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size="3"><font color="#C21A8D"> 에피소드 1</font></font> : 4월15일은 기초지방의회가 부활한 지 20돌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지방의원들의 행사가 열렸다. 그런데 행사가 끝나기도 전에 지방의원들이 슬슬 빠져나갔다. 4·27 재보선 막바지였기에 눈도장을 찍기 위해 선거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지역으로 향한 것이다. 지방의회 20돌의 의미를 되새기며 의정활동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것보다는 지역 국회의원들과 원외위원장들에게 찍히지 않는 게 중요한 현실이다. 결국 몇몇 소신 있는 지방의원과 무소속 의원, 소수 정당 지방의원들만 남은 가운데 행사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font size="3"><font color="#C21A8D"> 에피소드 2</font></font> : 지난 연말 어느 도시에서 3개의 관변단체를 지원하기 위한 지원조례가 상정되었다. 이렇게 특정한 단체를 지원하는 조례안이 상정되는 것은 우리 지방의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조례에 반대하는 지방의원을 찾기란 쉽지 않다. 다행히 이 도시에서는 용기 있는 지방의원들이 반대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조례는 통과되었다. 다수 의원들이 관변단체들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font size="3"><font color="#C21A8D"> 에피소드 3</font></font> : 주민참여예산제도는 올해 9월까지 모든 지방자치단체에서 의무적으로 시행해야 하는 제도다. 얼마 전 한 지방의회에 주민참여예산제에 관한 조례가 상정되었다. 그런데 의원들은 소속 정당을 불문하고 주민참여예산제가 자신들의 권한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며 반대했다. 결국 조례는 보류되었다.
‘완장’ 탐내는 기득권의 부활앞서 든 에피소드들은 어느 특정 지방의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나라 지방의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지방의회가 부활한 지 만 20년이 되고 있지만, 지방의회는 여전히 표류하고 있다. 지방의원들은 의정활동보다는 중앙정치인들에게 잘 보이는 게 중요한 존재들이다. 관변단체들의 영향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면서 정작 주민 위에는 군림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주민의 참여가 자신의 기득권을 위협할까봐 주민 참여에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게다가 국회의원보다 유명한 지방의원이 된 ‘이숙정 의원’ 사건 등 지방의원들의 자질 시비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은 끊이지 않는다. 부패나 이권에 연루된 지방의원도 많다.
왜 우리 지방의회는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까? 역사적으로 보면 크게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째, 1991년에 있었던 지방선거에서부터 일은 꼬였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지방의회 선거가 부활했지만, 지역정치로 진출할 만한 사람은 극히 제한돼 있었다. 오랜 군사정권을 거치며 당시 지역사회에서 의미 있는 존재란 지역에서 ‘유지’로 불리는 기득권 세력과 관변단체 정도밖에 없었다. 지방의회 선거가 부활하자 이들이 자연스럽게 지방의회로 대거 진출하게 됐다. 지방의회는 지역에서 기득권을 가진 남성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의정활동보다 ‘완장’과 이권에만 관심이 있었다. 지방의회는 망가지기 시작했다.
찍히면 공천은 없다?둘째, 2006년 지방선거부터 기초지방의원까지 정당공천제가 도입되었다. 그 전까지 기초지방의원은 추첨으로 기호를 정했다. 추첨으로 기호를 정할 때는 정당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물론 정당이 사실상 지지 후보를 내정하는 ‘내천’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내천’이 곧 당선은 아니었다. 그런데 정당공천제가 되자 공천을 받아야만 당선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지역 국회의원이나 원외위원장의 영향력이 커졌다. 공천을 받으려고 공천권자에게 줄을 서는 현상이 심해졌다. 당연히 공천을 둘러싼 부패도 심해졌다.
물론 정당이 공천권을 제대로 행사한다면 정당공천제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을 보면, 정당 자체가 사유화돼 있다. 정당의 중앙 보스는 사라졌지만, 지역 국회의원들이나 원외위원장들이 지역 보스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천은 민주적으로 될 수 없다. 게다가 정당공천제를 하더라도, 지방선거에서 한국처럼 정당별로 기호를 일률적으로 부여하는 나라는 찾기 어렵다. 전국적으로 동일하게 한나라당 1번, 민주당 2번 식으로 정당 기호를 부여해서 지방의원을 뽑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이것은 ‘누가 어떤 사람인지’를 따지지 말고 정당 기호만 보고 투표하자는 얘기를 노골적으로 하는 것이다.
어쨌든 2006년에 정당공천제는 기초지방의원까지 도입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공천권자의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다. 그나마 지역 국회의원이나 원외위원장이 괜찮은 사람을 공천하면 그 지역 주민에게는 다행이다. 그러나 의원이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의정활동에 대한 의지도 없는 사람이 공천을 받아 당선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한 게 현실이다.
지방의원들도 할 말은 있다. 자신들이 의정활동을 똑바로 하고 싶어도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장을 견제하려 해도 권한이 약하고, 조례를 하나 만들려 해도 이런저런 제약 때문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불평도 일리가 있다. 심지어 지방의회 사무국 직원들에 대한 인사권도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있는 형편이다. 지방의회 사무국 직원들은 몸은 의회에 있지만 지방자치단체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순환 인사에 따라 의회 사무국에 배치되는 직원들이기 때문에 전문성도 떨어진다. 그래서 지방의원들은 정책적 보좌를 받기 어렵고, 많은 부분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노력도 안 하면서 제도 탓만 하는 지방의원들을 보면 화가 난다. 제도가 불만이면 개선을 위한 투쟁이라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많은 지방의원들은 그럴 의지도 없다.
변화 시도하는 의원들에게 박수를
다행히 최근에는 변화의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다. 주민에게 열린 지방의회가 되려고, 정보를 공개하고 예산을 심의하기 전에 주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주민의 삶의 질’에 도움이 되는 조례를 만들려는 의원들이 생겨나고 있다. 정책 공부도 하고, 시민사회와 소통을 열심히 하는 지방의원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의원들은 소수다. 개혁을 주장하다가 공천권자에게 찍히면 다음번에는 명함도 못 내밀 수 있다. 무소속이나 진보 정당 소속이라고 하더라도 지역의 기득권 세력에게 찍히면 다음번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은 옥석을 가릴 때다. 지방의원들을 싸잡아서 욕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제대로 하는 의원에게는 박수를 보내고, 수준 낮은 행태나 반복하는 자에게는 냉혹한 심판을 내려야 한다. 그게 만 스무 살이 되는 지방의회에 보낼 수 있는 주권자들의 메시지다.
하승수 변호사·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지방자치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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