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날씨가 현실에 긴박감을 더해주곤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최신 세계경제전망(WEO) 보고서를 발표하기로 한 1월28일, IMF 본부가 있는 미국 워싱턴은 날씨마저 꽁꽁 얼어붙었다. IMF 쪽은 보고서 발표 기자회견 직전 “한파로 회견을 30분 늦춘다”는 긴급 전자우편을 기자단에 보내야 했다. IMF가 누리집에 올린 회견 장면을 보자. 발표에 나선 수석 경제학자(연구국장) 올리비에 블랑샤르 박사는 “나쁜 소식을 전하는 게 버릇처럼 굳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지난해 11월 내놓은 같은 보고서에서 IMF는 “2009년 세계경제는 2.2%가량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본 바 있다. 주요 선진개발국들은 일제히 마이너스 성장세를 보일 테지만, 주요 신흥경제국들의 분발로 전체적인 성장세를 유지해나갈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새 상황은 얼마나 나빠졌을까? 블랑샤르 박사는 “지난 석 달여 지구촌 경제는 더욱 나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며 “금융시장 압박은 여전히 극심하고, 생산량과 교역량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윽고 2009년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 발표가 이어졌다. 닥친 현실은, 예상보다 암울했다.
“선진개발국 경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극심한 경기침체를 경험할 것이다. IMF는 미국 -1.6%, 유로화 사용 국가 -2%, 일본에선 -2.6%의 경제성장률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한다. 신흥개발국 역시 경기 둔화가 뚜렷해지면서 중국이 6.7%, 인도가 5.1%씩 성장하는 데 그칠 전망이다. 결과적으로 지구촌의 2009년 평균 경제성장률은 0.5%에 머물 것으로 본다. 이는 2차 대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올 한 해, 지구촌 경제 성장세는 사실상 멈춰설 것으로 보인다.”
석 달여 만에 성장률 전망치가 1.75%포인트나 낮아졌다. 이유가 뭘까? IMF는 두 부분으로 나눠 설명했다. 먼저 선진개발국 상황을 보자. 금융위기로 가계와 기업 모두 미래 경제 상황에 대한 기대와 신뢰도가 급락했다. ‘불확실성’이 극에 달한 게 치명타였다. 당연히 소비가 급격히 줄었고, 이로 인해 시장이 무너지면서 ‘부의 증발’ 현상이 연쇄적으로 몰아치고 있단다. 가계든 기업이든 돈 빌리기 어려워졌으니, 당연히 경제활동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 반면 신흥개발국에선 주로 대외경제 부문에서 위기가 가중되고 있다. 선진개발국에서 수요가 줄면서, 목숨줄인 수출이 흔들리고 있다. 치솟은 금융비용으로 해외 차입마저 경색되면서 생산의 발목을 잡고 있다. 여기에 생산활동이 줄어든 데 따른 수요 급감으로 원자재 가격이 폭락해, 자원 수출에 의존하는 저개발 국가에 다시 치명타가 되고 있다. 쉽게 탈출하기 어려운 악순환에 빠져든 형국이란 얘기다.
IMF, 재정적자 역풍 경고상황이 이런데, 내년 전망이 좋을 수 없다. IMF는 보고서에서 “2010년 선진개발국에선 1% 안팎의, 신흥개발국에선 5% 안팎의 경제성장을 이루며 지구촌 평균 약 3%의 경제성장을 이룰 것”이라면서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로 이어지고 실물경제의 위기가 다시 금융시장 불안을 부추기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어, 장기적인 전망 자체가 조심스런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IMF는 특히 “각국의 재정적자 폭이 커지는 것도 장기적 재정 안정에 불길한 징후”라며 “각국 정부가 적극적인 경기부양책을 실행에 옮겨야겠지만, 장기적인 전략에 맞춰 추진하지 않으면 되레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경고음은 도처에서 들려왔다. 같은 날, 국제노동기구(ILO)도 사뭇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ILO는 이날 발표한 54쪽 분량의 ‘2009 지구촌 고용동향 보고서’에서 “금융시장 불안이 이어지고 경기 둔화가 예상보다 심각해지면, 2009년 한 해 지구촌에서 (2007년 대비) 5100만 명의 추가 실업자가 양산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ILO가 집계한 2007년 지구촌 실업자 규모는 약 1억7900만 명이며, 지난해 모두 1100만 명이 새로 일자리를 잃으면서 전세계 실업자는 2008년 말까지 1억9천만 명을 넘어섰다. ILO가 내놓은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면, 2009년 한 해 전세계적으로 2억3천만 명의 실업자가 거리를 떠돌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이 ‘정권교체’로 잠시나마 들떠 있는 사이 위기의 진앙은 대서양을 넘어선 모양새다. 새해 들어 유럽이 온통 꽁꽁 얼어붙고 있다. 지난 1월23일 일제히 폭락세를 보인 유럽 각국의 주식시장이 헤쳐온 지난 1년은 이런 현실을 숨김없이 반영하는 자화상이다. 의 자료를 보면, 영국의 ‘FTSE 100’ 지수는 지난 1년 동안 25.8% 폭락했다. 독일의 DAX 지수는 -33.73%, 프랑스의 ‘CAC 40’ 지수는 -36.55%를 기록하고 있다. 유로화 환율 불안도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데다, 23년 만에 달러화 대비 최저치로 떨어진 영국의 파운드화 약세까지 겹치면서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 “유로화 가입국 가운데 조만간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하는 나라가 나올 수도 있다”는 얘기가 금융가에 떠돌고 있는 이유다.
경제위기의 끝판은 언제고 정치 위기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해 IMF 등 국제사회에 손을 벌렸던 아이슬란드에선 성난 시위대의 압박에 밀려 그예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집권 독립당을 이끌던 게이르 하르데 총리는 지구촌을 뒤덮은 경제위기 속에 정권을 내놓은 첫 번째 정치인이란 오명을 쓰게 됐다. 실업률이 10%대에 육박하고 있는 프랑스에선 교사·집배원·기관사·관제사 등 민간·공공 부문 가릴 것 없이 성난 노동자들이 1월29일을 ‘검은 목요일’로 선포하고 총파업에 나섰다. 위성방송 는 “교통대란에도 여론조사 결과 프랑스 국민 10명 중 7명이 파업을 지지한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시장경제 도입 20주년’을 맞은 동구권 국가에선 ‘불만의 겨울’이 더욱 깊다. 라트비아에선 1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 정부의 경제위기 대처 미숙을 비판하며 조기 총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라트비아 인구가 약 220만 명이니, 국민 220명 중 1명이 시위에 가담하고 있는 셈이다. 이웃나라인 리투아니아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끊이지 않으면서 진압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로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다. 불가리아·체코·헝가리 등 주변 국가들 역시 상황은 엇비슷하다. 20년 세월 켜켜이 쌓여온 ‘시장의 실패’가 그예 악몽으로 변한 게다. 최근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한 후안 소마비아 ILO 사무총장은 1월28일 〈AFP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지구촌 전체가 고용위기에 직면해 있다. 빈곤을 뿌리 뽑기 위한 노력이 무너져내리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중산층이 취약해지고 있다. 경제위기의 정치·안보적 해악은 극심할 수밖에 없다. 생산적 투자 확대, 양질의 일자리 창출, 사회적 약자 보호정책 강화, 그리고 광범위한 사회적 대화 확대가 절실하다. 경기침체가 사회적 침체(Social Recession)로 이어지도록 내버려둬선 안 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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