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변 보고 휴지 쓰지 마세요. 그러면 어떻게? 외출할 때 (요실금 전용 패드를) 팬티 밑에 깔고 나오세요. 소변 보고 그냥 일어나면 이 게 다 먹어요. 재채기하거나 깔깔거릴 때, 소변 지릴 때도 아주 좋아 요. 숯 성분이 있어 냄새도 안 나요.”
“어르신, 소변이 급한데 허리띠 버클이 안 빠져서 가위로 자르신 적 있죠? 이 자동벨트는 저절로 채워지고 빠져서 정말 편해요. 가격 도 다른 곳의 반값이라 착해요.”
배정희(64)씨는 전천후 판매원이었다. 지난 7월31일 서울 종로구 실버 전용 영화관인 허리우드극장 앞에 위치한 유한킴벌리의 노인 용품 전문매장 ‘골든프렌즈’에서 그는 밀려드는 노인 고객을 나 홀로 응대하고 있었다. 고객의 시선이 돋보기 발톱깎이로, 무릎보호대로, 염색약으로, 요실금 팬티로, 틀니 살균소독기로, 기능성 신발로 옮겨 갈 때마다 그는 일일이 친절한 설명을 곁들였다. 또래의 정곡을 파고 드는 제품 소개에 굳게 닫혀 있던 노인 고객의 지갑도 술술 열렸다.
그는 지난해 8월 노인용품 전문매장의 판매원으로 은퇴 후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병원 임상병리사와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30년 가까 이 근무하다 2004년 은퇴한 지 9년 만이었다. 은퇴 후 처음 2년은 가 족과 지내며 편안한 노후를 보냈다. 그러나 다시 일이 하고 싶어져 주 유원과 식당 종업원을 전전했다. 고되고 보람도 없었다. 그러다 1년 전 유한킴벌리가 고령자 취업지원 프로그램의 하나로 선발하던 판매원 에 채용되면서 일하는 즐거움을 되찾았다. 하루 6시간30분씩 주 6일 일해서 받는 월급 120만원은 생활에 보탬이 되기도 한다. “경기도에서 왕복 3시간씩 출퇴근해요. 버스와 전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야 하죠. 그래도 어르신한테 꼭 필요한 물건을 파는 보람된 일이라 지치는 줄도 몰라요. 아직은 몇 푼이라도 내 용돈을 벌고, 사회에 섞이고 싶어요. 신이 몸은 늙어가게 만들었지만 정신은 안 그렇잖아요?”
<font color="#C21A8D">“아직은 더 벌고, 사회에 섞이고 싶다” </font>기업이 고령자에게 제공하는 맞춤형 일자리들은 고령자 사이에서 도 만족도가 높다. 고령자의 신체적 조건이나 경험에 적합하게 발굴 된데다, 단순한 육체노동에 비해 근무 여건도 좋은 까닭이다. 다행히 고령자를 고용하는 기업도 점차 늘고 있다. 기업들이 공유가치 창출을 의미하는 CSV(Creating Shared Value)의 주요 주제로 ‘고령자 채용’을 삼기 시작한 덕분이다. CSV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뜻하는 CSR(Coporate Social Responsibility)에서 한발 더 나아간 개념이다. CSR가 기업이 생산·영업 활동과 별도로 비용을 투입해 단발적으로 사회공헌 활동을 하는 것이라면, CSV는 기업이 경영활동에 사회가 원하는 공익적 가치를 이식하면서 경쟁력도 강화하는 장기적인 경영 모델이다. 즉 기업이 독거노인에게 생활비나 물품을 지원하는 게 CSR라면, CSV는 고령화 시대의 중요성을 인식한 기업이 고령자를 채용하면서 그와 관련한 사업 기회도 포착하는 것이다.
CJ대한통운은 아예 지난 5월 고령자 친화기업인 (주)실버종합물류를 부산에 설립했다. 고령자 친화기업은 노동자의 70% 이상이 만 55살 이상 고령자로 구성된 기업을 뜻한다. 실버종합물류에 취업한 고령자는 택배 물품을 분류·배달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고령자에게 신체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택배 차량 진입이 어려운 아파트 단지 내에서도 물건을 쉽게 나를 수 있도록 전동 자전거·카트도 제공한다. 또 하루 택배 배달량은 일반 직원의 20~30%, 근무시간은 4시간으로 제한한다. 그 탓에 기본 월급은 40만원대에 그치지만, 건강을 해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CJ대한통운 입장에서도 배송인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지금까지 73명의 고령자가 채용됐으며, 2015년까지 1천 명을 고용할 예정이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 정년퇴직한 뒤 지난 5월부터 택배 배송 일을 시작한 손창현(70)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집에서 쉬다보니 건강이 나빠지고, 어느새 퇴직금도 바낙나 생활이 힘들어졌다. 그런데 소문을 듣고 시작한 택배 일은 배송하는 만큼 임금도 많아지고, 4대 보험까지 적용된다고 하니 ‘이 일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렸던 택배를 받고 좋아하는 고객들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보람을 느낀다.”
<font color="#C21A8D">CJ대한통운 “2015년까지 1천 명 채용”</font>CJ CGV도 지난해 10월부터 전국 극장에 만 60살 이상의 고령자를 ‘시니어 도움지기’로 투입하고 있다. 이들은 영화 상영 준비, 매점 제품 준비, 청결 관리 등 다양한 극장 서비스를 지원한다. 현재 80여 명이 근무하고 있는데, 올해 안에 70명 정도가 더 채용될 예정이다.
고령자의 창업을 지원하는 기업들도 있다. 정부의 창업 지원 프로그램이 만 40살 미만 청년층에 집중된 탓에 풍부한 지식과 아이디어를 가진 고령자도 결국 영세한 자영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기업의 창업 지원 방식은 특별하다. 사업 아이디어가 있는 고령자에게 일회성으로 창업 자금을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술개발·판로 개척·마케팅·홍보 지원을 통해 벤처기업을 지속적으로 인큐베이팅하는 것이다. 이렇게 발굴된 창의적인 제품·서비스는 기업이 선점할 수 있으니 기업에도 도움이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SK텔레콤이다. 이 회사는 만 45살 이상 중장년·고령층의 정보통신기술(ICT) 기반 창업을 지원하는 ‘브라보! 리스타트’ 프로그램을 지난 5월 시작했다. 그러고는 한 달간의 공모 과정을 통해 예비 창업가, 경력 3년 미만의 초기 창업가인 232개 팀 가운데 10개 팀을 최종 선정했다. 이들에게는 2천만원씩의 지원금이 주어지며 앞으로 6개월간 다양한 창업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그 뒤 성과에 따라 SK텔레콤에서 창업지원금 1억원을 지원받거나 지분 투자를 얻는다.
정보기술(IT) 서비스기업에 25년간 근무하다 2010년 퇴직한 강경흠(51)씨는 직장생활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을 살려 (주)멀린을 차렸다. 실시간 위치추적 기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등을 만드는 회사다. 최근에는 새로운 보안 솔루션도 개발하고 있다. 강씨는 기술과 가격경쟁력에 대한 자신감은 있었지만 제품을 마케팅하고 판매처를 확보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러다 SK텔레콤 창업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된 뒤 희망에 차 있다. “창업한 뒤 3년간 정부 창업 지원 프로그램을 많이 두드렸다. 상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게 끝이더라. 기업은 우리가 개발한 기술을 관련 부서에서 직접 테스트한 뒤 구매하거나 아니면 판매처를 알아봐주려고 한다. 창업기업에 꼭 필요한 지원이다.”
유한킴벌리는 고령자의 창업도 지원하면서 유망한 ‘시니어 비즈니스’도 육성하는 CSV 경영 모델 정착에 더욱 적극적이다. 지난해부터 시니어 치유동물 전문가 양성, 패션 돋보기, 소독액 치간칫솔 등 고령자에게 적합한 상품·서비스를 개발하는 소기업이나 사회적 기업을 발굴해 시니어기금에서 기업당 최대 7천만원의 자금과 컨설팅을 지원하고 있다. 이를 통해 유한킴벌리는 노인용품 개발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고, 개발된 제품을 대신 판매해 수수료 수익도 얻는다. 또 벤처기업들이 되도록 고령자를 고용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일자리 나눔의 기업 가치도 실현하고 있다. 창업을 원하는 고령자, 재취업을 희망하는 고령자, 새로운 노인용품 개발을 추구하는 기업이 모두 이득을 볼 수 있는 구조인 것이다.
유통업체들은 일찌감치 판매원이나 계산원으로 고령자를 채용해왔다. BGF리테일은 2010년부터 CU편의점 매장에 만 60살 이상의 ‘시니어 스태프’를 고용하고 있다. 고령자가 CU에 지원하면 일정 기간 소양교육, 직무교육, 현장교육을 받은 뒤 매장에서 근무하게 된다. 지금까지 400여 명의 시니어 스태프가 교육을 받았거나 현장에서 일을 한다. 임금은 젊은 세대와 똑같다. 롯데마트도 지난해부터 만 56~60살 고령자를 ‘시니어 사원’으로 뽑고 있다. 이들은 매장에서 계산 업무를 하거나 고객이 인터넷쇼핑몰로 주문한 상품을 매장에서 대신 고른 뒤 배송처로 보내는 ‘온라인피커’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근무시간은 고령자의 체력을 고려해 하루 6시간, 주 5일 동안 30시간 이내로 짧다. 고령자의 사정에 따라 탄력적으로 주 14시간만 근무하면 되는 ‘초단시간 시니어 사원’도 선발하고 있다.
공기업 중에선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2010년부터 3년간 7천 명의 만 60살 이상 고령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임대주택의 시설물을 안전 점검하고 독거노인을 돌보는 일이 주된 업무다. 하루 4시간씩 주 5일간 근무하고 55만원가량의 월급을 받는다. 올해 3천 명의 임대주택관리 인력을 뽑는 과정에 1만1천 명이 지원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고령자들이 제집처럼 임대주택을 꼼꼼하게 살펴주니 입주민들의 주거 만족도도 높아졌다.
고령자를 고용한 기업들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고령자는 일에 대한 의욕이 강한 만큼 근무 태도가 성실하고, 일처리가 꼼꼼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시간제로 일하는 고령자 직원을 가장 바쁜 시간에 집중적으로 배치할 수 있어 인력 운영도 효율적이다. CJ대한통운 관계자의 설명이다. “배송 업무의 경우 젊은 직원 1명이 할 일을 고령자 4명 정도가 나눠 받는다. 인건비 측면에서는 고령자를 고용했다고 이득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령자 4명이 가장 바쁜 시간인 낮 12~1시에 동시에 배달을 하다보니 고객 처지에선 제때 물건을 받을 수 있어 만족도가 높다. 젊은 택배원 1명이 밤 10시까지 배달할 물량을 4명의 고령자 택배원이 낮 동안 모두 처리해주는 덕분이다.”
<font color="#C21A8D">고령 판매원 채용하니 고령층 손님 늘어</font>유통업체에선 고령자 판매원을 고용해 매출이 늘어나는 효과를 보기도 한다. BGF리테일 관계자의 분석은 이렇다. “시니어 스태프를 편의점에 채용한 결과, 노인 고객 유입 효과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노인 고객들이 젊은 세대보다 또래 판매원과 소통이 잘된다고 보고 재방문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 시니어 스태프를 운영하는 점포는 그 전보다 노인 고객이 평균 5~10% 증가했다.”
다만 고령자를 채용하는 기업에도 숙제는 있다. 한 기업 관계자는 “고령의 직원은 부득이하게 건강이 나빠지거나 손주를 돌봐야 해서 갑자기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면 다시 직원을 모집하고 업무 교육을 시켜야 한다. 고령자 인력 관리에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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