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혈 거부에 대한 편견은 의료계뿐만 아니라 법조계에서도 뿌리가 깊다. 1980년 9월, 대법원은 간염에 걸린 11살 딸의 수혈을 거부한 어머니에 대해 유기치사죄를 인정했다. 어머니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였고, 딸은 사망했다. 언론은 대서특필했다. 여호와의 증인과 수혈 거부, 그리고 매정한 부모로 이어지는 편견은 이때부터 ‘상식’이 돼버렸다.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주목해 수혈 거부 환자를 변호해온 오두진 변호사는 “1·2심에서 무죄를 선고했음에도 여론에 떠밀린 대법원이 논리를 비약시켜 유죄를 인정했다”며 “이후 형법 교과서 유기치사죄 부문의 유일한 판례로 이 사건이 실렸는데, 이를 공부한 법조인들은 아직까지도 수혈 거부라고 하면 ‘특정 종교인의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무수혈 수술 사망, 1·2심에서 의사 무죄
그나마 최근 들어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한국 법조계의 분위기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 2009년 5월 대법원은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김아무개(78) 할머니의 뜻을 의료진이 존중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오 변호사는 “(의료진이 아니라) 환자가 치료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인간 존엄성을 보호하는 길이라는 인식이 이 사건을 통해 법조계에도 조금씩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사건도 주목된다. 2007년 12월 광주에서 무수혈 고관절 수술을 받다 사망한 70대 환자에 대해 일부 유족이 의사의 책임을 물은 사건인데, 1·2심 모두 의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은 의료진의 권리와 의무를 새롭게 정의 내리는 의미가 있다. 1·2심 판결은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중시한 경우 의사에게 환자 사망의 책임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대법원이 1·2심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면 무수혈 수술을 요구하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의료진이 흔쾌히 수용할 여지가 더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1997년 유럽의회가 ‘유럽생명윤리협약’을 채택한 뒤,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존중은 가히 ‘세계적 상식’으로 통한다. 유럽생명윤리협약에 따르면 “환자가 충분한 설명에 기초한 동의를 한 뒤에만 시술할 수 있”으며, 여기서 충분한 설명이란 “시술의 결과·위험·목적·성격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제공받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2000년 환자가 수혈을 거부했음에도 수술 중 긴급 상황을 이유로 수혈을 한 의사들에게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의료진이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010년 유럽인권재판소도 “여호와의 증인 신도는 치료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이 회복되기를 희망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의료 시술에 대한 선택권을 행사하는 것이므로, 죽음을 앞당기기 위해 치료를 중단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며 무수혈 치료 요구를 환자의 자기결정권 행사로 규정했다.
2000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환자가 수혈을 거부했음에도 수술 중 긴급 상황을이유로 수혈을 한 의사들에게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의료진이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논란으로 남는 것은 미성년자다. 성인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 해도, 미성년 환자의 무수혈 치료에 대한 보호자의 요구를 어디까지 인정할지 법학계에서 논쟁이 진행 중이다.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 문제에 대한 독일 판례를 연구했다. 독일에선 환자가 거부했는데도 의사가 치료를 강행하면 의사를 ‘상해죄’로 처벌한다.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가장 중시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성인은 물론 14살 이상의 ‘자연적 통찰력을 지닌 미성년’의 수혈 거부를 법적으로 인정한다.
독일에선 미성년자 수혈 거부에도 촘촘한 판례다만 14살 미만의 미성년 환자 및 그 부모와 의료진의 의견이 충돌하면, 법원이 ‘합리적 고찰’을 통해 이를 조정한다. 이 경우에도 독일 법원은 △수혈 치료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의료진이 입증하도록 하고 △그렇지 않다면 수혈 치료를 의사의 권한 남용으로 규정하며 △수혈 치료로 인해 수술 이후 환자의 종교적·양심적 삶이 침해되지 않는지 살피고 △수혈 치료로 인해 부모의 친권이 함부로 제한되는 것은 아닌지 면밀히 검토한다. 이재승 교수는 “독일 법원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치료 행위가 의사 마음대로 행사하는 권력 행위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고 말했다.
그 결과 독일 법원은 구체적 사안에 따라 서로 다른 결정을 내려왔다. 1994년 독일 법원은 “교육권과 신앙의 자유를 근거로 하는 부모의 친권은 생명과 신체의 불가침성에 대한 어린이의 권리보다 우선하지 않는다”며 “긴급을 요하는 경우에는 필요한 혈액을 공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반면 1997년에는 “친권을 가진 부모가 여호와의 증인 신도이고 수혈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아동복지가 위태롭게 된다는 것은 비현실적 가정이므로 의료적 친권을 박탈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했다. 1994년에는 긴급한 의료 상황에 대한 검토 끝에 수혈을 지지했고, 1997년에는 긴급하지 않은 시술에서 수혈을 거부하는 부모의 친권을 적극 보호한 것이다.
이 교수가 보기에 한국에서 수혈 거부는 “환자의 자기결정권과 의사의 치료권이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비정상적 파국”으로 곧잘 귀결되지만, 독일에선 미성년의 수혈 치료 거부조차 ‘합리적 검토’의 대상이 된다. △어린이의 생명을 사회적 차원에서 보호하고 △종교적 신념을 과학 또는 의학을 이유로 침해하지 않으며 △미성년 자녀에 대한 부모의 친권 제한을 오직 최후의 수단으로 고려한다는 원칙을 두루 포괄해 법적·의학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미국의 판례도 독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 연방대법원 판결집을 보면 “부모의 결정이… 위험을 수반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결정의 권한이 부모로부터 어떤 대리인이나 국가공무원에게 이전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아동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의사들의 결정은… 의학적으로 위험성이 크지만 부모가 거절하지 않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밝혔다.
아이 치료에 노력하고도 비난받는 부모
한국에서도 2000년 보건의료기본법을 수정하면서 “모든 국민은 보건의료인으로부터 자신의 질병에 대한 치료 방법 등에 관하여 충분한 설명을 들은 후 이에 관한 동의 여부를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고 밝혀,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명문화했다. 다만 이 법률은 현실에서 종종 무기력하다. 특히 수혈 거부 문제에 이르면 자기결정권은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의학적·윤리적 한계 상황도 법률의 논리를 시험한다. 무수혈 수술 분야의 권위자인 이종현 부천세종병원 과장조차 “출혈이 심해 환자가 쇼크에 빠진 응급 상황에선 아직 무수혈 치료를 시도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교통사고로 장기가 파열돼 심한 출혈이 시작된 어린이가 의식을 잃은 채 응급실에 실려왔다. 부모는 수혈 치료를 거부했고, 어린이의 ‘자기결정’은 파악할 방법이 없다. 무수혈센터가 있는 대형병원으로 옮긴다 해도 무수혈 치료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의사는 그리고 법원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을 번역한 백승우 안과전문의는 “미성년 수혈 거부에 대한 국내의 사법적 판례가 거의 없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자기결정권과 생명권이 충돌하는 복잡하고도 예민한 사안에 대해 한국 사회가 축적한 지혜가 많지 않다는 이야기다.
을 번역한 백승우 안과전문의는 “미성년 수혈 거부에 대한국내의 사법적 판례가 거의 없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복잡하고도 예민한
사안에 대해 한국 사회가 축적한 지혜가 많지 않다는 이야기다.
지난해 12월, 아이의 수혈 치료를 거부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 하여 논란이 됐던 여호와의 증인 신도 이아무개(30)씨 부부도 그중 하나다. 트럭 운전을 하며 가난하게 살던 이씨 부부는 출산 직후부터 1억원에 가까운 비용을 들여 아이의 치료에 나섰다. 아이는 심장·간·장·신장 등에서 복합적인 질환을 앓았다. 현대아산병원은 법원의 결정을 받아 수혈 치료를 결정했다. 부모는 무수혈 수술이 가능한 서울대병원으로 뒤늦게 아이를 옮겼다. 서울대 의료진은 “다른 질환이 호전된 뒤에야 심장수술이 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렸는데, 아이는 수술대에 오를 수 있는 상태로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이씨 부부의 변호를 맡았던 오두진 변호사는 “두 병원 모두 (수혈이건 무수혈이건) 아직 심장 수술을 받을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했으므로, 수혈 수술 여부가 아이 사망의 직접 원인이 아니었다”며 “그런데도 부모는 수혈을 거부해 아이를 죽인 사람으로 (언론에서) 취급당했다”고 지적했다.
더 많은 무수혈 치료기관이 있었다면
더 많은 병원에서 무수혈 치료법을 적극적으로 적용하고 있었다면, 처음 찾은 병원에서 무수혈 치료가 가능한 병원을 진작 소개했다면, 부모의 상처는 조금 덜했을 것이다. 결국 수술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할 운명이었다 해도, 부모와 아이는 희망을 품고 두 달을 함께 보냈을 것이다. 그래도 세상에 나와 두 달 동안 우리 곁에 머물렀던 심장병 아이는 가볍지 않은 자취를 남겼다. 소수자에 대해 한국 의료·법조계가 마련한 관용과 배려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아이는 한국의 어른들에게 물었다. 무수혈 치료가 우리 모두를 위한 보편적 권리는 아닌지도 함께 물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신명주 인턴기자·연세대 의대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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