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006699">‘6공화국 최대의 대중투쟁’으로 일컫는 1991년 5월 투쟁 20년을 맞아, 당시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1970년대산(産)’ 4명의 방담을 마련했다. 1991년 5월은 우리에게 무엇이었고, 그해의 유산들은 20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2011년 한국 사회에 어떤 형태로 현재화되고 있는지에 대해 3시간 가까이 뜨겁고 진지하고 솔직하지만, 참을 수 없이 산만한 이야기가 오갔다. 지난 4월19일 저녁 서울 서대문의 인문과학서점 ‘레드북스’에서 시작된 1970년대산들의 대화는 심야의 인사동 뒤풀이까지 이어졌다. 우연히 합석한 40대 후반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율사는 “1991년 5월 투쟁이 뭐냐”고 되물었고, 50줄의 영화인은 “니들에게도 후일담 같은 게 있느냐”고 조소했지만, 방담자들은 의연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우리, 꼰대로는 살지 말자.” _편집자</font>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font color="#1153A4"><font size="4">참석자</font></font>
강상구(진보신당 대변인, 1971년생)
김선우(시인·소설가, 1970년생)
김재엽(연출가·교수, 1973년생)
신윤동욱( 편집기획팀장, 1972년생)</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font color="#991900">신윤동욱(이하 동욱): </font>김재엽 교수가 1991년 5월의 후일담인 를 연극 무대에 올렸지? 근데 주인공 이름이 (김)현식, (유)재하, (김)광석이더라. 빵 터졌다.
<font color="#017918">김선우(이하 선우)</font> : 요즘 좋아하는 가수는?
<font color="#A341B1">김재엽(이하 재엽)</font> : 루시드폴, 이적.
<font color="#638F03">강상구(이하 상구) </font>: 좋아하는 가수도 없고, 시나 소설도 안 읽는 난 뭐지? ‘91년 트라우마’인가?
<font color="#991900">동욱:</font> 본인의 태만을 탓할 일이지.
<font color="#017918">선우: </font>그러게. 90, 91학번들. (대중)문화에 열광했던 첫 세대 아닌가?
1980년대에 잔류하다<font color="#638F03">상구:</font> 난 일만 했다. 진짜로. 당에 들어오기 전에는 다른 일, 당에 와서는 당 일만.
<font color="#991900"> 동욱:</font> 우리 세대야말로 운 좋은 세대 아닐까? 선배들과 정치·노동운동을 얘기하다가 어린 세대와는 가수·영화 얘기를 할 수 있고. 일종의 ‘양다리 걸치기’가 가능하다. 사실 1991년은 내게 지우고 싶은 것, 트라우마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인권·소수자 문제 전문기자로서 상업적 성공을 가져다준 도약의 계기이기도 했다. (일동 야유)
<font color="#638F03">상구:</font> 나한텐 트라우마다. 강경대가 죽은 날이 4월26일이다. 다음날이 토요일이었는데, 아침에 선배랑 테니스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선배가 파김치가 돼 약속 장소로 나왔다. 물었더니 전날 명지대에서 1학년 학생이 경찰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다는 거다. 멍해지더라. 월요일부터 집회 현장으로 등교했다. 그 뒤 3년은 꽃 피고 낙엽 지는 걸 모르고 살았다.
<font color="#991900">동욱:</font> 갑자기 부끄러워지네.
<font color="#638F03">상구:</font> 1991년 5월, 나는 별 고민 없이 막차를 타버렸던 거다.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현장’ 생각만 했다. 노동운동에 대한 선망과 경외감이 나를 움직였다.
<font color="#017918">선우:</font> 91학번인데도 정서가 나랑 비슷했네.
<font color="#638F03">상구:</font> 막차를 탔으니까. 1980년대발 막차. 함께 운동했던 학과 동기가 20명쯤 있었다. 그런데 92, 93년을 거치며 다 이탈했다. 그들은 90년대로 떠나버리고, 나는 80년대에 잔류해버린 거다.
<font color="#991900"> 동욱: </font>유기당한 거지.
<font size="3"> <font color="#003366">“나한텐 트라우마다. 강경대가 죽은 날이 4월26일이다. 다음날이 토요일이었는데, 아침에 선배랑 테니스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선배가 파김치가 돼 약속 장소로 나왔다. 물었더니 전날 명지대에서 1학년 학생이 경찰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다는 거다. 멍해지더라. 월요일부터 집회 현장으로 등교했다. 그 뒤 3년은 꽃 피고 낙엽 지는 걸 모르고 살았다.” </font></font>
<font color="#638F03">상구:</font> 어쨌든 ‘노동운동’ ‘현장’ 이런 단어들에 꽂혀 30대 문턱을 넘어설 때까지 정신없이 헤맸다. 미치도록 현장에 가고 싶은데, 그쪽에서 기별이 안 오는 거다. 그러다 해고노동자 단체에 들어갔다. 그런데 해고자들은 노는데, 일은 나만 하는 것 같고, 고민되더라. 아, 이건 쓰지 마라. 정치하는 데 지장 있다. 아무튼 여기저기 전전하다 33살이 됐다. 고민 끝에 인천 남동공단을 갔다. 노동자가 되려고. 그날 무지 추웠다. 공장 담벼락을 따라 걷는데, 왜 그리 외로움이 사무치던지.
<font color="#017918">선우:</font>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스토리구먼.
1991년, 죽음에서 삶을 길어올리다
<font color="#638F03">상구:</font> 구인광고를 샅샅이 훑는데, 들어갈 수 있는 데가 눈 씻고 봐도 없는 거다. 결국 공단 취업게시판 앞에서 펑펑 울었다. ‘에이~ 씨, 나 안 해’ 하면서. 그러고선 정당 활동을 시작했다.
<font color="#017918">선우:</font> 그쪽으로 계속 가야 한다는 생각은 대체 왜?
<font color="#638F03">상구: </font>1992년쯤인가? 여의도에서 노동단체 연대집회가 있었다. 대형 깃발들이 좍좍 휘날리고, 비장하고 질서정연한 노동자들의 대오에 소름이 돋았다. ‘아, 이거다. 여기 줄 서야겠다.’
<font color="#017918">선우: </font>난 1988년 대학에 간 경우라 80년대 정서가 강한 편이다. 세상은 선한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믿던 문학소녀가, 캠퍼스에 전시된 광주 사진을 보고 무너져버렸다. 이렇게 야만적인 참상이 일어난 사실조차 몰랐다는 지독한 수치심에 사로잡혔다. 그 뒤 ‘극렬 좌경 학생’이 됐다. 사범대생으로 전교조 지원 활동을 하고, 비합법 상부조직 오더를 받아 운동권 문학동아리 만들고. 후배들 지도하며 투쟁시 쓰고, 거리시위 나가고. 그 생활이 4학년까지 갔다. 그래도 좋았다. 열정과 열망이 워낙 뜨거웠으니까.
<font color="#638F03">상구: </font>타고난 조직가였네.
<font color="#017918"> 선우: </font>그러다 4학년 봄, 강경대가 죽었다. 내 입장에서 그 또래 신입생들 보면 ‘풋풋한 것들, 저걸 어떻게 꼬드겨 빨간 물 들이나’ 하는 생각이 앞설 때인데, 그런 아이가 백주대낮에 맞아 죽은 거다. 춘천과 서울을 오가며 피 터지게 싸웠다. 그런데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가며 길고 긴 투쟁이 이어졌지만, 중간층은 외면하고 언론은 매도했다. 출구가 없다는 느낌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해 여름 소련이 붕괴됐다. 패닉이었다. 그로부터 3~4년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들려온 풍문은 온통 ‘그도 투항했어, 누구도 변절했어’였다. 배신감이 컸고 혁명에 대한 꿈마저 산산이 부서져버린 상황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심각하게 죽음을 고민했다. 그러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font color="#991900">동욱:</font> 자기치유의 일환으로 시를 쓴 거네?
<font color="#017918"> 선우:</font> 대학 생활 하며 한 번도 등단 같은 걸 생각해본 적 없는 내가, 운동에 복무하는 시가 아닌, 그냥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다. 첫 시집을 낼 때(2000년)쯤에야 ‘문학을 통해 이 사회와 긍정적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1991년은 내게 절망의 시작이자, 궁극적으로는 죽지 않고 살아내기, 내 삶을 새롭게 출발시켜야 하는 밑바닥 시기를 열어줬다.
<font size="3"><font color="#A341B1">“세상은 선한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믿던 문학소녀가, 캠퍼스에 전시된 광주 사진을 보고 무너져버렸다. 그 뒤 ‘극렬 좌경학생’이 됐다. 운동권 문학동아리 만들고, 후배들 지도하며 투쟁시 쓰고, 거리시위 나가고. 그 생활이 4학년까지 갔다. 그래도 좋았다. 열정과 열망이 워낙 뜨거웠으니까.”</font></font>
혁명적 상황의 허망한 소멸
<font color="#A341B1">재엽: </font>1991년 5월에 나는 고3이었다. 흉흉한 소문이 들려왔다. 운동권 대학생들이 제비뽑기를 해서 분신할 사람을 정한다는 거였다.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다음해 대학에 입학했다. 자연스럽게 학생회 활동에 발을 들였다. 강경대 1주기라고 명지대도 갔다. 바로 윗선배인 91학번들과 친해졌다. 그들에게서 91년 얘기를 생생히 전해들었다. 형들이 그랬다. 자신들은 1991년 5월을 87년 6월처럼 생각했다고, 누구는 임시혁명정부 같은, 대체권력의 형태까지 고민했다고.
<font color="#017918">선우: </font>(강상구를 보며) 정말로 그렇게 봤어?
<font color="#638F03">상구:</font> 글쎄, 수뇌부가 아니다 보니.
<font color="#A341B1">재엽:</font> 어쨌든 혁명적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이 허망하게 종료되고, 여름이 오니 소련이 망하고, 겨울엔 가수 김현식이 죽어버렸다는 그들의 경험이 굉장히 드라마틱하게 느껴졌다. 뭔가 실질적이고 비장한 체험을 하고 싶었다. 닥치는 대로 집회 현장을 쫓아다녔다. 범민족대회도 가고, 지하철 파업 지지집회도 가고. 그런데 항상 해프닝처럼 끝나버리는 거다. 화염병에 불을 붙여 차도로 나갔는데, 전경은 안 보이고, 버스 기사한테 욕 먹고, 이어진 술자리에선 형들끼리 싸우고. 결국 문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문화 관련서와 계간지가 마구 쏟아지던 시절이니까. 연극 모임도 시작했다. 학생회는 되지 않는 계몽을 억지로 시도한다는 느낌이었다.
<font color="#991900">동욱:</font> 난 1991년을 ‘한국이 세계사의 시간에 비로소 맞춰진 시기’로 보고 싶다. 87년 민주화의 영광과 91년의 좌절을 맛보고 동구권의 몰락을 목격하며, 운동세력의 의식과 패턴이 세계사적 시간과 조응하는 형태로 최종적으로 완성된 게 그즈음이었다.
<font color="#017918">선우:</font> 훌륭한 분석이다. 사실 그 전까지 우리는 ‘섬’에 살고 있었던 거지. 그러다 1991년을 겪으며 간신히 세계 시각에 맞춘 거다. 매우 압축적으로.
<font color="#991900">동욱:</font> 달리 말하면,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이 자본주의임을 현실적으로 느끼게 된 거고.
<font color="#017918">선우: </font>체제의 견고한 벽을 뚫고 나가는 게 거대 담론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실감한 거지. 문화 속으로, 세포 속으로, 감수성 속으로 들어가야 가능함을 알게 된 시즌이었다고 할까.
<font color="#638F03">상구:</font> 난 한국 사회가 세계사의 시간을 따라잡은 건 1991년이 아니라 97년이라고 생각한다. 외환위기를 겪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완벽하게 노출되면서. 직전까지 전투적 노동운동은 한물간 것처럼 느껴지고, 소프트한 운동이 대세인 것처럼 여겨졌는데, 97년이 되자 상황이 반전한 거다. 결기가 생기더라. ‘거봐, 자본주의잖아. 다시 싸워야지.’
‘진보적 사회 진출’에 대한 고민<font color="#991900">동욱: </font>그러면서 진보정당이 생겼지?
<font color="#638F03">상구:</font> 하지만 난 여전히 ‘현장’에 대한 강박에 매여 있었고, 거기에 투신하지 못한다는 스트레스가 최근까지 이어졌다. 그게 올해 풀렸다. 구로 지역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다. 동네에 와서 보니 대부분의 주민이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학교급식조리원, 주차관리원, 요양보호사, 장애인활동보조인. 이분들을 만나 조직화하는 일을 하다 보니, ‘내가 갈구하던 현장이 이곳이구나’라는 깨달음이 오더라. 하루하루가 즐겁다. 최근엔 민주노총 일반노조에도 가입했다. 현장 조합원이 된 거다. 비로소 응어리가 풀렸다. 20년 만에.
<font color="#991900"> 동욱: </font>복 받은 거다. 열심히 한길을 걸어와서. 사실 선배들은 우리더러 ‘데모 신동’이라고 불렀다. 대학 입학 전 이미 전교조 사태를 겪으며 집회·시위 경험을 축적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운동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 대신 ‘진보적 사회 진출’이라고, 나쁘게 말하면 알리바이고, 좋게 말하면 ‘이 마음 변치 않고 착하게 살겠다’는 거, 이런 걸 고민했다.
<font color="#638F03"> 상구:</font> 3학년이 되자, 운동하던 친구들 20명이 모여 회의를 했다. 진보적 사회 진출 얘기를 한 거다. 그날 결의가 이랬다. ‘2명은 남고, 18명은 고시 공부한다. 단 함께 공부해서 최대한 빨리 합격해 좋은 일 하자.’ 나는 2명의 잔류자 가운데 하나였다. 어쨌든 독한 운동권들이라 고시도 빨리 붙더라. 의식화 학습하듯 프로그램 짜서 속성으로 돌린 거다.
<font color="#017918">선우:</font> 그 친구들 지금 잘 사나?
<font size="3"><font color="#991900">“1991년은 유독 죽음이 많은 시기였다. 엄밀히 말하면, 마이너리티들의 죽음이었다. 당시 나는 이들의 죽음이 나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찾으려 했다. 2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많은 죽음을 목격한다. 용산, 쌍용차, 카이스트…. 이 죽음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소화해야 하나. 안을 것인지, 업을 것인지, 피할 것인지, 그 고민이 나를 다시 1991년으로 돌아가게 만든다.”</font></font>
<font color="#638F03">상구:</font> 판검사, 변호사로 잘나간다. 돈도 많이 벌고. 연락이 끊겼다 최근 다시 만났는데, 나한테 무지 잘해준다. 미안하니까. 물론 386세대들처럼 정치하는 친구한테, 용돈 주고 후원금 주고, 이런 건 없다. 나도 그걸 원치 않고. 사실 그 친구들끼리 하는 얘길 들어보면, 나와 부딪힐 만한 일을 많이 한다. 로펌에서 기업소송도 하고. 그래도 호주머니에 100원짜리 동전 몇 개 짤랑거리듯, 91년이 조금씩 남아 있다.
<font color="#017918">선우:</font> 같이 운동했던 내 친구들은 보통 학력에, 한국 사회의 고질병들에서 얼마간 자유로운, 비특권계층이다. 그런데 저마다 인생들을 개척하고 있다. 누구는 생협일 하고, 누구는 귀농해서 자급자족하는 삶을 실험하고. 수위는 낮아졌지만, 운동이 다양한 방식으로 확산되는 거다. 2008년 촛불의 아름다운 현장에 그들이 있었다. 적은 여전히 강하지만 굉장히 유연하고 집요하게 그들을 타격하는 방법을 익혀왔던 거다.
20대의 고통에 무감한 기성세대라는 반성<font color="#A341B1">재엽:</font> 학생회 활동을 접을 즈음, 선배와 친구들이 그랬다. “너는 하고 싶은 일만 하려고 한다.” 나는 운동도 자신의 욕망을 숨기거나 억누르며 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극회 활동을 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단원들한테도 말한다. 잘하려고 스트레스 받지 마라. 극을 통해 그냥 하고 싶은 얘길 하면 된다. 이게 다 1990년대 대학 생활을 하며 문화적으로 솔직해진 덕이다. 이런 점에서 촛불집회는 정말 반가웠다. 무엇보다 거긴 깃발이 없었다.
<font color="#017918">선우:</font> 욕망에 솔직하며 공동체의 성원으로 어떤 기여를 할지 자신의 수준에 맞춰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 1991년 이후에 나타난 거다. 그런데 기성세대는 너무 딱딱하다.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강상구를 보며), 자기들이 쏟아내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의문이다. 계몽의 다른 형태다.
<font color="#638F03"> 상구: </font>나도 모르고 하는 말 많다.
<font color="#017918"> 선우:</font> 이 각성한 개인들이 어떤 계기를 만나 무서운 폭발력을 발휘하는 때가 올 거라고 본다.
<font color="#991900">동욱: </font>김선우 주변은 죄다 훌륭한 사람들 같다. 강상구 언저리와는 다르게.
<font color="#017918">선우:</font> 상처 주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 1980년대 운동했던 선배들인데, 이런 식이다. “네가 전태일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노동자로 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네가 노동자의 삶에 대해 뭘 알아?” 그런데 전태일처럼 사는 사람만 전태일을 입에 올릴 수 있나? 내게 전태일은 ‘인간의 품위가 어떻게 완성되는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텍스트다. 근데 뭐? 네가 전태일을 아냐고? 이런 태도 안 바꾸면, 아무리 진보적 제스처를 취하는 곳에 있어도 구린내 나는 꼰대밖에 안 된다.
<font color="#638F03"> 상구:</font> 아프지만 인정한다.
<font color="#A341B1">재엽:</font> 라는 공연을 올리며 관객과 20대 문제를 두고 많은 얘길 했다. 놀란 것은, 대학 다니며 진 빚을 갚기 위해 30대를 온전히 바쳐야 하는 그들의 처지였다.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젊다고 생각하고, 발랄한 30대의 감성으로 살아온 나 역시 20대가 겪는 불안과 고통에 무감한 기성세대의 일원이었구나, 하는 자괴감.
<font color="#017918"> 선우: </font>놀라워라. 뛰어난 자기성찰력.
변화된 젊음, 변증법의 핵심<font color="#991900">동욱:</font> 일부에 한정되지만, 386세대는 30대 후반, 40대 초반에 정권을 만들고 국정에 참여하는 경험까지 했다. 우리 세대는 그런 경험이 없다. 그러면서 아직 젊은 감각을 지닌 세대라는 이유로, 다음 세대의 고통에 무감하거나 책임감을 덜 느끼는 경향이 있다.
<font size="3"><font color="#1153A4">“난 1991년을 ‘한국이 세계사의 시간에 비로소 맞춰진 시기’로 보고 싶다. 1987년 민주화의 영광과 91년의 좌절을 맛보고 동구권의 몰락을 겪으며, 운동세력의 의식과 패턴이 세계사적 시간과 조응하는 형태로 최종 완성된 게 그즈음이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이 자본주의임을 현실적으로 느끼게 된 거고.”</font></font>
<font color="#017918"> 선우: </font>내 생각은 좀 다르다. 평범한 생활인들도 액션은 취하지 못하지만, 다음 세대의 곤궁함에 미안함과 부채감은 가졌다. 지금 아이들, 극한까지 왔다. 상황만으론 절망적이지만, 역사를 보면 인간은 절망에 부딪치면 살기 위해 패러다임을 쪼개고 스스로 변형해왔다. 거기에 희망을 걸고 싶다. 변화의 조짐도 보인다. 복닥거리고 주는 것 없는 서울을 떠나, 고향에서 소나 한번 멋지게 키워보겠다, 비닐하우스에서 상추 키우며 록음악을 하겠다. 이런 생각 가진 친구가 많아지고 있다.
<font color="#A341B1">재엽:</font> 꼰대처럼 계몽하려 들지 않으면 요즘 20대들도 얘기는 잘 통하는 편이다. 아쉬운 건 이들에겐 공동체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거다. 우리야 학교 다닐 때 학회다, 동아리다, 충분히 경험했다. 그러니 꼰대들한테 답 얻을 생각도 없었다. 우리끼리 얘기하고, 우리 안에서 멘토를 찾곤 했으니까. 근데 이 친구들은 엠티를 가도 교수들이 함께 안 가면 굉장히 서운해한다. 자기들 안에 멘토가 없으니까.
<font color="#991900"> 동욱: </font>지도하는 ‘김선우들’이 없어진 거지.
<font color="#A341B1">재엽:</font> 학부제로 자치공동체 같은 게 다 찢겨버린 상태에서, 상대평가가 보편화되니 대안을 꿈꾸는 상상력 같은 걸 키우기 어렵다.
<font color="#638F03">상구: </font>20대를 보며, 스스로 성찰하고 공동체 속에서 고민하며 형성된 개인이라기보다,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의해 주조된 개인 같다고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최근 등록금 문제로 싸우기 시작했다. 몇 해 전까진 볼 수 없던 현상이다.
<font color="#017918">선우: </font>양질전화의 법칙! 그들은 물러설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한 거다. 한때 나도 ‘저들은 왜 저리 나약할까’ 걱정했지만, 이젠 중요한 변화를 만들어낼 것이란 기대가 더 크다. 꼰대가 안 되려 노력하는 기성세대들이 조금만 도와주면 된다.
1991년 5월은 실패하지 않았다<font color="#991900">동욱: </font>3시간이 다 돼가네. 결론이 뭐지?
<font color="#017918"> 선우:</font> 꼰대가 되지 말자. 1991년 5월을 패배로 규정하려는 욕망에서 자유로워지자.
<font color="#991900">동욱:</font> 근데 우리는 이전 세대보다 조금은 행복한 사회적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font color="#017918">선우: </font>그런 개인들은 이미 출현했고 앞으로도 많아질 거다. 내가 춤출 수 없다면 나의 혁명이 아니다, 이런 보편 정서가 1990년대 이후 세대에는 있다. 극단적 개인주의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론 인생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다. 그걸 끄집어내 사회적으로 수렴할 방법이야 각자의 지혜를 모아 찾아야겠지. 그 전에 지구가 망하지나 말았으면 좋겠다.
<font color="#638F03"> 상구: </font>진보 진영의 가장 큰 고민은 후속 세대가 충원되지 않는 거다. 이러다 일본처럼 될까 걱정된다. 거긴 집회 하면 깃발 들고 앞장서는 게 70대 할아버지들이니까. 그래서 요즘 등록금으로 투쟁하는 대학생들이 예뻐 죽겠다. 나중에 깃발은 이 친구들이 들어주겠지?
<font color="#A341B1"> 재엽:</font> 1991년은 유독 죽음이 많은 시기였다. 엄밀히 말하면, 마이너리티들의 죽음이었다. 당시 나는 이들의 죽음이 나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찾으려 했다. 2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많은 죽음을 목격한다. 용산, 쌍용차, 카이스트…. 이 죽음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소화해야 하나. 안을 것인지, 업을 것인지, 피할 것인지, 그 고민이 나를 다시 91년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font color="#017918"> 선우: </font>그게 예술가의 마인드다. 타인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공감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것. 그래야 정치도 경제도 진보하는 거다.
<font color="#991900"> 동욱: </font>빛나는 마무리였다. 오늘 방담 끝. 목마르다. 가자.
정리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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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트럼프와 달리…바이든, 백악관에 트럼프 초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