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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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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노동자 희망의 버스를 타자

호황 때에 불황에 대비한 조직 기반을 다지지 못한 노동운동… 조선업종·금속산업 노동자가 희망의 버스에 넘쳐야 희망이 보인다
등록 2011-07-07 16:08 수정 2020-05-03 04:26

6개월을 끌어온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투쟁이 결국 민주노총 금속노조 한진지회 지도부의 파업 철회로 중요한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물론 아직 투쟁이 모두 마무리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지회 지도부의 결정에 대한 상급조직과 조합원들의 동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다, 김진숙 지도위원과 상당수 조합원들이 농성을 계속하고 있으며, 중앙노동위원회와 법원에서는 정리해고의 정당성을 둘러싼 법적 투쟁이 계속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지금까지 진행된 한진중공업의 투쟁 과정을 한 번쯤 돌아보고 정리하는 것은 필요해 보인다. 왜냐하면 한진중공업의 투쟁에서 현재 우리 노동운동이 당면한 노동문제들이 고스란히 속살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에 예고된 사태

무엇보다 먼저 고용 문제를 둘러싼 노동조합의 투쟁이 사업장 단위에서는 얼마나 많은 한계를 안고 있는지를 한진중공업 투쟁은 잘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사업장은 개별 자본가의 소유권이 가장 강력한 형태로 발휘되는 공간으로, 사실상 자본의 독재가 지배하는 곳이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애초 경영진이 영도조선소의 10배 규모에 이르는 필리핀 수빅조선소를 2006년에 건설해 조선사업의 중심을 해외로 이전하기로 결정한 데서 비롯됐다. 이런 경영적 결정은 노동조합과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된 것은 물론 유치한 수주 물량의 조작에다 해고와 배당을 동시에 진행하는 파렴치함까지 보이며 진행되었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이에 대응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은 별로 존재하지 않았다.

1980~90년대 조선 노동자는 한국 노동운동의 중심이었으나 2000년대 들어 조직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 조선소의 작업 현장. 한겨레21 박승화

1980~90년대 조선 노동자는 한국 노동운동의 중심이었으나 2000년대 들어 조직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 조선소의 작업 현장. 한겨레21 박승화

외부의 행정력에 호소할 수 있는 지방노동위원회의 판정이 아쉬운 결과로 나왔다. 아직 중앙노동위원회의 재심과 법원의 판결이 남아 있지만, 노동자의 많은 시간과 출혈을 요구할 이들 싸움에서 설사 이긴다 하더라도 경영진의 해외 이전 결정이 번복될 가능성은 없고 정리해고 문제는 재발될 가능성이 크다. 한진중공업은 이미 비민주적 노사관계 때문에 세 사람의 노동운동 활동가가 목숨을 희생한 사업장이지만 이런 희생도 경영진의 독재적 전횡에는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러면 한진중공업 문제는 노동자의 일방적 희생으로 끝나야 할 문제인가? 그것은 그냥 자본의 독재 문제일 뿐인가?

이 대목에서 정말 가슴을 치고 싶은 깊은 회한과 아쉬움이 있다. 우리 노동운동은 이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가졌는데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한진중공업의 이번 사태는 경영진의 파렴치한 독재적 전횡 문제와는 별개로 우리 노동운동의 전술적 공백 상태를 잘 드러내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시급히 이 문제를 되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필요성도 있다. 노동운동의 일반적인 전술 원칙은 호황기에 불황을 준비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날이 맑을 때 우산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조선산업은 1990년대 이후 순조로운 성장을 지속했고, 1997년과 2008년의 경제위기 기간에도 심각한 타격을 받지 않은 채 거의 20년간의 장기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노동집약적 성격 때문에 조선산업은 원래 역사적으로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점차 이전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세계 조선산업의 주도권은 금세기 초 영국에서 독일로, 1960년대에 일본으로, 1990년대에 한국으로, 그리고 이제 2010년대에는 중국으로 넘어가는 수순을 밟아가고 있다. 따라서 한진중공업 경영진의 수빅조선소 이전은 우리 노동운동이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사태였다. 실제로 2000년과 2004년 금속연맹 조선분과는 두 번의 정책연구를 통해 우리 조선산업이 2010년을 전후해서 분기점을 맞게 될 것을 이미 예측했다. 따라서 보고서에만 따르더라도 우산을 준비할 기간은 10년이나 주어져 있었다.

한진은 현대의 미래다?

그러나 이 기간에 우리 노동운동은 우산을 준비하지 않았다. 조선업종 전체가 수천억원에서 수조원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호황을 누리는 동안에도 구조조정에 대응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이 전혀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우리 노동운동이 마냥 손을 놓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고용 문제는 초기업 단위에서야 비로소 효과적 대안이 마련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산별노조를 건설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사실 한진중공업은 조선산업 내에서 가장 먼저 산별노조로의 전환을 결의한 사업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2004년 조선산업 최대 사업장이던 현대중공업이 당시 민주노총 금속연맹을 탈퇴하고 금속산업 대기업들의 산별 전환이 지지부진해져 이 10년의 기간은 그냥 탕진되고 말았다.

거기에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전술적으로 시기를 놓친 이런 안타까움 외에도 다른 구조적 문제가 이미 우리 노동운동의 뿌리를 잠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희망 버스가 간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이 버스에 조선사업장 노동자가 가득 타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우리나라 조선산업 노동조합은 일찍이 업종 단위의 분과를 꾸려서 우리 민주노조운동 내에서 가장 강력한 투쟁동력과 연대의식을 자랑하던 조직이었다. 그러나 산별노조로 전환한 현재의 금속노조 내에서 조선분과의 연대는 이미 거의 동력을 잃은 상태다. 한편 파업을 하는 동안 한진중공업의 생산활동은 중단되지 않았고 따라서 파업의 효과는 미미했는데, 이는 정규직의 수에 거의 맞먹는 비정규직이 생산에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문제가 정규직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아직 투쟁이 마무리되지 않은 지금 돌아보더라도 한진중공업 사례는 우리 노동운동에 중요한 반성의 단서를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의 초기업적 규제력이 갖추어지지 않은 조건에서는 자본의 독재적 전횡이 언제든지 노동자의 고용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현대중공업이나 현대자동차 같은 대규모 사업장은 예외일 것이라는 생각은, 비구름이 오고 있는데 나만 비를 피할 수 있으리라는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 최대의 제조업체였던 제너럴모터스(GM)의 경영 위기를 누가 상상이나 했던가?

노동자 없는 희망의 버스 없다

인류사회의 오랜 역사는 공동체적 이해와 개별적 이해가 결코 분리돼 있지 않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공동체적 이해의 토대 없이는 어떤 개별적 이해도 존립하지 못했던 것이다. 금속노동자, 나아가서는 노동계급 전체의 이해가 지켜지지 않는 조건에서는 어떤 대기업에서도 개별 사업장의 이해를 결코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이 노동운동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이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당연한 이치다. 이제 두 번째 희망 버스가 간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 버스가 정말 ‘실현할 수 있는 희망’을 싣고 가려면 그 버스에 노동계급 공동의 이해를 지키려는 조선업종과 금속산업 노동자, 그리고 우리 노동계급 전체의 연대 의지가 담겨야 할 것이다. 자본가가 만들어낸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려는 지렛대를 노동계급 내부의 역량에서 찾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노동운동이 지금 당면해 있는 과제다. 우리 민주노조운동이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앞에서 절망과 희망이 엇갈리는 갈림길의 시험대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을 나는 본다.

강신준 동아대 교수·경제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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