST IRHAM

‘주가 폭락, 끝이 안 보인다.’ 지구촌 경제위기는 방치해뒀을 때 시장이 얼마나 자기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사진 EPA/MAST IRHAM

더 나은 미래가 아니라 퇴보하는 미래, 환경이 파괴되고 복구가 안 되는 미래, 공동체가 파괴되는 미래, 이런 절망적인 상황은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 그러니 어디서 대안을 찾을 것인가? 언젠가는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했던 좌파는 어디로 갔는가? 어둠이 걷힌 밝은 미래를 기대하며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해줬던 ‘유토피아’의 약속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른바 ‘공식적인 좌파세력’ 역시 현 위기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그들 역시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동참했다. 미국에서 금융권의 탈규제화를 주도한 것은 민주당 출신 빌 클린턴 행정부다. 프랑스에서 물가에 연동해 임금을 인상하는 제도를 폐지한 것은 사회당 출신의 프랑수아 미테랑 정부다. 독일 사회민주당 출신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집권 기간에 실업급여를 대폭 삭감했고, 사회당 출신의 펠리페 곤살레스 총리는 스페인을 금융 자본가의 ‘메카’로 탈바꿈시켰다. 그나마 부패한 형태로 말이다.

유럽의 젊은 세대는 참을 만큼 참아왔다. ‘대안 부재’의 담론이 너무도 오랜 세월 그들의 어깨를 짓눌러왔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에게 신중하라고, 조용하라고, 참으라고 종용해온 시스템이 얼마나 무모한 체제였는지를 목도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 불거진 과격시위는 새로운 경제·사회 체제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스스로 ‘유토피아’를 찾아나선 것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케인스의 시대에 우파 자유주의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상상’했고, 위기를 기회 삼아 이를 추진했다. 로널드 레이건 미 행정부와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 정부가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사회·경제 정책의 지적 아버지 구실을 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1949년 이렇게 쓴 바 있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라면, 사회주의의 성공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교훈을 얻어내야 할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실현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일을 현실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유토피아’를 좇는 용기가 사회주의의 성공을 이끌어냈다.” 그러니 이 또한 얼마나 역설적인가. 하이에크의 ‘유토피아’가 무너져내리고 있는 시점에 그에게서 영감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동업자’로서 질문을 던져보겠다. 알다시피 한국은 인터넷 기반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소통의 수단으로서, 인터넷은 한국 사회의 여론 형성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블로그를 포함한 개인 미디어는 하루가 다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미디어 환경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는 지금, ‘멸종위기’로 내몰리고 있는 기성 미디어는 어떻게 바뀌어가야 하는가. 종이매체는 정녕 종말로 치닫고 있다고 보나.

=대답은 간단해 보인다. 뉴스를 보는 독자들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경우의 수는 둘뿐이다. 뉴스의 품질이 떨어지거나, 뉴스를 부자들이 소유하게 되거나. 뉴스는 그저 논설이나 블로그 정도가 아니다. 기자를 고용하고, 외국으로 보내 상당 기간 머물게 하고, 취재하도록 하는 데는 돈이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터넷 기반 언론매체에선 광고 수입 외에 별다른 수익모델이 없다. 더구나 경제위기로 인해 광고 수익마저 급락하고 있다.

오해 없기 바란다. 인터넷을 통해 진보적 가치와 정보가 확산되고 있다는 점은 물론 기쁘게 생각한다. 이를 통해 거대 미디어 기업의 ‘여론 독과점’ 및 ‘의제 검열’과 맞설 수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저널리즘은 그 이상이어야 한다. 언론은 정보를 추적하고, 공을 들이고, 취재원과 맞서고, 기사를 내보낸다. 훈련받은 직업기자 중에도 어리바리하고 덜 떨어진 이들이 있는 건 사실이다. 이를 근거 삼아 모든 블로거가 기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건 무리다. 저널리즘은 집단적 노력의 소산이다. 가 추구하는 저널리즘을 수행하려면 재원이 필요하다. 기댈 곳은 오직 독자다. 언론의 자유와 독립성을 곧추세워줄 유일한 기둥도 독자뿐이다. 독립 언론의 존립은 독자들에게 달려 있다. 독자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행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정리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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