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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자고 잃어버리지도 못했던가 - 김보경 웅진지식하우스 대표
첫 직장, 첫 출근, 첫 책상 위에 놓인 신입 사원을 위한 사무용품 중 그것이 있었다. 언 뜻 다이어리 비슷한 그것은 명함첩. 결재를 받으러 편집장의 책상에 갈 때마다 보게 되 는 큼직한 몇 권의 명함첩에 비하면 98명짜 리 제일 작은 것이었다. 하나 이마저 언제 채 울까, 누구로 채울까, 가슴 두근거렸었다.
마음이 힘들면 뭐든 무겁고 답답하게 느 껴진다. 2012년 12월의 우울을 털어보겠다고 해를 넘기기 무섭게 집 이며 사무실이며, 뒤집고 버리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발견되는 것이 명함이었다. 편집자의 필수 자질은 한국어 실력이 아니라, 사람 좋아 하는 기질이라고 했다. 10년 넘어 쌓인 것들이 언젠가부터 명함첩이 나 서랍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온갖 군데에 숨어 있었다. 10개, 20개, 어떤 것은 100여 개, 뭉텅이로 나온 명함을 보고 있자니 몇십원, 몇 백원 남은 옛날 통장을 발견하는 기분이었다.
거기에는 이젠 감히 연락도 못할 유명 작가의 무명 시절이, 한때는 촉망받는 연구자였으나 어느 날 외국으로 증발해버린 대학 강사의 청춘이, 몇 번이나 소속 정당이 바뀐 정치인의 고단함이, 한때는 함 께 술도 취하곤 했으나 이제는 건너 소식을 듣는 것도 어색한 우정이 있었다.
나는 어쩌자고 이것들을 잃어버리지도 못했단 말인가. 명함이여, 너는 어찌 이리 불편한 종이냐. 헌책방에 책 파는 건 예사고 아들내 미가 학교에서 그려온 그림도 지저분하다고 아무렇지 않게 버리면 서, 마치 그것들이 그 사람의 축소판인 것처럼 손바닥 위에 올려 들 고 이제 분류도 못하는 이 수백 장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다 이걸 간직하는 이유가 그 사람과의 인연이 귀해서라기 보다, 나의 알리바이를 위한 것 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입 시절, ‘어쩌면 우리 편집장 님은 모르는 분이 없을까’ ‘어떻 게 그 유명한 분들과도 다 친하 실까’ 하고 선망하던 마음이, 내 가 그 나이에 이르고 보니 “아, 내가 그분을 좀 아는데 말이야” 라는 꼰대의 허세로 남은 것처 럼. 관계가 틀어진 상대에게 문 자 하나 보낼 용기가 없어, 휴대 전화의 전화번호만 노려보며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는 것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그를 안다 할 수 있겠는가.
그중에는 나의 것들도 있었다. 다니는 출판사가 바뀌고, 만드는 책 의 분야가 바뀔 때마다 새로 찍었던 명함들. 그 미숙하던 나와 다시 만나니 낯설고 어색했다. 나는 살면서 누군가에게 ‘새로운 나’로 이해 되길 원하면서, 나는 왜 그를 ‘그때의 그’로만 기억하고 있을까. 그래 서 어찌했을까. 그 명함 뭉치를 신문지로 각을 잡아 포장했다. 그런 다음 오래된 원고 출력물이 가득 쌓인 종이 분리수거함에 넣고 왔 다. 그러고 돌아서니 몇몇 사람들이 생각났다. 문자를 돌렸다. ‘누구 씨, 누구 전화번호 알고 계신가요?’
버림당한 나의 그녀 - 한동원 소설가
‘버림’에 관한 한, 필자는 가장 부적합한 필 진 중 하나다. 주변 물건 몇 개만 봐도 알 수 있 다. ① 스마트 프리한 라이프스타일의 굳건한 동반자 ‘스타텍’ 2G폰(500만 2G 이용자 여러 분 파이팅!) ② IBM 삼색 로고 디자인과 키보 드 촉감 때문에 7년째 쓰고 있는 ‘씽크패드’ 노트북(운영체제는 당연히 윈도 XP) ③ 믿거나 말거나 12년 전 구입 당시엔 최고 사양의 최첨 단 ‘캐넌데일’ 타임트라이얼 사이클 등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③번 자전거가 필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버림’ 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선수에 의해 기록이 6년쯤 더 연장될 수 있 었다는 것이다.
사연인즉 이렇다. 1995년, 필자는 교내 사이클부 소속이던 친구와 난 생처음 제주도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제주의 쪽빛 해변을 자전거로 달 린다는 로망에 꽂혀, 갖고 있던 녹덩어리 자전거를 닦고 조이고 기름 쳐 서 끌고 가긴 했으되, 그 무시무시한 무게와 1km당 1회씩 발생하는 고 장으로 여행은 거의 오체투지에 준하는 고행으로 화했고, 도탄에 빠진 필자 앞에서 그야말로 얄미운 나비처럼 도로 위를 나풀나풀 날아다니 던 친구의 눈부신 세미프로급 사이클은, 필자를 팔자에도 없던 물욕의 세계에 빠뜨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 물욕은 예상보다 훨씬 일찍 충족됐 다. 불과 2년 뒤, 크로몰리 프레임의 그 자전거는 새로운 대세인 알루미 늄 프레임 자전거에 밀려, 친구의 자취방 구석에서 먼지와 녹을 뒤집어 쓴 채 버려진 신세가 된 것이다. 그 영락한 모습에, 남몰래 흠모해온 여 인이 운명의 격랑에 늙고 병들어버린 모습을 본 듯 가슴이 미어졌던 필 자는 곧장 매입을 제의했고, 친구는 ‘그래, 처음부터 이 여인의 마음은 나의 것이 아니었네’라는 듯 흔쾌히 무상 기증을 선언했다. 그렇게 그 자전거와 꿈같은 해후를 하게 되었고, 일련의 닦고 조이고 기름 치기 이후 우리는 좋은 추억을 꽤 많이 만들었다.
아아, 그러나 그로부터 10년 뒤, 필자는 이 자전거와 영원한 이별을 맞이하고 말았으니, 화근은 사이클 인구 증식을 위한 필자의 과잉 오지 랖이었다. 그랬다. 사이클을 타고는 싶지만 너무 어려워 보인다던 한 친 구에게 적응 차원에서 자전거를 잠시 빌려주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석 달 뒤, 새 자전거를 장만했다는 그 친구의 연락을 받고 간 자리에서 필 자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한다. “그 자전거? 버렸는데. 그거, 버리 는 거 아니었어?”
친구는 몇 번이고 사과했다. 하지만 그 친구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렇 지 않겠는가? 필자였다 해도 의 찢어진 ‘윌슨’ 배구공을 봤다면, 그리고 그에 얽힌 사연을 알지 못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그 것을 쓰레기통에 던져넣었을 것이다. 물론 그 자전거가 그 공처럼 너덜 너덜했던 건 아니지만…. 대략 이런 사연으로, 정말이지 ‘버림’에 소질이 없는 필자는, 제3자에 의한 ‘간접 버림’을 통해 정든 물건을 떠나보낼 수 있었고, 덕분에 이런 글도 쓰게 되었다. 그나저나 2G망은 언제까지 존 속하려나. 부디 오래오래 만수무강하셔야 할 텐데.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셔츠 - 한혜경 글쟁이
나는 무엇이든 잘 버렸다. 1년 이상 연락하 지 않은 전화번호는 삭제했고, 2년 이상 입지 않은 옷은 버렸으며, 3년 이상 다시 읽은 적 이 없는 책은 팔아치웠다. 버리고 난 뒤 남는 휑한 빈자리가 좋았다. 삶이 정리됐다는 듯 개운해졌으니까. 질척거리는 건 질색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나는 그 개운함을 사랑 했다. 뭐든 별 가책 없이 척척 잘 버리는 것을 성격의 장점으로 여기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유독 버릴 수 없는 물건이 딱 하나 남아 있다. 왜일까. 그건 옛 애인의 셔츠다. 아는 사람만 아는 일본의 명품 브랜드 제품이고, 짙은 보라색의, 하얀 자개 단추가 주르륵 박힌, 아주 긴 셔츠다. 한때 내 남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한 남자가 어느 날 내게 그 옷을 주 었다. 우리가 처음 몸을 섞었던 직후였다. 그때 나는 알몸에 남자의 셔츠를 걸치는 것이 섹시하다고 착각하던 나이였다. 남자는 내게 자 신이 아끼던 셔츠를 쾌척했다. 나는 그 긴 셔츠에 벨트를 매고 원피 스처럼 입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언젠가, 당연한 수순처럼 남자와 나는 헤어졌다. 헤어지고 나서 며칠 뒤에 만나 스파게티를 먹고 카페 에 가서 각자 이니 <gq>니 하는 잡지를 읽었다. 잡 지를 읽은 이유는 더 이상 둘이 나눌 이야기가 없어서였다. 그때까지 도, 그 이후로도, 그 셔츠는 여전히 옷장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차 츰 변방으로 밀려났다.
마지막으로 그 옷을 입은 건 재작년의 밸런타인데이였다. 연애가 마음먹은 대 로 풀리지 않자 자포자기하며 아무 남자 나 만나대던 무렵이었다. 밸런타인데이 가 끝나기 2시간 전,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남자로부터 술을 마시자는 연락을 받았다. 별달리 할 일이 없 던 나는 썩 튕기지 않고 나갔다. 그 남자와 나는 안마방이 많기로 악 명 높은 동네에서 만나 술을 마셨다. 남자는 내게 초콜릿을 요구하 며 앙탈을 부렸다. 나는 술집 앞 편의점에서 산 싸구려 초콜릿을 남 자한테 내밀었다(일종의 서비스였다). 잠시 뒤 남자와 나는 술집을 나왔다.
남자는 “편하게 방을 잡고 맥주 한 잔만 더 하자”고 졸랐다. 절묘하 게도 때마침 술집 바로 옆에 애처로운 노란 네온사인의 모텔 간판이 빛나고 있었다. 그 상황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처럼 느껴졌다. 엄청 뻔하고 구질구질해서 차마 뿌리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게다가 그 때의 나는 좀 나빠지고 싶었다. 그따위 수작에 맘먹고 속아줄 아량 도 있었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맥주와 안줏거리를 사갖고 방으로 들 어갔다. 술이 약한 남자는 내 옷을 바라보며 말했다. “단추가 많아서 벗기 힘들겠다.” 쓴웃음이 나왔다. 조금 뒤, 자연스러운 절차처럼, 남 자는 입술을 들이밀며 내 옷의 단추에 손을 댔다. 나는 남자에게 힘 찬 니킥을 선사했다. 남자 입장에서는 어이없을 터였다. 무릎을 차 올리는 순간, 부욱, 하고 뭔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셔츠 가장 밑의 자개단추가 튕겨져 나가는 소리였다. 남자가 기대한 일은 결국 일어 나지 않았고 나는 혼자 복잡한 심경으로 자취방에 돌아왔다.
그 뒤로 그 옷을 다시는 입지 않았다. 한때 그 옷은 내게 사랑의 증표였지만 지금은 실패한 연애들의 상징처럼 남아 있다. 도대체 언 제 버릴 수 있을지,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우리나라 보수 지도층의 끝 모르는 물욕 과 지배욕, 명예욕을 보노라면 같은 ‘영장류’ 인가 두렵다. 이명박 정부 요인들의 4대 필수 과목이 박근혜 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 것 같다. 위장전입·부동산투기·세금탈루· 병역기피, 여기에 교수 출신은 어김없이 논문 표절이 따라붙는다. 사퇴한 김용준 국무총 리 후보와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는 수십 억원의 재산과 명예를 누렸지만 동물적 욕망을 자제하지 못해 이제까지의 삶이 일거에 추락했다.
이상득·최시중·천신일·박희태·박관용·김효재·김지하…. 돈이 나 명예 또는 권좌를 누릴 만큼 누리고도 끝없는 동물적 욕망 때문 에 추락한 군상이다. 60~70대는 인생을 결산해야 할 때다. 나이 들 어 욕망이 지나치면 ‘노욕→노추→노망’으로 이어진다. “누가 처자를 어여삐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지도자가 나라를 위함에는 가족까지 희생하는 법이니 나라 사랑과 가족 사랑은 같이할 수 없 다.”(신채호, )
13자(한문)로 자신을 정리한 사람이 공자다. ‘위정편’과 ‘자 한편’에 나온다. 지학(志學), 이립(而立),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 이순(耳順), 종심(從心)이다. 풀면 이렇다. “나는 나이 15살에 학문에 뜻을 두어 서른에 자립했고, 마흔에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으며, 쉰에는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예순에는 무슨 소리를 듣든 귀에 걸림이 없었으며, 일흔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좇았지만 한 번도 도리에 어긋난 적이 없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니체)는 말을 명심하며 살아왔다. 민주정부가 들어 설 때였다. 긴 세월 야당 신문 만드느라 고생했다며 거대 공기업의 감 사를 맡으라는 제안이 있었다. 욕심이 생겼다. 정치인들 후원금을 챙 겨주는 자리여서 국회 진출도 수월하 다는 감투였다. 하지만 말(馬)보다 말 (言)이 하고 싶어서 사양했다. 그 자리 를 맡은 사람이 연거푸 쇠고랑을 찼 다.
돈·권력·명예는 양날의 칼이다. 잘 쓰면 사람을 살리는 활검이고, 잘못 쓰면 사람을 죽이는 살검이거나 자살 용이 된다. 인간으로서 틀거지가 잡혀 입내라도 낼 만한 위치가 되면 돈·권 력·명예 욕심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한 다. 그게 ‘나잇값’이다.
불편함에 양보하세요 - 김경옥 대안교육잡지 편집장
같이 일하는 청년이 노트북과 와이파이 신호를 잡아내는 에그를 가방에 넣고 인도 로 떠났다. 정신없던 서울 생활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며 떠난 여행이었다. 인도에 도착한 날,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무사 도착 사실을 알렸고, 서울 사람들은 인도의 하루 를 즐기는 그의 환한 얼굴을 실시간으로 확 인하고는 같이 웃었다. “와우! 편리한 세상.”
그런데 며칠 지나, 서울 사람들은 그에게 부탁할 일이 생겼다. 인 터넷만 연결돼 있으면 어디서나 가능한, 크게 품을 들이지 않아도 될, 하지만 그가 꼭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카톡으로 연락을 계속 보내 지만 소식이 없다.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걸어도 “전화를 받지 않습니 다”라는 여성의 녹음된 목소리만 들려왔다. “이런 된장!”
사람들은 편리하고 스마트한 세상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 지만 막상 적응하고 나면 거기서 헤어나오기가 만만치 않다. 스마트 한 냉장고는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가 냉장고에 있다고 전화로 알려 주고, 집 나갈 때 시간을 정해놓으면 혼자 이곳저곳을 누비며 청소 를 하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로봇청소기가 있다. 그러니 굳이 냉장고 를 열어 확인하고 빗자루로 바닥을 쓸 일이 없다.
디지털 사진도 그렇다. 사람들이 디지털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게 불과 10년도 채 안 됐지만, 그새 필름을 넣고 사진을 찍는 건 낯설고 불편해 도무지 엄두를 낼 수 없게 됐다. 나 하나 맘먹는다고 되지 않 는다. 주변 환경이 온통 디지털 사진만 가능하게 해서 돌아오기 더욱 힘들어진다. 이렇게 손가락 하나로, 스마트폰에 기록하는 것만으로 제가 알아서 움직이는 편리한 기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제 몸을 움직여주는 편리한 기계를 사려고 또 손가락을 눌러야 할 것이다.
사실 편리함은 이런 물건들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언 제부턴가 사람들의 ‘사이’를 만들어가는 데도 ‘편리함’을 최우선 가치 로 여기는 듯하다. 좀 불편해지는 ‘사이’를 도저히 못 참는다. 그러다 보니 불편해질 이야기는 좀처럼 하지 않는다. 화를 내서도 안 되고, 상처 주는 말을 해서도 안 된다. 그저 매끄럽게, 얼굴 찌푸리지 않도 록 말하고 행동하는 게 대세다. 사람 사이의 갈등을 불러일으킬 만 한 말과 행동은 거의 사회악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건 아닐 테니, 그걸 삭이느라 마음에 병이 든다. 오히려 당장 좀 불편해지고 불이익이 뒤따르더라도 화를 내고 싫은 소리도 해보면 어떨까. 그렇지 않으니 마음을 다치고 나서야 여기저 기서 ‘힐링’받느라 부산하다.
편리하고 스마트한 생활, 오늘은 ‘불편함’에 양보하길 권한다. </g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