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와 만난 추억 고백? 빼도 박도 못할 곤혹스러운 요구 아닌가. 매개어 천사로 ‘수태고지’ 주제를 재현한 고전주의 회화-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회임 소식을 전하는 익숙한 도상- 를 고작 떠올릴 만큼 내 성정에는 비현실적 대상에 관한 한 관대함도 낭만도 없다. “천사를 그려줄 테니, 내 앞에 천사부터 데려오라”고 일갈한 화가 쿠르베의 원리적 사실주의에 가깝다면 지나칠까.
보은의 심정과는 연결되지 않는 ‘날개’그럼에도 현대 미국인의 절반 넘는 인구가 수호천사의 존재를 철석같이 믿는다는 여론조사(2008년 ) 앞에서 이들과 동시대 공기를 호흡해야 함을 풀어야 할 과제로 믿긴 한다. 비단 근본주의 개신교 국가에 한정된 문제 같진 않다. 기부 연예인에게 ‘선행 천사’란 애칭을 다는 항간의 분위기, 등짝에 인조 날개를 부착한 백색 원피스 차림 멤버들이 출연하는 소녀 아이돌 그룹 홍보물에 대중이 농락되는 한국 사정까지 고려하면.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에서 보듯, 어느덧 부담스러운 좌우대칭 날개(때로 백색 원피스 옵션) 달린 육감적 미소녀는 천사 이미지의 가시화된 클리셰가 되었고 그 권능도 지대하다. 절명의 위기를 넘긴 적이 있다. 하지만 그 경험마저 구급차를 불러준 이름 모를 행인, 병원까지 후송해준 구급대원, 지극정성 병간호한 친구, 격려의 안부를 건넨 지인을 향한 내 보은의 심정은 그들과 등 뒤로 인조 날개 부착한 클리셰를 도무지 연결짓지 못한다. 훼손된 천사 이미지를 보은의 상대에 덧씌울 심사가 생길 턱이 없다. 더구나 종교 색채가 깔린 천사라는 구시대 개념과 피구원자라는 당대적 실존자 사이의 관계가 종속적인 시혜주의로 묶인다면 더욱 난감한 일. 현재적 삶과 결합하되 구원이라는 낡은 개념에선 벗어난, 동시대 천사를 떠올릴 순 없을까? 하물며 천사를 꼭 동종(인류)에 한정할 이유가 뭘까 등등 회의주의 터널을 통과하자, 내 심장 깊숙이 웅크리고 있던 흰 개가 튀어나왔다. ‘흰 개’란 1990년대 초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15년 이상 함께 산 두 마리 개를 부르는 애칭이다(이름은 따로 있음). 군 복무 때 내 수첩 날개에 삽입된 사진도 흰 개였고, 개들이 세상을 뜬 뒤 거실 벽면에 부착한 사진도 출력된 흰 개였고, 노트북 바탕화면도 흰 개의 생전 모습을 깔아뒀다(이쯤 되면 신앙인가!). 이 정도의 천사 요건을 늘어놓으면 대번 ‘마냥 곁에 있어 좋아서 천사면, 애인도 살붙이(아기)도 마찬가지로 천사네?’ 하고 되물을 게 분명하다. 누가 뭐랬나. ‘마찬가지다’가 내 답변이다.
‘내 맘속에 영원히’ 같은 클리셰의 대상천사(angel)의 어원이 신의 뜻을 알리는 ‘전령’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왔단 얘긴 들었다. 어원마저 고대적 관념주의가 투영되었으나 그건 수용하도록 하자. 그렇지만 나 같은 무신앙자가 유대교 천사 목록표에서 흰 개에 어울릴 배역의 천사를 찾을 수 있을까? 찾아보니 있더라. 치유 능력을 발휘한다는 천사 ‘라파엘’이다. 세간의 믿음과는 달리 인간을 향한 개의 이타성은 인간 본성을 역이용하는 개의 약삭빠른 계산이 만든 환상이라 한다. 이 때문에 동물행동학에선 개를 ‘사회적 기생동물’로 보고 인류에게 생물학적 순(純)부담을 안긴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펼친 과학자(스티븐 부디안스키)마저 “개의 두 눈을 들여다보노라면, ‘조건 없는 사랑’을 노래한 그 어떤 시나 소설보다도 더 소중하다”고 고백한다. 감정 교류와 치유 능력이 높다. 흰 개가 나를 어떻게 치유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순 없다. 마흔 나이의 나를 동심으로 퇴행시키는 동력인 점, ‘내 맘속에 영원히’ 같은 클리셰의 대상인 점에서 천사와 같다. 내 눈앞에 나타난 대상이 검은 개여도,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 길고양이여도, 이모티콘으로 어설프게 조합한 포유동물의 이목구비여도, 애증이 교차하는 앙증맞은 애인이어도, 천사의 주문에 단단히 걸린 내 입은 동일한 탄성을 토해낸다. ‘흰 개다~!’ 지경이 이러니 흰 개는 나의 천사.
반이정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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