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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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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 없는 게임, 더러운 환율전쟁

자국 경제 고통을 다른 나라에 떠넘기려

환율갈등 벌여온 미국, 일본·독일에 이어 중국에 도발…

국제공조로 최악의 무역전쟁 막을 수 있을까
등록 2010-10-14 10:42 수정 2020-05-03 04:26
미-중 환율갈등은 미국의 노골적 위안화 절상 압력을 배경으로 삼는다. 자국 경제위기를 다른 나라에 떠넘기려는 환율전쟁은 결국 모두가 상처 입는 승자 없는 게임이다.REUTERS/ BOBBY YIP

미-중 환율갈등은 미국의 노골적 위안화 절상 압력을 배경으로 삼는다. 자국 경제위기를 다른 나라에 떠넘기려는 환율전쟁은 결국 모두가 상처 입는 승자 없는 게임이다.REUTERS/ BOBBY YIP

‘과연 제3차 세계 환율전쟁으로 비화할 것인가?’

최근 미-중 간 환율갈등을 시발로 일본·브라질·타이 등 세계 각국이 수출경쟁력 유지를 위해 경쟁적으로 자국 통화가치 낮추기에 가세하면서, 환율갈등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1971년 닉슨쇼크와 1985년 플라자 합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세계적 규모로 격렬하게 벌어진 환율갈등은 모두 두 차례다. 첫 번째 갈등의 정점은 1971년 8월의 ‘닉슨쇼크’였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달러를 금과 바꿔주는 금태환의 정지를 전격 선언해, 전후 새로운 국제통화 질서로 잡리잡았던 ‘브레턴우즈 체제’(각국의 통화가치를 달러를 기준으로 일정하게 유지하는 고정환율제)를 무너뜨렸다. 제2차 갈등의 산물은 1985년 9월의 ‘플라자 합의’였다. 주요 선진 5개국(G5)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은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 모여 달러화 약세 유도를 결정했다.

두 번의 환율전쟁 직후 달러화는 일본의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등 주요 통화에 대해 공통적으로 큰 폭의 약세를 보였다. 닉슨쇼크 시점부터 7년2개월간 지속된 ‘제1차 달러약세기’(1971년 8월~1978년 10월)에는 달러화의 가치가 엔화와 마르크화에 대해 각각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플라자 합의부터 9년7개월간 지속된 ‘제2차 달러약세기’(1985년 9월~1995년 4월)에도 달러화의 가치는 엔화에 대해 3분의 1 수준으로, 마르크화에 대해서는 절반 수준으로 각각 급락했다.

국제 환율갈등에서 닉슨쇼크와 플라자 합의를 두 개의 큰 폭발이었다고 한다면, ‘미니 플라자 합의’라고도 부르는 2003년 7월의 ‘G7 두바이 합의’는 하나의 작은 폭발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 선진 7개국(G7)은 당시 환율의 유연성이 필요하다는 데 합의하고 달러 대비 엔화와 유로화의 강세를 유도했다. 외환전문가들은 앞의 두 차례에 비해 충격 강도가 약해 환율전쟁에 비유하기는 적절치 않지만, 달러화가 엔화와 유로화에 대해 장기간 약세를 보였다는 점에서 2002년 1월부터 2008년 2월까지 6년2개월간을 ‘제3차 달러약세기’로 부르기도 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최악의 국면을 벗어난 직후인 2009년 3월부터 시작된 달러 약세가 앞으로 더욱 본격화해서 장기간 지속된다면 ‘제4차 달러약세기’가 되는 셈이다.

앞서 벌어진 1·2차 환율전쟁은 달러 가치 약세 외에도 공통점이 있다. 먼저, 주도자가 전후 세계경제 패권국인 미국 자신이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미국의 경제위기가 갈등의 주요 배경이었다는 점이다. 닉슨쇼크의 경우 베트남 전쟁으로 미국의 재정수지와 경상수지가 악화되면서 금태환 요구에 응하지 못하게 된 급박한 상황에서 촉발됐다. 플라자 합의는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한 세계 경제위기가 직접적인 도화선이었지만, 당시 미국 경제는 막대한 재정적자와 산업경쟁력 약화에 따른 무역수지 적자 등 ‘쌍둥이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다. 제3차 달러약세기의 경우에도 미국이 2001년 ‘IT(정보기술) 버블 붕괴’로 위기에 몰리면서 촉발됐다.

이번 환율갈등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갈등을 주도하고 있다. 갈등의 주요 배경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시켰고 지금까지 그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취약한 미국경제다. 여기서 눈치 빠른 독자들은 글로벌 환율갈등의 본질을 이미 알아챘을 것이다. 미국이 자국의 경제위기를 회피하기 위해 기축통화국으로서 가장 손쉽게 쓸 수 있는 방법인 ‘달러 가치 떨어뜨리기’라는 충격요법을 제 입맛대로 동원해온 것이 1970년대 이후 40년간 되풀이되고 있는 글로벌 환율갈등 역사의 본질이다. 허리에 쌍권총을 찬 카우보이가 ‘게임의 방식’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계속 바꿀 것을 강요해온 셈이다. 그동안 미국은 툭하면 중국이나 일본, 한국, 싱가포르, 타이, 인도네시아, 대만 등을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환율조작국이라고 비난해왔지만, 실상은 ‘큰 도둑’(미국)이 ‘작은 도둑’(다른 나라)을 나무란 격이다.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지난 7월22일 상원 청문회에서 금융 정책에 관한 의원들의 질문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버냉키 의장은 올해 초까지 미국의 경기 회복을 낙관했지만, 2분기 들어 미국 경기 회복세가 둔화하자 지난 8월부터는 “달러 가치를 낮춰 수출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REUTERS/ JIM YOUNG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지난 7월22일 상원 청문회에서 금융 정책에 관한 의원들의 질문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버냉키 의장은 올해 초까지 미국의 경기 회복을 낙관했지만, 2분기 들어 미국 경기 회복세가 둔화하자 지난 8월부터는 “달러 가치를 낮춰 수출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REUTERS/ JIM YOUNG

약달러 정책 노골화하는 미국

환율은 물건값과 마찬가지로 외환시장에서 외국 돈에 대한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달러에 대한 수요가 늘면 원화 가치가 떨어져 환율이 오르고(평가절하), 반대로 달러 공급이 늘면 원화 가치가 높아져 환율이 떨어진다(평가절상). 외국 돈에 대한 수요와 공급은 장기적으로는 물가상승률, 성장률, 내외금리차 등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이것은 교과서적인 얘기일 뿐이다. 현실의 환율은 단기적으로는 각국의 인위적인 환율정책에 큰 영향을 받는다.

각국이 환율에 주목하는 것은 환율이 올라 자국 통화의 가치가 하락하면 수출업체의 경쟁력이 높아져 수출이 잘 되고, 수입상품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져 수입은 줄어들면서 경상수지가 개선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환율상승은 경기부양적 성격을 갖는다. 경제살리기를 내걸고 출범한 이명박 정부가 인위적인 고환율 정책을 고집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이렇듯 다른 나라 일자리를 희생시켜 내 일자리를 지키겠다는 이기주의의 발톱이 숨어 있는 환율전쟁을 가리켜 ‘더러운 전쟁’이라 부른다.

미국 경제는 2008년 위기 이후 최악의 상황은 벗어났지만 여전히 회복세가 미약하다. 일부에서 더블딥 우려까지 제기되자, 미국 정부는 경기부양과 무역수지 적자 축소를 위해 약달러 정책을 노골화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올해 1분기에 전기 대비 0.9%였으나, 2분기에는 0.4%로 크게 둔화됐다. 경상수지 적자는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의 3%로 줄었으나, 올 들어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지난 8월 말 “경기부양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추가적인 (통화의) 양적완화 조처(유동성 공급 확대)를 취하겠다”고 공언했다. 미국으로서는 2008년 12월 이후 0~0.25%의 제로금리 정책을 유지하고 있어 금리인하를 통한 경기부양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다. 또 위기 이후 경기 회복을 위해 대규모 재정지출을 단행해 재정건전성이 더욱 취약해지면서 추가 부양책 실시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간경제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미국으로서는 경기부양을 위해 달리 쓸 만한 카드가 없다고 보고, 달러화의 양적완화 조처를 통한 달러 가치 하락에 매달리고 있다”면서 “하지만 이는 미국이 내부 문제를 과소비 억제라는 고통 감수를 통해 해결하지 않고 다른 나라에 그 고통을 전가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이 자국의 경제위기를 회피하기 위해 가장 손쉽게 쓸 수 있는 방법인

‘달러 가치 떨어뜨리기’를 제 입맛대로 동원해온 것이 지난 40년간 되풀이 된

글로벌 환율갈등 역사의 본질이다.

허리에 쌍권총을 찬 카우보이가 ‘게임의 방식’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계속 바꿀 것을 강요해온 셈이다.

미국의 양적 완화정책으로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의 통화 가치가 상승하게 된다. 지난 9월 한 달간 유로화는 달러 대비 7.6%, 중국 위안화는 1.8% 각각 절상됐다. 미국은 특히 중국에 대해 위안화 절상 압력을 가속화하고 있다. 폴 크루그먼 미 프린스턴대학 교수는 “위안화 저평가로 향후 수년간 미국 내에서 140만 개의 일자리가 감소할 전망”이라고 직격탄을 쐈다. 미국에서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실업난 등 경제 문제가 핵심 이슈로 부상한 것도 위안화 절상압력의 큰 배경이 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통화 주권을 내세우며 미국의 노골적인 위안화 절상 압력에 반발한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지난 10월4일 브뤼셀에서 열린 제8회 아시아·유럽정상회의(아셈) 개막 연설에서 “주요 통화의 환율을 상대적으로 안정되게 유지해야 한다”며 위안화의 급격한 절상 요구에 대한 거부 방침을 재확인했다. 민간경제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중국은 일본경제가 1990년대 초장기 불황을 겪은 주요 원인 중 하나가 플라자 합의를 통해 미국에 엔화 평가절상을 양보했기 때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위) 제4차 달러약세기는 올까? / (아래) 글로벌 환율전쟁

(위) 제4차 달러약세기는 올까? / (아래) 글로벌 환율전쟁

환율전쟁이 무역전쟁으로 번지면 최악

일본도 엔고 저지를 위한 시장개입에 돌입했다. 엔화값이 15년 만에 최고치인 달러당 82.88엔을 기록하자, 일본 외환 당국은 지난 9월15일 총 2조1249억엔을 풀어 달러를 사들이는 대대적인 시장개입을 6년반 만에 단행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일본은 급기야 10월5일 기준 금리를 0.1%에서 0~0.1%로 인하했다. 4년3개월 만에 사실상 제로 금리로 회귀한 것이다. 브라질, 인도네시아, 타이, 대만 등 다른 나라들도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신세’는 피해야 한다며 일제히 행동개시에 들어갔다. 브라질은 지난 10월4일 외환 유입에 대한 금융거래세(일종의 토빈세)를 기존 2%에서 4%로 전격 인상했다. 헤알화 통화 가치 상승을 겨냥한 핫머니 유입을 차단해 환율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콘 차티카와닛 타이 재무부 장관은 지난 9월17일 “자본유출 규제완화를 통해 바트화 절상을 억제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각국은 2008년 세계 경제위기를 맞아 국제공조를 통해 최악의 상황을 모면했다. 하지만 경제회복세가 지지부진하면서 인내심도 바닥을 보이고 있다. 경기부양을 위한 뾰족한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기약 없는 국제공조를 지속하기보다 수출 확대를 위해 자국 통화를 평가절하려는 ‘나부터 살고 보자’식 전략을 동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칫 다른 나라들이 모두 평가절하를 단행하는 상황에서 자기만 손놓고 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위기감도 작용한다.

하지만 환율전쟁은 승자는 없고 모두가 패자인 전쟁이 될 가능성이 높다. 1990년대 일본 재무관 재직 시절 엔 환율에 큰 영향을 미쳐 ‘미스터 엔’이라 불리는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전 일본 대장성 재무관은 “외환시장 개입은 환자에게 모르핀 주사를 놓는 것과 같다”며 “이는 환자의 상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환율전쟁이 무역전쟁으로 이어지는 경우다. 최악의 국면은 넘기는 듯했던 2008년 이후 글로벌 경제위기가 다시 제2의 위기로 비화할 수도 있다. 무역전쟁의 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위안화 절상압력을 높이기 위해 중국산 동파이프에 대해 반덤핑 관세를 부과한 데 이어 9월29일에는 의회가 인위적 환율조작국에 대해 무역보복 제재(보복관세 부과) 조처를 가할 수 있는 ‘공정무역을 위한 환율 개혁법안’을 통과시켰다. 중국은 즉각 미국산 닭고기에 대한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며 반발했다. 경제평론가인 최용식씨는 저서인 에서 “경기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각국의 환율전쟁이 무역전쟁으로 비화할 경우 그것은 다시 무역의 감소와 경기침체의 심화, 경제전쟁 격화라는 악순환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면서 “1930년대 대공황 이후 각국의 보호무역 조처가 무역감소를 통해 경기침체를 장기화시키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더구나 미국으로서는 이번 환율전쟁의 상대방은 과거 일본이나 독일처럼 만만히 볼 수 없는 중국이다.

미-중 글로벌 불균형 문제 여전히 남은 듯

국제통화기금(IMF)의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총재는 지난 10월2일 “글로벌 환율전쟁이 시작될 조짐이 있어 국제사회는 통화 가치에 대해 논의하고 환율을 조정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며 국제공조를 촉구했다. 국제금융협회(IIF)의 찰스 달라라 총재도 10월4일 미국 워싱턴에서 8일(현지시각)부터 열린 IMF·세계은행 총회에 참석하는 각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에게 보낸 서한에서 환율갈등과 세계경제 불균형을 해소할 새로운 국제환율협정 체결을 촉구했다. 사실상 지난 1995년 주요국들이 달러 약세를 유도하기로 한 플라자 합의 같은 새로운 국제 합의를 제안한 것이다. 주요 20개국(G20) 차기 의장국인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도 새로운 국제통화 질서를 논의하기 위한 다자간 대화를 추진하고 있다.

“외환시장 개입은 환자에게 모르핀 주사를 놓는 것과 같다.
이는 환자의 상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전 일본 대장성 재무관

오는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에서 환율전쟁의 확전을 막는 ‘뉴플라자 합의’가 도출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파국보다는 절충점을 찾을 가능성이 좀더 높다고 말한다. 정영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미국은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미 국채를 대량으로 내다 팔아 금리가 급등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고, 중국은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돼 미국시장을 잃을 위험성을 경계한다”면서 “플라자 합의 때처럼 대폭적인 달러 가치 하락보다는 소폭의 달러 가치 약세가 진행된 2003년 두바이 G7 합의 수준에서 국제공조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까. 미국 달러 약세는 원화 가치의 상승을 부른다. 외환딜러들은 환율 동향에 좌우되는 국내 경기에 대한 우려로 한숨이 깊다.한겨레21 김정효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까. 미국 달러 약세는 원화 가치의 상승을 부른다. 외환딜러들은 환율 동향에 좌우되는 국내 경기에 대한 우려로 한숨이 깊다.한겨레21 김정효

원화 가치의 상승 어디까지?

하지만 환율갈등이 완화되더라도 미국의 막대한 무역적자와 중국의 막대한 무역흑자라는 미-중 간 글로벌 불균형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므로 마찰 가능성은 상존할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저금리-통화팽창-통화가치 하락’이라는 패키지 정책에 대한 좀더 근본적인 회의론도 제기된다. SC제일은행의 오석태 상무는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의 저금리정책이 미국 금융위기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비판하면서도 버냉키 현 FRB 의장도 저금리정책을 통해 위기를 타개하려 한다”면서 “부동산을 제외한 주식, 곡물, 원자재 등 모든 자산가치가 상승해서 폭발할 경우 버냉키 의장에 대한 청문회가 열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원화의 달러 대비 환율은 지난 10월7일 현재 1114.50원으로 1100원 선에 근접하고 있다. 지난 8월 말 버냉키 FRB의장의 양적완화 조처 발언 이후 한 달여간 7% 가까이 평가절상됐다. 아시아권에서는 상승 폭이 가장 큰 편이다. 약달러라는 글로벌 경제흐름과 함께 빠른 경제회복과 경상수지 흑자, 향후 금리인상 기대감이 어우러진 결과다. 원화 강세를 예상하고 외국인의 주식 및 채권투자 자금이 대규모로 유입돼 달러가 더욱 넘쳐흐르면서 원화 환율의 하락(평가절상)을 부추기고 있다. 그렇다고 G20 의장국 역할을 맡은 정부가 환율하락을 막기 위해 노골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정부는 대신 우회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지난 6월 발표한 자본 유출입 변동 완화방안의 이행상황 점검을 명분으로 외국환은행에 대해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원이 특별 공동검사를 벌이기로 했다.

하지만 외환전문가들은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화 가치의 추가적인 상승(환율하락)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SC제일은행의 오석태 상무는 “2008년 경제위기 이전에 원화 환율이 달러 대비 900원이었는데, 지금은 1100원을 넘는다”면서 “원화의 실질실효환율(경상수지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환율)이 정확히 얼마인지를 맞히기는 어렵지만 원화가 저평가되어 있는 것만은 부인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원화 가치의 절상이 불가피하다면 관건은 수준과 속도다. 정영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9월에 원화가 상당히 절상됐기 때문에 앞으로는 그 속도가 둔화돼 2010년 연말까지는 현 수준에서 1~3% 정도 추가 절상하는 선에서 그칠 것”이라며 “2011년에 환율은 점진적인 위안화 절상과 펀더멘털이 반영돼 연평균으로 2010년 대비 3.5~7% 강세를 보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전문 연구기관마다 수치가 조금씩 다르지만 원화 가치가 1% 높아지면 우리 경제의 버팀목인 수출경쟁력을 약화시켜 수출증가율과 경제성장률이 0.06% 정도 하락한다. 수출 비중이 높은 기업들도 비상등이 켜질 수밖에 없다. 4대 그룹 계열사의 한 재무담당 임원은 “지금까지 대기업 실적이 좋았던 이유는 높은 환율 덕분이었다”면서 “하지만 원화 환율이 달러당 1100원 밑으로 떨어지면 상황은 전혀 달라질 것”이라고 걱정한다. 한 예로 현대차의 경우 원화 환율이 10원 내릴 때마다 매출이 2000억원이나 줄어든다. 현대차의 한 고위임원은 “원고(圓高)시대에 대비해 향후 2~3년 뒤에 나올 신차는 환율이 900원 선까지 떨어져도 견딜 수 있도록 개발하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환율이 1100원대 밑으로 떨어지는 내년에는 우리 경제 곳곳에서 고통의 신음소리가 터져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경기둔화 및 금융시장 불안에 대비 필요

한국 경제가 원화절상의 부담을 본격적으로 느끼기 시작하면 그동안 환차익을 노려 국내로 밀려들어왔던 외국의 단기자본이 역으로 한꺼번에 빠져나감으로써 외환시장이 불안해질 가능성이 높다.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 9월부터 12월 사이 외국인 주식은 74억달러, 외국인 채권은 134억달러가량 순식간에 유출된 바 있다. 민간경제연구소의 전문가들은 “환율갈등 여파로 경기둔화와 금융시장의 변동 폭 확대가 우려되는 만큼 대응책 마련이 필요하다”면서 “통상마찰 확대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자본 유출입에 따른 금융시장의 변동성 확대를 최소화하기 위해 단기자본의 유출입 관리와 외환건전성의 감독 및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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