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주춤한 장세는 조정기로 이어졌다. 조정기는 다시 하강기를 낳았고, 이내 폭락세로 접어들었다. 폭락세가 계속되면서 침체기가 시작됐다. 그리고 침체기가 계속되자 이윽고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가 싹텄다.”
미 진보적 시사주간지 은 3월3일치 인터넷판에서 이렇게 썼다. 2008년 초반 조용히 시작돼 하반기 들어 불을 뿜으며 벌써 15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미국의 경제위기를 단계별로 정리한 게다. 은 이어 “(1929년 말 주가 폭락으로 촉발된) ‘제1차 대공황’에 이어 미국이 ‘제2차 대공황’에 접어드는 것은 아니냐”고 물었다. 우려의 근거는 분명하다. 카르멘 라인하트 메릴랜드대 교수는 3월1일 에 보낸 기고문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경험한 가장 긴 경기침체는 16개월 정도였으며, 평균적으로 따져 1년 안팎 수준이었다”고 지적했다. 1990년과 2001년에 경험한 두 차례 경기침체는 평균 8개월가량 지속됐을 뿐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경기침체가 ‘V자형’ 곡선을 그리며 회복될 것이라고 내다보는 전문가들이 많았다. 8개월 정도 짧은 침체기를 겪고 빠르게 회복세로 돌아설 것이란 전망이었다. 침체기가 15개월을 넘어선 지금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미국 경제가 ‘U자형’에 접어들었다고 보고 있다. 회복기로 나아가기까지 24개월 정도는 걸릴 것이란 얘기다. 사실상 대공황 이후 최장 기간 경기침체를 겪고 있다는 얘기다.”
대공황 이후 최장 기간 경기침체작금의 경제위기를 ‘예언’했던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도 같은 날 에 쓴 기고문에서 비슷한 분석을 내놨다. 루비니 교수는 한발 더 나가 “미국 경제가 내년에 회복기로 접어들더라도, 성장률은 1%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며 “이 무렵이면 미국의 실업률이 10%에 다가설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내년 말에도) 사실상 경기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할 공산이 크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통화·재정 정책을 통한 경기 부양과 부실은행 정리, 신용 회복과 악성 주택담보 대출 청산 등 필요한 조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더라도 2011년까지 경제성장률은 2%대를 넘어서기 어렵다”며 “이는 경기침체기가 36개월 이상 지속될 수도 있다는 얘기”라고 내다봤다.
분석 방식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제1차 대공황’이 최소 9년에서 최대 12년가량 지속됐다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9~12년,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제2차 세계대전이 없었다면, 뉴딜정책만으로 미국이 공황을 빠져나오는 데는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란 지적도 뼈아프다. 루비니 교수는 “적절한 정책적 대응이 신속하게 뒤따르지 않는다면, 미 경제가 ‘U자형’으로 회복하는 게 아니라 장기적인 침체기로 접어들 수도 있다”며 “일본 경제가 1990년대 경험했던 것처럼, 미국경제도 부동산·주식 거품 붕괴에 따른 장기간의 경기침체와 가격하락이 동반된 ‘스태그 디플레이션’이 겹치는 ‘L자형’ 모델로 흐를 가능성이 현재로선 30%가 넘는다”고 지적했다.
이쯤 되면 가히 ‘제2차 대공황’이라 부를 만하겠다. 파국을 피할 순 없는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2월26일(현지시각) 미 의회에 제출한 134쪽 분량의 ‘2010 회계연도 예산안 보고서’에서 그 단서를 더듬어보자.
오바마 행정부가 내놓은 첫 예산안 규모는 모두 3조6천억달러에 이른다. 사회정책 분야를 필두로 정부의 역할을 대폭 강화하는 한편, 조세제도 개편 등 재정정책을 통해 부의 재분배에도 적극 나선다는 게 뼈대다. 구체적으로 보면 △중산층 이하 계층에 향후 10년 동안 7700억달러의 세금을 감면해주고 △청정 에너지 개발자금으로 1500억달러를 확보하고 △전국민의료보험제도 도입을 위한 예산으로 6340억달러를 배정했다. 재원 마련 방안의 윤곽도 제시됐다. 한 해 25만달러 이상 벌어들이는 ‘부유층’에게 세금을 더 거둬 1조달러 정도를 조달할 수 있을 것이란다. 자산 소득세도 높이고, 기업에 대한 세금 감면 혜택과 일부 업계에 대한 보조금 지급도 줄일 계획이다. 이 밖에 관련 법안 정비를 통해 탄소 배출권을 판매해 연간 800억달러가량을 추가 조달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오바마 대통령이 내놓은 예산안은 지난 30년 세월 미국의 경제정책을 지배해온 레이거노믹스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는 2월27일치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무슨 말인가? 대공황 이후 미국 경제의 70년 세월은 정책적 기조에 따라 양분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급격한 경제성장과 복지정책 확대로 사회적 불평등이 줄어든 전반기와 이른바 ‘레이거노믹스’(부유층 감세와 탈규제, 작은 정부와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통한 인플레이션 억제로 요약되는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경제정책)가 힘을 얻기 시작하면서 빈부 격차가 급격히 벌어진 후반기다. 특히 후반기 30여 년 동안 부유층의 세전 소득은 중산층 이하의 소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늘어났지만, 조세 부담은 되레 부유층이 덜 지는 기형적인 구조가 안착됐다. 이에 따라 상위 1%의 세후 소득은 1979년 이후 약 100만달러 이상 폭발적으로 늘었다. 반면 중산층 이하의 소득은 물가상승률을 조금 웃도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예산안에 명확히 제시돼 있다. 먼저 부유층에 대한 세금을 대폭 인상하기로 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의 부유층 증세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대신 전체 인구의 ‘95%’에 이르는 중산층과 서민의 세금은 대폭 낮추기로 했다. 역시 클린턴 행정부는 물론 ‘감세 만능주의’에 사로잡혔던 조지 부시 전임 행정부 시절의 감세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의료보험과 교육 등 사회정책 측면에서 전면적인 개혁을 통해 장기적으로 빈부 격차를 줄이겠다는 뜻도 분명히 했다. 지난 한 해 미국인들이 지출한 의료비는 모두 2조4천억달러를 넘어선다. 선진국 가운데 최대 규모다. 더구나 의료보험 미가입자도 4800만 명을 넘어선다. 가계 수입의 상당 부분을 의료비에 써야 하는 현실을 바꾸지 않는 한 빈부 격차를 줄이기는 쉽지 않다. 의료개혁이 경제개혁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은 이유다.
조세제도 개혁도 마찬가지다. 예산안에 따르면, 중산층 이하 소득계층은 가구당 평균 800달러의 감세 혜택을 받게 된다. 상위 1%는 한 해 10만달러의 세금을 추가 부담하게 될 전망이다.
물론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소득 격차를 실질적으로 줄이기 위해선 무엇보다 중산층 이하의 소득이 늘어나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예산안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는 “지난 30년 동안 미 대학 등록금 증가율은 비숙련 노동자의 소득 증가율을 훨씬 상회했다. 이 때문에 빈곤층 가정의 자녀들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일이 허다했다”고 전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중산층 이하 가정 자녀들에게 교육비 지원을 대폭 강화할 뜻을 밝힌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오바마 행정부가 제시한 예산안이 의회에서 큰 변화 없이 통과되면, 미국의 중산층과 빈곤층은 40여 년 만에 최대 규모의 소득 재분배 혜택을 보게 될 전망이다.” 영국 는 3월1일치에서 클린턴 행정부 시절 노동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라이시 전 장관은 이어 “(작은 정부를 강조하며) 시장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레이거노믹스는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를 맞아 그 설득력을 상실하게 됐다”며 “오바마 행정부의 이런 움직임은 사실상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과 영원히 작별을 고하겠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옛 질서와의 작별이 쉬울 리 없다. 반대 여론은 ‘색깔론’이 돼 들끓고 있다.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 백악관 보좌관을 지낸 피터 웨너 공공정책센터 선임연구원은 “미국이 ‘유럽식 (좌파) 민주주의’로 빨려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앞서 레이건 행정부 시절 백악관 정책개발국에서 근무했던 피터 페라라 정책혁신연구소 예산정책국장 지난 2월11일치 에 보낸 기고문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큰 정부’나 ‘작은 정부’를 떠나 ‘일 잘하는 정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지만, 실상은 온통 이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주장했다.
오바마 “거센 도전에 맞서 싸울 것”미 보수 진영의 기관지 격인 는 최신호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선거운동 하듯 정치를 하고 있다”며 “선거운동은 현실을 다룰 필요가 없지만 정치는 현실”이라고 했다. 클린턴 행정부로부터 2천억달러 흑자 재정을 물려받아 8년 만에 1조달러 이상의 적자를 남기고 떠나간 부시 행정부 출신 인사들도 비난에 가세하고 있다. 는 2월28일 공화당 중진과 부시 행정부 관계자들의 말을 따 “오바마 행정부 예산안은 ‘계급 전쟁’을 불러오겠다는 발상”이라고 전했다.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이자 극우 논객인 러시 림보는 “오바마 행정부가 실패하길 바란다”고 저주를 퍼부었고, 보수적 인터넷 매체 은 3월1일 “(오바마 대통령이) 점점 히틀러를 닮아가고 있다”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오바마 행정부는 이미 2009 회계연도 수정예산에 경기부양·금융안정 기금을 추가해 지출 규모를 3조9400억달러로 늘여놓은 상태다. 이에 따라 미국의 올 재정적자는 사상 최대 규모인 1조7500달러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국내총생산(GDP)의 12%를 훌쩍 넘는 규모다. 2010 회계연도 예산도 1조1700억달러가 넘는 적자로 편성했다. 오는 4월께 백악관이 예산안의 세부 내역을 공개하면, ‘예산 전쟁’이 본격화될 것으로 보는 이유다. 이런 상황을 의식한 듯 오바마 대통령은 2월28일 주례 라디오 연설에서 “이번 예산안은 워싱턴 정가의 옛 체제를 뒤흔드는 ‘위협’이 될 것이며, 따라서 (체제에 안주해 온) 정치권은 물론 로비스트들에게서도 거센 도전을 받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며 “나도 맞서 싸울 준비가 돼 있음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힌다”고 강조했다.
끝 모를 위기 속에 집권했다. ‘여론’이란 정치적 자산이 충만한 집권 초반이 아니고는 약속한 ‘대담한 변화’를 시도해볼 기회조차 없을 수 있다. 클린턴 행정부도 집권 2년 만에 중간선거에서 참패하면서 야심찬 개혁안을 하나둘 거둬들여야 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예산안은 의회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어쩌면 기회는 단 한 차례뿐일지도 모른다. 위기가 길어지면, 민심은 등을 돌리기 마련이다. 미국의 ‘2010 회계연도’는 오는 10월1일 시작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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