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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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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핵연대로 단일화한 영광



2004년 방폐장 유치운동 벌인 단체가 반대운동 했던 이들과 ‘원전 투명성 확보’ 함께 요구하는 전남 영광…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높아진 경각심에 1990년대 시작된 아래로부터 탈핵연대 더해진 성과
등록 2012-12-15 11:51 수정 2020-05-03 04:27

“오셨습니까, 형님.” 벌떡 일어선 사내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40 대 남자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꺾었다. “전임 회장님이십니다.” 누군 가 귀띔한다. 어디를 봐도 머리띠 두르고 농성을 벌일 만한 사람들 같진 않았다. 연장자에게 말끝마다 ‘형님’이란 호칭을 붙이는 게 입에 밴 사내들은, 외지인 눈엔 자칫 동네 건달패쯤으로 오인받기 쉬웠다. 지역의 20~40대 친목모임인 청년회 회원들이라고 했다.

지난 12월5일 전남 영광군 홍농읍에 있는 영광 원자력본부 정문 앞에서 홍농읍 청년회원이 원전 가동 중단과 안전성 확보를 요구하는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청년회는 2000년대 중반에는 방사성폐기물처리장 유치운동을 벌이며 반핵단체들과 대립했었다. 이세영 기자

지난 12월5일 전남 영광군 홍농읍에 있는 영광 원자력본부 정문 앞에서 홍농읍 청년회원이 원전 가동 중단과 안전성 확보를 요구하는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청년회는 2000년대 중반에는 방사성폐기물처리장 유치운동을 벌이며 반핵단체들과 대립했었다. 이세영 기자

‘관변조직’은 어떻게 변하게 되었나

전남 영광군 홍농읍 계마리. 6기(영광 1~6호기)의 원전이 운영 중 인 이곳에선 ‘영광원전 안전성 확보 홍농읍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가 11월20일부터 무기한 컨테이너 농성을 벌이고 있다. 농성에 참여 한 단체들은 홍농읍 발전위원회, 이장단, 번영회, 바르게살기위원회, 새마을지도자회, 청년회 등 ‘관변조직’으로 불려온 곳이다. 단체들 대 부분은 2004년 방사성폐기물처분장(방폐장) 유치운동에 앞장섰다.

“아이로니컬하지요잉?” 12월5일 농성 컨테이너에서 만난 청년회원 이 말했다. “그 양반들하고는 다시는 낯짝 맞댈 일 없을 줄 알았소. 근디 시방은 요로코럼 함께 일허요. 허허.” 비대위를 함께하고 있는 농민회원들을 일컫는 얘기였다. 영광군 농민회는 지역 종교계와 함 께 2004년 당시 방폐장 유치를 가장 앞장서 반대했다. ‘형님, 동생’ 하 며 지내던 마을 사람들이 ‘찬핵’과 ‘반핵’으로 갈려 반목하던 시절이었 다. 원전이 있는 홍농읍은 갈등의 강도가 더 심했다. 원전 직원을 상 대하는 자영업자와 원전 협력업체 직원이 많아서만은 아니었다.

“원전 위험하다는 거, 우리라고 왜 모르겄소. 근디 어쩔 수 없이 원 전 끼고 살아야 하는 홍농 사람들 처지에선 방폐장 하나 더 들어온 다고 특별히 더 위험해질 게 뭐 있겄소. 지역 발전시켜보겠다고 유치 운동 허는디, 그쪽에선 자꾸 우릴 한수원(한국수력원자력)에 매수 된 놈들 취급하니까, 감정이 좋았을 리 있소? 근디 지금은 다르요.”

변화가 시작된 건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부터 라고 했다. ‘찬핵’ 의견이 급격히 위축됐다. 지역의 발전보다 안전이 우선이란 인식이 확산된 덕이었다. 결정적 계기는 올해 영광 원전에 서 잇따라 드러난 크고 작은 고장과 잡음이었다. 3월 말 2호기 가동 정지를 시작으로, 11월5일 5·6호기가 멈췄다. 품질검증서를 위조한 불량부품이 무더기로 사용된 원전이었다. 나흘 뒤인 11월9일에는 3 호기의 핵심 설비인 제어봉 안내관에 균열이 생겼다는 보도가 나왔 다. 성난 민심이 폭발했다. 11월10일 ‘영광 원전 범군민대책위원회’(범 대위)가 결성됐다. 범대위는 군의회를 포함해 진보·보수를 아우른 130여 개 사회단체와 원불교·천주교 등 지역 종교계를 망라했다.

11월15일 계마리 영광 원전 정문 앞에선 3천여 명이 참여한 집회 가 열렸다. 2005년 8월 방폐장 반대 집회 이후 7년 만이었다. 참가자 들은 원자력안전위원회를 상징하는 허수아비를 불태웠다. 닷새 뒤 같은 장소에서 열린 홍농읍민 집회에는 500여 명이 참여했다. 참가 자 중 일부가 원전 정문 돌파를 시도하며 경찰과 충돌했다.

천주교, 원불교 그리고 공해추방운동연합

심상치 않은 영광의 분위기에 정부와 원자력 당국도 발 빠르게 움 직였다. 주무부처인 지식경제부 당국자와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 등이 서둘러 영광을 방문해 범대위 관계자들을 면담했지만, 범대위 는 여전히 원자력안전위원회 해체와 1~6호기의 전면 가동 중단, 재 가동 전 군의회 동의 절차 도입 등의 요구안을 고수하고 있다. 4곳의 국내 원전(고리·월성·영광·울진)이 모두 노후화와 부실 부품 사용 에 따른 사고 위험성을 함께 안고 있음에도, 영광에서만 유독 격렬 한 주민 반응이 나오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지역 인사들은 영광이 ‘탈핵운동’의 거점으로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영광은 1986년 소련 체르노빌 원전 사고 뒤 한국 의 1세대 반핵운동이 태동한 곳 가운데 하나다. 1988년 공해추방운 동연합(환경운동연합의 전신)의 반핵농활 등을 계기로 농민회 준비 모임, 해직교사 모임, 원불교·가톨릭 교구 등이 핵발전소추방운동연 합으로 결합해 원전 증설(3·4호기) 반대운동을 펼쳤다.

1993년 말 3·4호기 완공을 앞두고 이 단체는 핵발전소추방협의회로 개편되는데, 원전 노동자 사망사건(1992년)과 기형아 출산, 어장 황폐화 등으로 반원전 여론이 거세지던 상황에서 안전성 검증이 안 된 ‘한국형 원자로’가 가동에 들어가자 주민들이 들고일어섰다. 당시 교육 담당 간사였던 노병남씨는 “농민회라는 실행 조직에 천주교 대교구와 원불교 종단의 지원이 결합해 폭발력과 지속성을 가질 수 있었다. 읍·면과 마을 단위까지 조직이 만들어져 지속적인 교육과 동원이 이뤄졌다”고 회고했다. 1990년대 반핵운동은 96년 절정에 달했는데, 주민 일부가 트랙터를 동원해 원전 정문을 돌파하고 원전 홍보관의 발전소 모형을 불태우는 바람에 활동가 3명이 구속되기도 했다.

소강상태에 들어갔던 반핵운동은 2000년대 초·중반 방폐장 유치 문제로 재점화된다. 홍농읍과 영광읍 주민 일부가 단체를 결성해 방폐장 유치에 나서자 진보·보수를 망라한 140여 개 사회단체가 범군민대책위로 뭉쳐 반대운동을 벌인 것이다. 2005년 영광군과 의회가 유치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혀 상황은 일단락됐지만, 찬반 운동 과정에서 생긴 갈등의 골은 깊었다. “목욕탕 갔는디, 유치운동 했던 젊은 친구들이 대놓고 상욕을 합디다. 그쪽 사람들하고 길에서 치받고 싸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오. 지금은 화학적 결합까지는 아닌디, 함께 데모하고 막걸리 마실 만큼은 감정이 풀렸소.”(노병남)

두 진영이 어떻게 한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일각에선 ‘원전 즉각 폐쇄’가 아닌 ‘운영 투명성 확보’와 ‘안전성 확인 때까지 가동 중단’으로 요구 수준을 낮춘 것이 주효했다고 본다. 주경채 비대위 상임위원장은 “원전이 그 위험성에 비해 지역에 주는 경제적 이익은 극히 미미하다는 게 밝혀진 상황에서, 설계수명이 끝나는 것부터 단계적으로 폐쇄하자고 하면 동의 못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했다.

탈핵 이익이 손실보다 큰 구조 필요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지역의 제1당인 민주통합당이 탈핵 노선(단계적 원전 폐쇄와 신규 건설 중단)으로 선회한 것도 여론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지자체와 지방의회가 한 축을 담당하는 ‘찬핵 카르텔’의 작동 여지가 그만큼 좁아진 탓이다. 지역 발전을 명분으로 노골적인 찬핵론을 펼쳐온 지역 언론도 눈에 띄게 위축됐다.

하지만 지역 차원의 탈핵 연대가 안정화되려면, 강력한 주민운동의 존재나 정당·지방정부의 정책 변화뿐 아니라, 탈핵으로 얻는 이익이 그 손실을 능가하는 사회적 경제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정필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의 말이다. “독일에서 보듯 재생에너지 기업과 노동자들은 탈핵을 지지하는 경제적 이해를 갖게 마련이다. 핵산업의 축소가 가져올 고용 불안을 제거하고 지역사회에 끼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재생에너지와 에너지 효율 분야의 지역 경제 영역을 의식적으로 조직할 필요가 있다.”

영광=글·사진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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