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자(65)씨가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을 자랑한다. “이건 사흘 동안 찍은 거야. 이거 봐, 똑같은 장미라도 아침이 다르고 점심, 저녁이 또 달라. 이렇게 꽃 한 송이가 펴도 시시때때로 관찰하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 경기 안산시 선부2동 권씨의 집 앞엔 장미, 찔레꽃, 감나무 등이 자라는 정원이 있다. 동네 아이들은 이곳에서 꽃 이름과 색깔, 자라는 모양, 놀러온 나비와 풀벌레들을 지켜보며 이름을 지어주고 그림도 그려본다. 오가던 동네 사람들도 정원에 멈춰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권씨가 내온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떤다. 집 앞 작은 정원이 동네 사랑방 구실을 하는 셈이다. 선부2동엔 담터마을 정원, 장미마을 정원, 무화과 정원, 미래 정원 등의 이름을 단 작은 정원이 15곳 있다. 그래서 선부2동은 ‘정원 마을’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소통의 꽃 피운 안산 마을 정원 </font></font>
별명답게, 동네 한가운데에 있는 석수초등학교에도 마을 정원이 있다. 담장을 허문 자리에 꽃을 심고 의자를 놨다. 홍성문 교장은 “주민이 공유하는 공간이 별로 없는데, 학교가 주민에게 쉼터를 제공할 수 있어서 좋다. 예전엔 청소년들이 밤에 학교 담을 넘어 들어와 몰래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곤 했는데, 트인 공간이 되자 그런 일도 거의 사라졌다”고 말했다.
사실 이 동네는 안산의 대표적인 다가구·다세대 주택단지로, 근처 반월공단에서 일하는 30~40대 맞벌이 부부와 저소득층이 많다. 낮 시간에 혼자 집에 있는 아이도 많다. 당연히 집주인은 20%밖에 안 되고, 나머지 80%는 세입자다. 교육·여가·주차·문화 시설 등이 부족해 돈만 모이면 언제든 떠나고 싶어하는 마을이었다. 자연히 이웃에 누가 사는지, 마을에 무슨 일이 있는지 관심을 둘 이유도, 여유도 별로 없었다.
마을이 조금씩 달라진 건 안산 YMCA가 2006년 ‘별자리 도서관’이라는 마을 도서관을 이 동네에 열면서부터다. 오갈 데 없던 아이들과 노인들이 도서관에서 ‘놀기’ 시작했다. 도서관을 거점으로 주민들이 모이자 이 단체는 설명회를 열고 ‘마을 만들기 주민위원회’를 구성해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마을의 주인인 주민들이 공감하고 나서서 사업을 주도할 수 있어야 진짜 소통과 공동체 형성이 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40여 명이 모여 매주 한 차례씩 회의를 열어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논의했다. 쓰레기가 함부로 버려지는 주택 사이 담장을 허물고 정원을 만들기로 했다.
석수초등학교의 마을 정원은 2009년에 생겼다. 학교와 운영위원회, 학교 가꾸기 추진협의회가 마을 도서관 등의 제안을 받고 여러 차례 논의한 결과다. 처음엔 아이들 안전 문제 등을 우려해 반대하는 목소리가 더 컸지만, 결국 “안 해보고 부정적 생각부터 하지 말자. 일단 해보고 안 좋은 점은 고쳐나가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신현숙 학교 가꾸기 추진협의회장은 “어르신들은 아이들 노는 걸 보며 외로움을 달래고, 아이들은 마음껏 놀면서도 어른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자연스럽게 생활교육이 되는 것 같다. 학교에 마을 정원 만들기를 참 잘했다”고 말한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주민 참여 기반 넓힌 것이 큰 힘”</font></font>그 사이 마을 도서관은 ‘별자리 도서관’에서 ‘시립 석수골 작은 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고, 새 건물을 지어 이사했다. 마을 도서관은 ‘안산시 좋은마을 만들기 지원센터’ 등의 도움을 얻어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주민대학, 마을축제, 마을정원학교 등 각종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주민들이 함께 어우러지고, 마을에 관심을 더 갖게 하고, 아이들에게 학습과 놀이를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특히 마을정원학교엔 어린이, 학부모, 어르신 등이 함께 모여 논다. 정원에서 채집한 곤충이나 식물을 보관할 관찰 주머니를 만들고, 친환경 채소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접시나 그릇도 만든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하는 법을 배우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서 생동감을 느낀다. 6월8일 오후 작은 도서관에 모인 10여 명도 스스럼이 없었다. 이런 프로그램이 없었다면 그저 ‘낯선 사람’이었을 그들이다.
이렇게 마을을 바꿔낸 건 “주민들의 손으로 동네를 바꿔보자”고 제안한 안산 YMCA라는 시민단체, 이 단체의 제안에 관심을 갖고 참여한 주민, 주민들의 구심점이 된 ‘석수골 작은 도서관’이라는 세 박자가 맞아떨어진 덕분이다. 임은아 작은 도서관 관장은 “처음엔 시민단체 사람이 마을에 들어와 이리저리 휘젓고 다닌다며 안 좋게 생각하는 분이 적지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주민들이 이웃을 설득하고 주민회의·교육을 계속 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작은 도서관이 석수초등학교는 물론 준관변단체라고 비판받곤 하는 주민자치위원회와도 네트워크를 만들며 주민 참여 기반을 넓힌 것도 큰 힘이 됐다. 이젠 이 네트워크에 기반을 두고 ‘책 읽는 마을’이라는 주민 조직을 만드는 일을 계획하고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안산시 좋은마을 만들기 지원센터’다. 센터는 ‘안산시 좋은마을 만들기 지원 조례’에 근거를 두고 2008년 3월 설립됐다. 말 그대로 마을 가꾸기 사업을 돕고, 주민 교육을 한다. 지방자치의 힘은 자신이 사는 마을에 관심을 가지는 데서 나온다는 생각으로 오랫동안 마을 만들기 운동을 해온 안산 지역의 시민단체들이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안산시·시의회와 머리를 맞댄 끝에 만든 것이 이 센터와 조례다. 류홍번 안산 YMCA 사무총장은 “시장이 바뀌면 기존 마을 만들기 사업이 틀어지거나 왜곡되는 일이 잦아, 제도적으로 이 사업을 지원할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시민단체들이 의견을 모았다. 2006년 지방선거 때 각 후보들에게 매니페스토 공약으로 이 조례를 제안해 수용됐고, 그 결과 조례와 센터가 만들어져 마을 만들기 사업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말하자면, 비교적 쉬워 보이는 마을 만들기도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라 주민과 시민사회, 지방정부·지방의회가 오랜 시간 힘을 모아야 가능하다는 얘기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반년 만의 성과, 안양시 의정감시단</font></font>주민 참여 강도로 보면, 지방의회의 의정감시 활동은 ‘최고 난이도’에 속한다. 경기 안양시엔 ‘안양시민’ 이태희씨가 만든 의정감시단이 있다. 50년 넘게 살며 정치는 늘 남들이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업하느라 바빠 관심을 가질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지난해 지방선거 때 한 경기지사 후보 캠프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도지사 한 사람 바꾼다고 지역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닌 것 같다. 지역 행정을 감시하는 건 지역 의정인데 아무도 여기에 관심을 안 가진다. 의정을 잘 감시하면 의정은 물론 행정도 잘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처음엔 한 지역단체에 의정감시 활동을 해보라고 제안했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직접 나서보기로 했다.
오랜 의정감시 활동으로 유명한 서울 동작구의 풀뿌리 단체 ‘희망나눔동작네트워크’(희망동네)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다. 한 지역 신문에 찾아가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안양 시민이 주체가 돼 의정감시단을 꾸린다는 기사나 광고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이씨의 이야기를 들은 신문은 흔쾌히 기사를 냈고, 이를 본 지역단체와 시민들이 연락을 해왔다. 그렇게 지난해 11월 40여 명이 의정감시단으로 모였다. 희망동네는 이들에게 의정감시 노하우를 두 차례 ‘전수’해줬다.
예산안을 심사하는 지난해 12월 한 달 동안 의정감시단원 거의 대부분이 최소한 하루씩은 시의회 방청석에 앉아 모니터링을 했다. 출석과 이석을 체크하고, 발언을 꼼꼼히 기록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누가 내실 있는 의정 활동을 했는지 평가해 지난 1월엔 우수 시의원을 뽑았다. 올해는 주요 이슈를 다룬 회의 10여 차례를 모니터링했다. 어떤 단체에도 속하지 않은 ‘평범한 시민’이 참여 의지를 주변에 전하며 불과 1년도 안 돼 해낸 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다. 그래도 이씨는 아쉽다. “‘상시 감시’가 목표인데, 다들 직장이나 원래 속한 시민단체 일로 바빠 매일같이 시의회 모니터링을 하기는 어렵다. 안양 시민 60만 명 가운데 0.1%만 참여해도 정말 잘할 수 있는데…”라는 것이다. 의정감시단에 참여한 사람들이 낸 돈으로만 운영을 하는 터라 기자회견 한 번 하기도 빠듯하다. 하지만 이씨는 희망을 품고 있다. “나도 ‘내가 안 해도 누가 해주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직장에 월차를 내거나 결근을 하면서도 의정감시를 하겠다고 오는 분들을 보면 이 단체가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광주 지방의원들의 예결산 ‘자율학습’ </font></font>지방의원 스스로 주민의 참여를 확대하고, 시민사회와 함께하려는 노력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광주에선 지난해 당선된 지방의원 21명과 지역 단체 ‘시민이 만드는 밝은 세상’(밝은 세상)이 한 달에 두 차례씩 예결산에 관련된 공부를 한다. 지난해 12월 예산안 심의를 앞두고 초선 의원들이 개별적으로 밝은 세상에 도움을 요청했다. 몇 차례 강의를 듣는다고 한눈에 예산을 파악할 수 있다면, 그 많은 예산 전문가들은 필요 없을 터. 부족함을 느낀 의원들이 밝은 세상에 ‘심화학습’을 요구했고, 밝은 세상은 이런 의원들을 모아 모임을 꾸렸다.
서형원 경기 과천시 의원을 초청해 결산 관련 강의를 듣고, 다른 전문가들에겐 주민참여예산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시민사회와의 소통은 의정 활동에 큰 힘이 됐다. 2004년부터 주민참여예산 조례를 시행하고 있는 광주 북구에선 이 모임을 하며 주민참여결산제가 필요하다고 느낀 의원들이 조례를 개정했다. 광주 제2순환도로 민자 구간의 재정 보전 문제가 구체적으로 광주시의회에서 제기된 것도 ‘배움’ 덕분이었다.
이상석 밝은 세상 사무처장은 “중앙당은 지방 재정에 신경 못 쓰고, 도당이나 지역위원회는 국회의원들 뒤치다꺼리 하느라 바빠 지방의원들에게 예결산 교육을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의원들 스스로 좋은 예산·결산을 해보겠다고 시민사회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좋은 시도”라고 말했다.
제도적으로 지방자치의 수준을 높일 방법도 곳곳에서 시도된다. 경기 성남시의회는 올해 초 ‘성남시 사회복지관 설치 및 위탁운영에 관한 조례’ 등 시 업무의 민간 위탁과 관련한 조례 3개를 개정했다. 민간 위탁을 할 때 시의회의 동의를 받도록 해, 무분별한 민간 위탁을 막고 공정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의 민간 위탁은 그동안 불투명한 선정·운영 등의 문제를 일으켜 견제와 감시가 필요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지방자치단체장이 ‘고유 권한’으로 행사한 지방의회 사무국 인사권의 독립, 자치단체 산하 공기업이나 출연 재단 등의 인사 때 청문회 요구 등이 거세다. 사무국 직원의 임무는 지방자치단체를 견제·감시하는 시의회를 돕는 일이지만, 인사권을 가진 단체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라 제대로 일하기 어렵다. 산하단체는 자치단체장 선거를 도운 이들에게 ‘보은’을 해주는 자리로 인식돼왔다. 서울시의회는 지난 4월 인사권 독립, 인사청문회 도입과 지방의원 보좌 인력 도입 등을 핵심으로 한 ‘지방의회 발전을 위한 지방자치법 개정 촉구 건의안’을 의결해 국회와 정부에 제안했다. 안산시에선 시민단체들이 공기업 인사청문회 조례를 만들자고 시의회에 제안해둔 상황이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풀뿌리 활동 주민조직 갖춰야” </font></font>6·2 지방선거 이후 1년, 길게는 지방자치 역사 20년 동안 풀뿌리 정치는 자라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고, 썩어나간 부분도 있다. 하지만 지방자치의 처음도 끝도 주민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유호근 희망동네 사무국장의 말은 더욱 귀기울일 만하다. “의정감시는 직장 등 일상생활을 하는 일반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하기 어려워, 주민 참여는 마을 만들기를 통해 저변을 확대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쉽지 않다. 보수·지역주의 정당 활동을 하는 사람은 한 골목에 20명이지만, 진보정당 활동을 하는 사람은 한 동네에 20명, 풀뿌리 활동을 하는 사람은 구 한 곳에 20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풀뿌리 활동도 골목마다 주민조직을 갖춰 실질적인 ‘주민권력’이 돼야 현실 정치와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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