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만(40·가명)씨를 만난 곳은 부산 영도구 한진중공업 조선소가 아니라,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 조선소 앞 길이었다. 지난해 6월11일 그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며 고공농성을 이어가던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을 지키고 있었다.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희망의 버스’ 탑승객들이 처음 영도조선소로 향한 날이다. 김씨는 다음날 희망버스 탑승객들을 배웅하며 눈물을 훔쳤던 한진중 ‘스머프’ 형님들 중 하나다.
복귀 예정일 6월1일, 휴직 기한 연장 통보
지난해 1월 그는 정리해고 통보를 받았다. 10년을 꼬박 일한 곳이었다. 억울하고 치사해서 그냥 나갈 수 없었다. 파업에 참여했다. 생계 문제로 파업 대오에서 이탈하는 동료의 수가 늘어만 갔다. 고립감이 심해질 무렵 희망버스 행렬이 찾아들었다. 부당한 정리해고에 대한 비판 여론도 들끓었다. 11월10일, 마침내 김진숙 지도위원이 땅으로 무사히 내려왔다. 정리해고자 94명에 대해 1년 내 재취업, 생계비 지급, 노사 간 민형사상 고소·고발 최소화 등의 내용이 담긴 노사 합의가 이뤄졌다. 그로부터 7개월이 흐른 지금, 김씨는 영도조선소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해고자들만의 일이 아니다. 한진중은 지난해 12월부터 6개월간 순환휴직제를 시행하고 있다. 생산직 700여 명(정규직) 가운데 570여 명이 휴직 상태다. 지난 6월1일은 1차 휴직자 273명이 복귀하기로 한 날. 그런데 회사는 작업 물량이 없다며 휴직 기한 연장을 통보했다.
지난 6월14일 저녁 7시, 현대중공업 인근에선 회색 작업복을 입은 직원들이 퇴근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 거리 한켠에 트레이닝복을 입은 김씨가 서 있었다. 그도 한때는 한진중 작업복을 입고 영도를 활보했을 터다. “15년 전, 다른 직장을 다니다 돈이 너무 안 돼 조선소 일을 처음 시작한 게 여기, 울산이라예. 처음 조선소를 가서는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우예 있노 했다 아입니꺼.” 그는 인근 여관방에서 주로 40~50대인 다른 노동자 7명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울산의 한 조선소 사내하청 업체에서 주는 물량을 받아 작업을 한다. 일종의 임시직인 ‘물량조’ 노동자다.
그는 15년 전에도 물량조 생활을 했다. 돈이 된다 싶으면 조선소 곳곳을 찾아다니며 일을 했다. 몸은 고되어도, 아들 둘과 아내를 부양하는 데는 이만한 벌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정착한 곳이 한진중 영도조선소였다. 떠돌이 생활을 할 때보다 오히려 버는 돈은 줄었다. 그래도 얻은 게 더 많았다. “한진중 다니면서부터는 마누라하고 이야기도 마이 하고 일상이 공유가 되더라고요.”
김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갔지만, 임시직·비정규직 일은 늘 서러웠다. 같은 조선소에서 일을 해도, 회사에서 지급받는 피서복도 차별했다. 피서복 한 벌로 한 달을 버티기도 했다. 한진중에 정규직으로 입사해 가장 좋았던 것은 소모품이나 자재를 풍족하게 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생전 모르던 ‘노동조합’에도 눈을 떴다.
“옛날에 한 조선소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사람들이 파업을 하더라꼬. 그땐 뭔 지랄들이고 했지. 나는 이렇게 쎄가 빠지게 고생하고 있는데, 파업은 힘있고 빽 있는 사람들만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2010년 구조조정 이야기가 들려왔을 때, 그는 짐짓 ‘잘리면 옛날에 하던 거 하믄 되지’라며 마음을 추슬렀다. 하지만 정리해고를 통보받은 날, 김씨는 남몰래 관물대 앞에서 울었다. “자식들을 위해 여기 왔는데, 고작 이럴라꼬 이 회사에 들어왔나. 내 청춘이 아깝고, 아쉽고…. 감정이 막 복바치데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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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취업 금지돼 몸 다쳐도 쉬쉬
파업으로 1년가량 집을 비웠던 그가 지난 1월 다시 집을 나선 건 생계 때문이다. 회사는 약속한 생계지원금 2천만원 중 지금까지 1600만원을 지급했지만, 안정적으로 가계를 꾸리긴 힘들었다. 다른 조선소에서 하청노동자로 일하거나, 건설현장 등을 전전하는 건 휴직자들도 마찬가지다. 휴직자들은 수당이나 상여가 빠진 통상 임금을 받고 있으나 가계를 유지하는 데 턱없이 부족한 액수다. 휴직자들은 이중 취업이 금지돼 있다. 이 때문에 불리한 계약조건에서 일을 하거나 몸을 다쳐도 쉬쉬하는 경우가 많다.
김씨는 다시 물량조 노동자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동안 조선업계에서는 이런 물량조 방식의 임시직이나 비정규직 노동이 더욱 확산돼왔다. 김씨는 아침 6시30분에 여관을 나서 저녁 6시쯤 다시 여관으로 돌아온다. 쳇바퀴 도는 시간이다. 폐쇄된 곳에 들어가 땀 흘리며 작업하다 보니 3개월 만에 6kg이 빠졌다. 김씨의 오른손 검지가 부어 있었다. 양손을 오므리기가 불편하다고 했다. 저녁만 되면,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다. 이렇게 그리움과 서러움을 참고, 고된 노동으로 손에 쥐는 돈은 한 달에 400만원.
한때 영도조선소에서도 정규직·비정규직 합쳐 총 5천여 명이 조업을 했다. 지금 이들 대부분이 일자리를 찾아 떠돌고 있을 터다. 김씨의 벌이는 15년 전과 비슷하다고 했다. 울산까지 온 것도 좀더 많은 일당을 받을 수 있는 자리를 찾기 위해서다. “옛날 부산에서는 용접 A급이면 하루 일당이 13만원 이상이었는데, 지금은 7만~8만원 받는다고 알고 있어요. 일할 사람이 천지니까 임금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요.” 이름 밝히길 꺼린 한 휴직자도 다른 조선소에서 한 달가량 일당을 받고 하청일을 하고 있다. “협력업체 사람들한테 상대적으로 더 힘든 일을 많이 시켜요. 예전에 한진중 정규직 중에서도 위험한 일은 하청 쪽으로 넘기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게 다 지 죽이는 일이 되는 긴데, 그걸 모르고….”
토요일인 지난 6월9일, 7개월 만에 다시 찾은 영도조선소는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조선소 내부에서 조업을 하는 인력은 정규직 140명과 협력업체 직원 200명 정도뿐이다. 영도조선소는 2008년 9월 이후, 물량의 80%를 차지하던 상선 부문 수주 실적이 전혀 없다. 지난해 11월 마지막 선박마저 선주사에 인도돼 방위산업 물량 등을 제외하곤 독(선박조립 설비)이 비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309일간 고공농성을 했던 85호 크레인을, 회사는 파업이 끝나자마자 철거했다. 85호 크레인은 한진중 노동자들의 투쟁 역사가 오롯이 서린 ‘성소’였다. 2003년 김주익 당시 금속노조 한진중 지회장이 정리해고를 반대하며 고공시위를 하다 129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도 85호 크레인이다. 그 열흘 뒤 곽재규 조합원이 85호 크레인 맞은편 독에서 몸을 던졌다.
조선소 정문은 외부인 출입이 금지돼 있다. 정문 바로 옆으로 ‘회사 정상화와 민주노조 사수’ 구호가 적힌 천막농성장이 들어섰다. 금속노조 한진중 지회가 지난 6월7일 오전 설치한 천막이다. 조합 간부 10명가량이 돌아가며 천막을 지키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차해도 지회장은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고 했다. 회사는 조합을 상대로 파업손실금 158억원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섰다. 지난해부터 복수노조가 허용돼 한진중에도 올해 초 또 다른 노조가 생겼다. 회사와 가까운 노조가 들어서자 교섭은 더욱 지지부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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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날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새 노조로
그러던 차에 지난 2월 회사는 단체협약 해지를 통보했다. “회사가 기존 조합을 상대하지 않으려고 합니더. 7월21일에 노사 교섭 기간이 끝나기 때문에 6월엔 뭐라도 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천막을 친 깁니더.” 천막 바로 옆 건물에 붙은 커다란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거렸다. ‘회사와 하나되어, 한진중공업 75년 역사 조선 1번지 긍지와 자부심을 되찾겠습니다.’ 새로 생긴 ‘한진중 노조’가 걸어놓은 글귀다.
차 지부장은 “생계지원금을 준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복수노조로 조합원들이 많이 갔다”고 했다. 그는 회사가 결국 필리핀 수비크조선소에 물량을 몰아주고 영도조선소를 축소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차라리 내 예상이 틀렸으면 좋겠십니더. 아니, 진짜 틀려가지고 회사를 정상화하면 새 노조에 가서 큰절이라도 할 일 아니겄습니꺼.”
파업 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은, 노동자들 사이에 균열을 일으켰다. 새 노조엔 조합원 550여 명이 가입했다. 반면 기존 노조인 한진중 지회엔 해고 뒤 재취업 대기자 94명을 포함해 220여 명이 남았다. 새로 생긴 노조에 가입하면 휴직이 빨리 풀린다는 근거를 알 수 없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최근 기존 노조에서 나와 새 노조에 가입했다는 한 휴직자는 앞날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수소문 끝에 연락이 닿은 그는 자신의 신원이 노출되지 않게 해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그 역시 생계를 위해 다른 조선소 하청업체에서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었다. “파업한다꼬 수입이 제대로 없었는데 그 결과가 휴직인 거라예. 계속 회사를 다닐지 걱정이 많이 되는 거예요. 지금 휴직자든, 해고자든, 희망퇴직한 사람이든 다들 어려워예. 일단은 회사가 원하는 걸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 새 노조에 가입했습니더. 이렇게라도 하면 살길이 열리지 않을까 싶은 깁니다.”
6월10일 낮, 영도조선소 천막농성장을 다시 찾았다. 유난히 파란 하늘 아래 홀로 앉아 있던 이는 한진중 지회 사무장 고지훈(42)씨였다. 애초 정리해고 명단에 포함돼 있었지만, 최종 명단에는 빠졌던 그다. 희귀성 난치병인 척추골간단이형성증을 앓고 있던 딸아이를 배려하라는 동료들의 항의가 이어진 모양이었다. 고씨는 차라리 해고됐으면 마음이 편했을 거라고 했다. 2003년 한진중 정리해고 반대투쟁 직전에 태어난 막내딸 현서는 가족대책위 활동에 나선 엄마 등에 생후 6개월부터 업혀 있었다. 지난해 여름, 부산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다리에 교정기를 심은 채 휠체어를 타고 있던 10살 현서는 여러 차례 수술 끝에 이제 곧잘 걸어다닌다. 그러나 여전히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다.
현서 엄마 전미숙(39)씨는 남편이 다시 천막농성을 해야 하는 현실이 답답하다. 두 아이를 돌보며, 인근 학교에 조리사로 나가 100만원도 안 되는 돈을 벌어 살림을 꾸려가는 건 그의 몫이다. “아이도 아프고 하니까, 남편한테 그냥 빠지라고 하고 싶어요. 저렇게 천막농성 한다 해서 조합원들이 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내가 아무리 말려도 할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몸만 다치지 마라 그래요. 회사가 저렇게 휴업 장기화시켜서 다 나가떨어지게 할 것 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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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한 5천억원 선박 건조, 수비크조선소에서
일주일 넘게 천막 생활을 하고 있는 고씨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회사에서는 계속 금속노조 지회하고는 대화로 풀 수 없다고만 하니까, 저희들이 지금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는 없어요. 조합원이 없으니까 다른 투쟁을 할 수도 없고….”
지난 6월12일, 한진중은 유럽의 한 선주사로부터 5천TEU(TEU: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를 나타내는 단위)급 컨테이너선 10척을 수주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 선박은 필리핀 수비크조선소에서 건조하기로 돼 있다. 전체 수주 금액은 4억5천만달러(약 5천억원)다. 회사 쪽은 가격경쟁력 때문에 영도조선소에선 이런 선박을 건조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한진중 관계자는 “영도조선소 부지가 26만4천㎡(약 8만 평)에 불과해 1년에 10여 척밖에 건조를 못하는 등 경쟁력이 떨어진다”며 “특화를 한다거나 공법·시스템을 개선해 원가를 절감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8월 한진중 조남호 회장은 부산시청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영도조선소를 포기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2월 한진중의 지주회사인 한진중홀딩스는 이사회에서 주당 250원의 현금 배당을 결정했다. 최대 주주인 조 회장은 약 34억원의 현금 배당을 받았다.
김상만씨에게 만약 영도조선소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그는 지금은 그런 상황을 생각조차 하기 싫다고 했다. “공적으로 합의한 것을 회사가 일방적으로 파기하지는 않을 낍니다. 약속 안 지키면…. 약속을 지키도록 하는 방법을 또 찾아야겠지요.” 해고자든 휴직자든 한진중 노동자들이 바라는 건 오직 하나, 영도조선소에서 작업복 입고 다시 일을 하는 것이다. 회사가 해고자들을 재취업시키겠다고 약속한 기한은 오는 11월1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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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인에서 내려온 뒤 강연 등 일정 때문에 계속 바쁘다고 들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어떤가.
=이명박 정권 들어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생존 조건 등이 다 무너진 것 같다. 단협을 맺었으면 지켜야 하는데 그것조차 무너지니 기댈 데가 없는 거지. 전국을 다녀보면 그런 느낌이 온다.
-희망버스는 김 지도위원에게 어떤 의미인가.
=어떤 이는 ‘전두환이 육사 가서 사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럼 6월항쟁은 뭐였냐’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전두환 사건은 웃긴 일이 아닌가. 그만큼 의식이 발전한 거다. 마찬가지로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면 희망버스로 인해 달라진 게 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희망버스는 정리해고·비정규직 문제에 공분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눈물과 땀의 결정체였다. 희망버스를 탄 사람들, 우리는 엄청나게 변했는데 상대편은 아직 하나도 안 변했다. 우리가 변했기 때문에 상황은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희망버스는 잠시 멈춘 것이지 앞으로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크레인 위에서도 희망버스의 힘이 아니었으면 못 버텼다. 나에게는 사람과 인연을 맺는 일이 정말 소중하다. 그게 나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자산이다.
-한진중에 복수노조가 들어섰다.
=자본은 늘 직접 나서 탄압을 하는 시기가 지나면 노-노 갈등을 부추겼다. 회사 쪽이 내세운 복수노조가 민주노조를 무력화하고, 해고자들을 배제해버리는 일련의 과정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렇지만 복수노조를 선택한 일반 조합원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언제 구조조정에 맞닥뜨릴까 불안감이 굉장히 크다. 노동자들을 회유하고 압박하는 자본이 문제다. 노동자들의 가장 약한 고리를 이용하는 비열한 방식이다. 이보다 더한 상황을 겪으면서도 노동자들이 단결해온 역사가 있다. 민주노조가 떠난 이들을 배척하지 말고 같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게 관건이다.
-그렇게 지켜내려던 노조가 없어질까봐 불안하지는 않나.
=싸움은 이길 때도 질 때도 있다. 옛날에는 한 번 패배하면 감당을 못했다. 지리산에서 일주일간 처박혀 있다가 오고 그랬다. 한 번 이기면, 100번 패배하기도 한다. 패배를 통해서 배우는 것도 많고…. 역사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급하게 생각지 않는다. 할 일 하면서, 또다시 싸워야 하면 싸워야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기도 한데, 그 상황에 맞게 싸우면 되는 거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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