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이라는 단어를 생각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를 자유롭게 적으라”는 문항에 ‘민주노총’을 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정규직 1070명 심층 실태조사’(제1052호 표지이야기 참조)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민주노총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정규직 1천여 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노조’는 없었고, ‘자본가’는 등장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은 어디로 갔을까. 민주노총은 정규직 노동자만을 대변한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삼성전자서비스 수리기사와 케이블방송 설치기사 등 비정규직 노동자와 함께했지만, 대공장 노동자와 공무원 등 정규직이 많다는 이미지를 피하기 힘들었다.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을 지키느라 비정규직을 소홀히 했다는 것도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비판이다.
3월18일 서울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한상균 위원장을 만났다.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을 논의하는 노사정위 특위에 참여하는 대신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다. 한 위원장은 “노동자를 들러리 세우고 있다”며 노사정위를 거부했다. 또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지 않고 현재의 노사관계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최근 비정규직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가는 사다리가 끊겨 있다. 재벌을 위한 정부 정책 때문이라고 비판하는데 민주노총은 이런 구조를 깰 방법이 있나.
미국이나 일본을 보면 좋은 일자리는 분명히 국가의 책임으로 보고 있다. 좋은 일자리를 늘리려면 민간 투자가 동반돼야 한다. 기업들이 2년 연속 마이너스 투자하고 좋은 일자리는 해외로 빠져나가는데 왜 국가가 역할을 못하나. 재벌의 곳간은 5년 만에 두 배로 늘어나고 사내유보금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이런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정부가 해야 한다. 정부가 의지가 없다.
“(높은 처우를 받는) 정규직의 포지션은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 전체 구조의 모순인 양 얘기하는 건 정부가 통계의 오류를 활용하는 것이다. 대공장 정규직의 문제로 국한시켜 재벌 문제로 끌어내야 할 문제들을 왜곡했다.”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가 커졌고 고착화됐는데, 사실 (높은 처우를 받는) 정규직의 포지션은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 전체 구조의 모순인 양 얘기하는 건 정부가 통계의 오류를 활용하는 것이다. 대공장 정규직의 문제로 국한시켜 재벌 문제로 끌어내야 할 문제들을 왜곡했다. 대공장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를 없애려면 (납품단가를 적절히 매기지 않고 이익을 가져가는) 중간 착취 구조를 제도적으로 개선하고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회사에 대한 근로감독을 강화해 빨리 정규직화하는 게 시급하다.
민주노총의 입장과 달리 실제 기업 노조에서는 협력업체의 납품단가나 임금에 대해 크게 이야기하지 않는다.노동자들이 꾸준히 요구안으로 제출하고 있다. 금속노조는 납품단가를 후려치는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잘 안 된다. 예를 들어 현대차는 납품하는 협력업체를 이원화 구조로 만든다. (납품단가 인하 등) 업체가 말을 듣지 않으면 아웃시키고 다른 업체의 납품을 받는다. 갑을 종속관계가 확실하다. 사업뿐만 아니라 노사관계도 그렇게 고착시킨다.
한상균 위원장은 왼쪽 가슴에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과 ‘최저임금 일만원’이 적힌 배지, 검은 근조 리본을 달고 있었다. 검은 리본은 지난 2월 공장 노동자 도급화를 반대하며 분신 자살한 금호타이어 김재기씨를 추모하는 것이라 했다. 민주노총은 최저임금(현재 5580원)을 1만원으로 올리자는 운동을 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문제를 꾸준히 이야기한다고 했지만 국민에게는 보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최저임금 문제도 그렇다. 최근 젊은 층에서 최저임금이 화제가 된 것은 한 아이돌 가수가 나온 텔레비전 광고 때문이었다.
민주노총이 새로운 접근 방식을 찾아야 한다. 총파업 의제로 ‘최저임금 1만원’ 같은 사회적 의제를 내건 것도 너무나 오랜만이다. 세계적으로도 최저임금을 올리는 움직임이 있지 않나. 내가 봤을 때 전세계적 트렌드인데 왜 (정부에서) 못 받는지 속이 터진다. 민주노총도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리자는 500만 서명운동을 시작했는데 폭발적으로 확산될 것이라 믿는다.
최저임금과 젊은 층 이야기를 하면서 한상균 위원장은 대학생 딸과 아들이 있다고 했다. 한 위원장은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 뭐할 거냐’ 물으면 ‘아빠, 내가 나가서 지금 한다고 뭐가 될 수 있겠어요’라고 이야기한다”며 걱정했다. “예전에는 좀 힘들어도 노동을 통해 희망을 찾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사다리가 없다. 젊은 애들이 그걸 모르겠나. 다 자포자기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아, 이건 아니다.”
그래서 노사정위에서 논의하는 노동시장 구조 개선과 사회안전망 확충이 중요하다. 청년실업과 정년연장 등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노동자를 들러리 세우는 협의체(노사정위)에 부정적이다.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조건을 바꾸겠다고 하면 많은 대화가 필요하고 점검할 지점이 많은데 정부 스스로 일정을 정해놓고, 정부 입장을 앵무새처럼 대변하는 공익위원 전문가그룹과 담합해 결국 재벌을 위하기 때문에 우리는 참여하지 않는다.
노사정위 특위 안에는 한국노총이 있다. 한국노총 위원장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한국노총은 복수노조·타임오프제 도입 때 민주노총과 공조를 깬 역사가 있다.예단하기는 어렵다. 한국노총이 엄중한 현실을 인정하고 있고, 섣불리 정부가 가자는 길로 길동무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투쟁에는 타이밍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노총은 그 시점을 5월 투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4월로 보고 있다. 이 타이밍을 놓쳐서 ‘뺨 한번 맞고 화풀이하는 식’으로 투쟁을 하면 안 되겠다. 한국노총이 선제적으로 노동의 위기에 대해 결단을 했으면 한다.
민주노총이 예고한 4월 총파업 준비는 잘되고 있나.총파업이 쉬운 건 아니다. 투쟁을 힘있게 해봤던 에너지가 있어야 그것을 가져다 상승작용을 내는데 그동안 사실상 총파업다운 총파업을 하지 못했다. 지도부가 출범하자마자 총파업을 준비한 지 석 달이 안 됐다. 파업에 대한 현장의 우려도 많지만 위기에 공감하는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총파업은 67만 조합원이 일시에 하는 상황까지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위원장은 쌍용차 노조 출신이다. 이창근 전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정책기획실장이 쌍용차 공장 굴뚝 위에 있다.힘들게 투쟁하고 있는 굴뚝 밑으로 몇 번 가보지도 못했다. 마음이 무겁다. 쌍용차 문제가 내 사업장이었던 것을 떠나서 한국 사회의 아픔이자, 정리해고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 민주노총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쌍용차 회사의 결단만 남아 있다. 봄은 왔는데 창근이한테도 봄이 오길 바란다.
봄을 어떻게 일굴 것인가
한상균 위원장은 노사정위원회 문제와 최저임금 등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목소리가 컸다. 자신 있게 기자를 바라봤다. 마지막 쌍용차 문제를 물을 때는 달랐다. 한 위원장의 말은 부쩍 느려졌고, 고개는 밑을 향했다. 회한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한 위원장은 “창근이에게 봄이 오길 바란다”고 했다. 얼마 전 이창근 실장은 “봄이 오고 있네”라고 한 송경동 시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봄은 오는 게 아니라 일구는 거라고요.”
이완 기자 wani@hani.co.kr·김선식 기자 kss@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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