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도 변화시킨다는 세월이지만, 10년이란 시간성의 한계 역시 명확하다. 시인 김수영은 썼다. “10년이란 한 사람이 준 상처를 다스리기에는 너무나 짧은 세월이다.”(‘누이야 장하고나’) 하물며 한 사람이 아닌, 집단과 시대가 남긴 고통을 치유하는 데 10년의 세월은 얼마나 짧고, 또 무력한가. 그 10년이 두 번 흘러 20년이 됐다. 그사이 스무 살 청년들은 삼십대를 관통해 마흔 줄에 접어들었고, 1991년 5월(이하 91년 5월)의 죽음과 사건들도 한 시절의 미망으로 색인화된 채, 저마다의 기억 속에서 속절없이 좀이 슬고 있다.
’트라우마’에 대한 개인적 억압
‘91년 5월’은 1990년대 최대의 대중투쟁을 일컫는 고유명사다. 하지만 사람들은 91년 5월을 공개적으로 입에 올리는 것을 오랫동안 저어해왔다. 사건의 현장에 몸을 던졌던 당사자들조차 그랬다. 사건이 남긴 상처와 후유증이 너무도 컸던 탓이다. 91년 4월26일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의 사망으로 촉발돼 투쟁 지도부가 명동성당에서 철수하는 6월29일까지 60여 일에 걸쳐 전개된 전국적 대중투쟁이었지만, 사건에 대한 조명은 10돌을 맞은 2001년에야 한 차례 이뤄졌을 뿐, 변변한 기념 행위나 학문적 탐색 없이 20년을 맞았다. 이는 87년 6월은 물론 2008년 촛불과도 대조적인, 91년 5월의 슬픈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왜 91년 5월을 떠올리길 주저하는가. 누군가는 짙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죽음의 이미지가 주조를 이루기는 1980년 5월도 마찬가지다. 차이는 91년 5월을 지배한 죽음의 형식이다. 자살, 그것도 자기 몸을 불사르는 분신 자살이었다. 분신에 대한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해석은 이렇다. “변화를 추구하는 강력한 열망에도, 지배권력의 압도적 폭력성으로 인해 이를 실현할 수단을 갖지 못할 때, 약자가 최대한의 도덕적 힘을 발휘한 가장 치열한 무기다.”
하지만 박승희에서 시작해 김영균·천세용·김기설·윤용하 등으로 이어진 11명의 연쇄 분신은 투쟁을 ‘무겁고 지루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만들기도 했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형태의 저항을 유발한 것이 국가폭력의 야만성인지, 맞서 싸우던 세력의 ‘생명 불감’인지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에 실린 김지하의 시론 ‘죽음의 굿판…’은 바로 이 약한 고리를 치고 들어왔고, 당황한 운동세력은 허둥댔다.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 간부였던 소설가 김별아는 기록한다. “싸우는 사람들이 싸움 자체를 지겨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놓칠 리가 없다. …죽음의 의미는 50여 일의 짧고도 긴 시간 속에서 확대되거나 축소되거나 심지어 비틀어져 훼손됐다. 사람들은 서서히 진저리를 쳤다. 싸움의 목표나 대안에 대한 고민보다는 언제쯤 이 불가해한 죽음의 투쟁이 끝날 것인가를 궁금해했다.”()
연이은 분신과 죽음에도 투쟁이 처절한 패배로 막을 내렸을 때, ‘살아남은 자들’의 자괴감은 극대화됐다. 씻을 수 없는 절망과 죄책감 앞에서 범속한 개인들의 1차적 반응은 회피와 망각이었다. 여기에 5월 투쟁의 실패에 결정적 구실을 한 ‘유서 대필(조작)’과 ‘정원식 총리 폭행’ 사건은 운동 진영 전체에 심각한 도덕적 타격을 입혔고, 대부분의 91년 참여자들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으로 남았다. 이런 점에서 망각은 5월 투쟁이란 트라우마에 대한 개인적·사회적 억압의 결과물이었다.
정치·시민사회 대규모 지각변동그러나 5월 투쟁을 침묵의 늪 속에 수장시키기엔 그 ‘역사적 부력’이 간단치 않다. 무엇보다 한국 현대사에서 나타난 ‘마지막 기동전의 시도’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투쟁은 단순히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다. 투쟁 지도부인 ‘범국민대책회의’가 여전히 ‘공안통치 종식’이란 최대 다수 슬로건에 매여 있던 시기, 운동세력 일각에선 ‘임시민주정부’ ‘임시혁명정부’ 같은 급진적 구호를 내걸고 목표 수위를 ‘대체 권력’ 요구로까지 끌어올리려 했다.
91년 5월은 한국의 사회운동사상 가장 조직화된 대중에 근거를 두고 벌어진 투쟁이었다. 2008년 촛불은 물론, 91년이 복제하려 했던 87년 6월과 비교해도 참여대중의 조직화 수준은 압도적이었다. 거기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있었고,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등 1987년 이후 결성된 전국 단위 대중·부문 조직들이 견고하게 대오를 지탱했다. 그들은 강경대 사망 다음날인 4월27일 범국민대책회의로 신속하게 결집했고, 조직의 동원 능력은 87년 ‘국민운동본부’를 능가했다. 5월4일 전국 21개 지역에서 열린 ‘백골단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 궐기대회’에 20만 명, 5월9일 87개 지역에서 열린 ‘민자당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회’가 55만 명, 5월18일 강경대 장례식에 81개 지역 40만여 명이 참여한 데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기동전의 시대’인 1980년대와 ‘진지전의 시대’인 90년대를 분기하는 결절점이기도 했다. 성당으로 도피한 지도부의 고립으로 거칠었던 싸움판의 호흡이 잦아들고, 개혁진영의 6월 광역의원선거 참패로 ‘열사들’이 확인사살당하고, 7월의 폭염과 함께 소비에트 제국의 부고장이 날아들었을 때, 1980년 광주의 순교자들이 열어젖힌 한국의 1980년대는 비로소 하나의 순환을 마무리했다. 운동 진영을 휩쓴 것은 “운명과 싸우는 짓은 순간의 환희와 평생의 상처라는”(시인 김중식) 돌연한 깨달음이었다. 1년 뒤 가수 정태춘은 노래했다.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92년 장마 종로에서’) 이후 91년 5월과 같은 급진적 거리정치는 재연되지 않았다. 2008년 촛불 역시 91년 5월이 아닌, 87년 6월을 욕망했다.
91년 5월은 한국의 정치·시민사회에 대규모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그해 5월을 끝으로 1970년대 이후 ‘정치사회 외부의 정치세력’으로 남아 있던 ‘재야’는 사실상 소멸했다. 그해 말 이른바 ‘상설 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 결성되지만, 정치사회에 대한 영향력은 미미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전국연합은 김대중의 신민당과의 정책 연합을 성사시켰지만, 한국의 야당사는 이를 ‘정치 9단’ 김대중의 결정적 패착으로 기록할 뿐이다.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대두재야 못잖게 타격을 입은 쪽은 학생운동이었다. 학생운동은 1987년 이전 “진정한 의미의 야당이자, 민주화운동의 보병부대”(최장집)로 사회운동의 가장 강력한 헤게모니 세력이었다. 정치사회와 시민사회가 철저하게 억압돼 있던 반공규율 사회에서, 학생집단이 가진 높은 신뢰도와 압도적인 동원 능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학생운동은 91년 5월을 거치며 세력이 약화되다 1996년 연세대 사태로 재기 불능 상태에 빠진다.
재야와 학생운동의 빈자리를 메운 것은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었다. 1989년 공안 정국과 91년 5월을 거치며 위축된 노동운동은 1995년 민주노총을 조직하고 97년 노동법 개정투쟁을 통해 재기에 성공하며 사회운동의 주력부대로 떠올랐다. 1980년대 말부터 등장한 시민운동 역시 개혁적 중산층의 지지를 업고 노동운동과 함께 사회운동을 양분했다. 이들은 부동산, 소액주주, 환경, 여성, 소수자 인권 등 당시의 사회운동이 다루지 않던 다양한 현안을 쟁점화하는 데 성공하며 2000년대 들어 한국 사회의 최대 ‘파워 블록‘을 형성했다.
물론 91년 5월이 운동 진영에 상처만 남긴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국가권력의 변화(획득)를 지향하는 한편, 중앙집중적이고 때로는 군사주의적이면서, 대규모 거리투쟁에 모든 것을 건 1980년대식 운동을 극한으로 밀고 나간 투쟁이었다. 이런 점에서 “(5월 투쟁의 실패는) 기존 사회운동에 대한 내재적 비판의 계기였으며, 새로운 사회운동을 모색하는 모태로 작용했다”는 게 김정한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의 진단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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