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피함을 ‘극복’하고, 누군가를 통해 기운을 ‘충전’하거나 누군가에게 그런 힘을 ‘충전’해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극복과 충전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니까.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희망은, 제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찾을 수 있으니까. 20년 된 지방의회에도 무기력함과 무능함으로 얼룩진 지난 역사를 극복하고, 주민들에게 풀뿌리 정치의 희망을 충전해주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100점’은 아닐지언정, 이렇게 애쓰면 지역이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보여준다.
뭉치면 힘이 된다
경기 과천시의회엔 ‘삼총사’가 있다. 서형원(무소속)·황순식(진보신당)·박정원(국민참여당) 의원이다. 소속도 출신도 당선 횟수도 다르지만, 이들은 대부분의 정책 활동을 함께한다. 그 중심엔 ‘공동 보좌관’이 있다.
지방의원에겐 이들을 돕는 보좌관이 제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민원 청취는 물론 사소한 자료 요구까지 모두 지방의원들이 직접 해결해야 한다. 조례를 만들거나 고칠 때도 개인적 인맥이 없다면 전문적 ‘검증’을 받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지방의원의 전문성과 의정 활동의 질을 높이려면 보좌관제를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는 건 지방의회의 오랜 요구다. 하지만 아직은 공식적으로 보좌관을 둘 수 있는 곳은 특별자치도인 제주도의회뿐이다.
세 의원은 지난해 선거 전부터 ‘당선되면 함께 보좌관을 두고 일하자’고 뜻을 모았다. 서형원·황순식 의원은 지난 지방의회부터 손발을 맞춰 일해온 터고, 박정원 의원은 지역 정치에 관심을 가진 ‘민주시민’으로 생활하며 이들과 인연을 맺었다. 세 사람은 당선 뒤 지역 신문에 광고를 냈고, 아이를 키우며 “여성, 특히 엄마라면 우리가 낸 예산이 어떻게 쓰이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관심을 가져야 지역과 우리 생활이 변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조은진 보좌관을 발탁했다. 제도적 뒷받침이 없기에, 조 보좌관의 활동비는 세 사람이 나눠서 부담한다.
조 보좌관은 세 의원이 함께 추진하는 정책이나 조례와 관련한 업무를 맡아, 대부분의 정책 사안은 네 사람이 함께 회의해서 결정한다. 의원들이 공동으로 성명서·보도자료를 내거나, 기자회견을 하는 일을 돕고, 의정보고서 가운데 공동 지면을 만드는 일, 지역사회와 의원들 사이 소통을 돕는 것도 조 보좌관의 일이다. 최근엔 친환경·녹색·전통 식생활 보급을 위한 식생활 교육 네트워크 조례를 만들려고 주민들을 만나고, 전문가와 의원들을 연결하고, 자료를 조사하느라 바쁘다. 서형원 의원은 “주민들의 요구나 전문가들의 의견에 연계해서 의원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니 혼자 일할 때보다 정책의 질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세 의원은 사실상 ‘지역정당’(Local Party·전국 단위가 아니라 특정 지역에서만 정치활동을 하는 정당) 구실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각종 의원 연구모임, 예산안 주민공청회, 업무추진비 공개 등 정보 공개 의무화, 시의원들의 해외 연수 사전심의제, 청소용역 등 시청의 무분별한 민간 위탁 제한 조례 발의, 대안학교까지 무상급식 확대 등을 함께 추진했다. 지난 5월부턴 시의회 1층에 북카페를 만들어, 시민들이 의회 회의록과 일반 도서 2천권을 볼 수 있게 했다. 서형원 의원은 “전문가들에게 연구용역을 맡겨, 시의회가 주민참여형 의회의 모범을 만들어 주민 참여를 활성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무소속 의원, 지역주의의 벽을 두드리다김수민 경북 구미시의원은 스물아홉이던 지난해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대규모 공단이 있어 20~40대가 많다고는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인 구미에서 한나라당 소속이 아닌, 그것도 ‘새파란’ 젊은이가 선거에서 이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김수민 의원은 당선에서 그치지 않고, 지난 1년 동안 그보다 더 값진 활동을 펼쳤다.
가장 손꼽을 만한 건 보육정책 확대다. 영·유아 무상 예방접종 정책을 이끌어냈고, 장난감 도서관을 만들었고, 맞벌이 부부의 자녀를 위한 아이 돌보미 파견 서비스를 대폭 확대했다. 안타깝게도 상급 기관인 경북도의회가 관련 예산을 삭감해 올해는 실현하지 못했지만, 구미시 차원에선 무상급식 정책을 관철했다.
지난해 추가경정예산 심사 땐 박정희 전 대통령 추모제·탄신제 관련 예산을 약 9천만원 삭감하라고 요구했다가 지역 언론과 ‘친박연합’(박정희 대통령의 민족 중흥의 유업을 이 시대에 실천하며 만들어진 정당으로, ‘친박연대’라 불리던 ‘미래희망연대’와는 다름) 등으로부터 사퇴 압력을 받기도 했다. 다른 시의원 대부분이 삭감에 반대해 예산은 원안대로 통과됐지만, 구미시의회에서 ‘박정희’ 관련 행사에 공개적으로 문제제기를 한 건 김 의원이 처음이었다.
최근엔 4대강 공사 여파로 생긴 구미시 단수 사태의 책임을 따져물으려고, 한국수자원공사와 구미시를 상대로 시민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지역단체인 ‘구미 풀뿌리 희망연대’ 운영위원이기도 한데, 이 단체와 함께 소송에 참여하겠다는 시민 1만2천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 앞으로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 개선과 정규직화를 위해서도 힘을 쏟을 생각이다. 그는 “지방의원은 무능하고 부패하다는 왜곡된 인식을 바꾸고 싶다”며 “정치인이 아니라 주민의 한 사람, (시민단체) 활동가의 한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활동한다면 ‘답’이 나오지 않겠느냐”고 했다.
대구 남구의회 의장은 재선인 김현철 구의원이다. 그가 의장이 된 뒤로 남구 의원들은 국외 연수를 ‘외유’로 생각할 수 없게 됐다. 국회도 그렇지만, 특히 지방의회에선 감시·견제가 적어 국외 연수는 늘 말썽을 빚어왔다. 하지만 김 의원은 국외 연수 장소부터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곳으로 골랐다. 지난해 말 이들이 간 곳은 미군이 주둔한 일본 오키나와다. 남구에도 미군기지가 있고, 기지 반환과 비행장 소음 등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어 비슷한 고민을 하는 오키나와의 사례를 보러 간 것이다. 4박5일의 일정 뒤엔 54쪽짜리 연수 보고서를 작성해 의회 누리집에 공개했다. 김 의원은 “‘굳이 보고서까지 만들어 공개해야 하느냐’고 반발하는 의원들도 있었지만, 집행부(남구청)에 투명한 행정을 하라고 하면서 우리가 안 하면 되겠느냐고 설득했다. 아직 한계는 있지만 이런 노력이 축적되면 사람들의 인식이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KYC가 주민들의 지방자치 참여를 확대하고 의정 활동의 질 향상을 도우려고 만든 ‘시민보좌관’ 프로그램에, 대구 지역의 다른 진보·개혁 성향 기초의원 10명과 함께 결합한 점도 눈에 띈다. 기초의회의 역할과 풀뿌리 민주주의의 중요성, 예산 편성 등을 지난 5월 교육받은 시민보좌관 10명은 곧 이들 의원과 짝을 이뤄 의정 활동을 돕게 된다. ‘과천시 삼총사’의 사례를 원용한 셈이다. 김현철 의원은 “주민들의 관심을 높이고 의회 활동에 제대로 참여할 여건을 만들어주면, 기초의회가 필요하다는 걸 주민들도 느낄 수 있지 않겠나. 그러면 의원들도 시민보좌관한테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애초 그는 대구 지역 8개 구·군 의장협의회에 이 프로그램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정파적’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결국 김 의원을 비롯한 기초의원들이 주머니를 털어 운영비를 일부 지원했다.
장시원 경북 울진군의원은 최근 서울 나들이가 잦았다.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 이후 우리나라에서 원전 불안감이 급속도로 높아지면서 벌어진 각종 토론회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울진군은 원전이 6기나 들어서 있고, 2기가 건설 중이며, 2기가 건설 예정이다. 울진군은 지난 2월 또다시 12기를 더 유치하겠다고 나섰다. 장 의원은 울진군의회에서 유일하게 원전을 반대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뺀 7명의 다른 군의원들이 원전 유치 동의안을 가결했을 때 느낀 무력감은 컸다. 7 대 1로 싸우는 대신 주민들의 손을 잡았다. 그는 요즘 매주 목요일 저녁 촛불집회에 나선다. ‘핵으로부터 안전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라는 지역단체가 신규 원전 유치를 반대하며 벌이는 집회다. “한국수력원자력과 정부가 오랫동안 원전이 깨끗하고 안전하다고 홍보한데다, 경제적 지원을 해주니 주민들한테 안전 불감증 같은 게 있었다. 하지만 후쿠시마 사고 이후 주민들 생각이 많이 돌아섰다. 그 사고를 보고도 원전이 안전하다고 찬성한다면, 오히려 그게 더 문제 아닌가?” 장 의원이 촛불을 드는 이유다.
그렇다고 지난 1년 동안 지는 싸움만 한 건 아니다. 울진군청에서 근무하는 상용직·무기계약 노동자들에게 1년에 75만원에 이르는 공무원 복지 포인트(맞춤형 복지비)를 찾아줬다. 법적으로는 이들도 복지 포인트를 받을 수 있지만, 군청은 별 근거 없이 지급하지 않았다. 장 의원은 관련 법규와 다른 지역의 사례를 들어 따졌고, 군청은 올해부터 이들의 권리를 존중하기 시작했다. 장 의원은 앞으로 할 일이 더 많다. 어린이 도서관 짓기, 아동극 공연 유치 등 교육 관련 정책과 비정규직 문제 개선이 그의 목표다.
진보개혁 진영의 끈기
재선인 윤병국 부천시의원(민주당)은 지난 5년 동안 매주 월요일 아침 ‘이메일 의정보고’를 쓴다. 시의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무슨 일을 하는지, 주요 현안이 무엇이고 자신의 생각은 무엇인지 등을 꼬박꼬박 써서 지지자와 주민들에게 전자우편을 보내고, 자신의 블로그에도 올린다. 귀찮을 법도 한 이 일을 계속하는 까닭은 시민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자신의 활동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싶어서다. 또한 “이렇게 생각을 공개해버리면 (태도를 바꾸라는)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타협하지 않을 방패가 되기도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1등 봉사자’가 되려고 시의원 선거에 출마한 첫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그런 노력으로 이룬 결실 가운데 하나가 지난 5월25일 부천시의회를 통과한 ‘부천시 장애인 직업재활시설 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안’이다. 일은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천시는 73억원이 넘는 돈을 들여 장애인의 ‘재활작업장’을 만들고, 한 장애인단체에 운영을 맡겼다. 윤 의원은 이 시설이 장애인복지법의 ‘직업재활시설’에 해당되는데도, 시가 이를 ‘경기도 지침에 의한 재활작업장’으로 규정해 장애인 권익을 보호하지 못하고, 시 재정에도 큰 부담을 준다고 문제제기를 했다. 장애인복지법에 의한 시설로 신고하면 부천시는 분권교부세와 도비 등 매년 3억원을 지원받을 수 있는데도 당시 부천시장 등이 엉뚱한 일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윤 의원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시청·시의회 권력이 바뀌면서 ‘적법한’ 장애인 시설 운영이 가능해졌다.
시의회의 무게추가 한나라당에서 민주당으로 옮아갔다고 해서 박수칠 일만 생기는 건 아니다. 부천시에선 지난해 지방선거 직전 대표적 관변단체인 새마을운동중앙회 지부를 지원하는 조례가 통과됐다. 그런데 선거 뒤 자유총연맹, 바르게살기협의회, 자연보호협의회 등 다른 관변단체들도 덩달아 지원 조례를 요구했고, 일부 의원이 이에 응해 조례안이 발의됐다. 관변단체 지원 조례는, 기초단체장·기초의원들이 지역의 조직표를 의식해 세금을 낭비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이 때문에 윤병국 의원은 본회의에서 새로 발의된 관변단체 지원 조례안 반대토론을 벌였고, 한혜경 국민참여당 시의원은 이미 제정된 새마을운동 지원 조례 폐지안을 발의하며 연대 전선을 펼쳤다. 하지만 민주당 14석, 한나라당 12석, 민주노동당 2석, 국민참여당 1석으로 구성된 의회에서 이런 조례에 반대한 사람은 이들을 포함해 7명에 불과했다. 민주당 시의원의 절대다수가 한나라당과 같은 선택을 한 것이다. 윤 의원은 “진보개혁 정당 소속이 늘었다고 해도, 민주당 의원들의 스펙트럼이 워낙 다양해 생각대로 일이 쉽게 진행되지 않는다. 쟁점 사안마다 덜컥덜컥한다”고 안타까워했다.
민주노동당 소속인 홍미라 하남시의회 의장은 지난해 11월16~19일 시정 질문 기간에 저녁 7시부터 야간 회의를 열어 전국적인 주목을 끌었다. 직장인들이 퇴근 뒤 회의를 방청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시의원들도, 시청 공무원들도 피곤했지만 보람은 있었다. 늘 텅 비어 있다시피 했던 방청석엔 하루 20~30명씩 찾아왔고, “단체에 그렇게 오래 있었어도 방청은 처음”이라는 지역단체 활동가도 있었다. 일부 언론에선 “전기료, 야간수당 등을 고려하면 낭비”라고 비판했지만, 홍 의원 생각은 좀 다르다. “주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새로운 방법으로 생활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만드는 것만큼 나은 자치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올가을 시정 질문 때도 야간 회의를 진행할 계획이다. 다만 하루이틀 정도로 야간 회의 기간을 줄여 쟁점이 될 만한 큰 이슈만 집중적으로 다뤄 주민의 관심을 끌어들이면서 공무원도 배려할 생각이다.
홍 의원은 최근 경기 하남시에 인사제도 개선과 관련한 건의안을 전달했다. 민주당 3명, 민주노동당 2명, 한나라당 2명으로 구성된 시의회 전원이 몇 달 동안 머리를 맞대 의견을 모았다. 핵심은 인사 기준과 일정을 예고해 인사 전후의 어수선함을 막고, 내부 통신망에 인사상담실을 만들어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게 하는 등 투명하고 합리적인 인사다. 고참들에게만 집중되는 성과상여금은 수당 등으로 돌려 직원들이 공평하게 받아 사기가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냈다. 인사권은 시장의 고유 권한이라 의견을 내는 게 조심스러웠지만, 주민을 위한 행정이 가능하려면 시 공무원이 최대한 만족할 만한 인사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추진한 일이다.
희망의 현실화, 관건은 주민 참여이들이 보여준 ‘희망’은 그저 가능성에 그칠 수도, 지방정치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도 있다. 관건은 이들을 질기고 건강한 풀뿌리로 만들 물과 거름, 곧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 아닐까.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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