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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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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로 몸통을 가리진 못한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국정 농단·사찰의 배후 …
하드디스크를 지워도 진실을 둘러싼 ‘정·남·정’의 싸움은 계속된다
등록 2010-08-27 16:55 수정 2020-05-03 04:26
민간인·정치인 사찰의 몸통 의혹을 받고 있는 박영준 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이 지난 8월16일 이명박 대통령에게서 지식경제부 2차관 임명장을 받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민간인·정치인 사찰의 몸통 의혹을 받고 있는 박영준 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이 지난 8월16일 이명박 대통령에게서 지식경제부 2차관 임명장을 받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워싱턴 정가와 정치를 움직이는 배후세력을 그린 일종의 정치·첩보 드라마다. ‘더 컴퍼니’라는 군산복합체가 등장한다. 컴퍼니는 정부의 공식 기관이 아니면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대통령을 지원하기도 하고 때론 맞서기도 한다. 이들의 힘은 연방수사국(FBI), 중앙정보국(CIA) 등 정보기관을 비롯해 정부 곳곳에서 활약하는 컴퍼니의 ‘세포’에게서 나온다. 이들의 힘은 정보. 정보를 취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비틀고 만들고 유포한다. 또 증거를 조작하거나 없앤다. 이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미국을,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는 허구지만 사실에 근거해 그럴듯하지 않으면 인기를 얻기 힘들다. 에는 과거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과 닉슨 대통령의 사임으로 이어진 워터게이트 사건 등이 겹쳐진다.

 

검찰은 누가 지웠는지 알고 있다?

바다 건너 우리나라의 ‘사찰 정국’ 한가운데서도 극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김종익 전 엔에스한마음 대표의 의혹 제기로 불거진 민간인 사찰 사건. 영포회와 선진국민연대의 사찰 주도 및 인사 개입 의혹으로 확대되더니,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을 겨냥한 ‘정·남·정’ 3인방(정두언·남경필·정태근 한나라당 의원)에 대한 사찰 의혹으로 거듭 진화한 이 사건의 중심에는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있다. 그런데 검찰에 민간인 사찰 특별수사팀이 꾸려지고 공직윤리지원관실 압수수색이 임박한 시점에 중요한 증거자료인 컴퓨터의 하드디스크가 모두 훼손되는 일이 벌어졌다. 강한 자성을 띤 물질과 정보 삭제 프로그램을 동원한 전문가들의 솜씨라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문제의 컴퓨터에는 무엇이 들어 있기에, 누가 하드디스크를 파손한 것일까? 지금까지 부분적으로 드러난 사실은 그 안에 민간인 사찰과 더불어 남경필 의원에 대한 사찰 보고서가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파손되지 않았더라면 민감한 정보를 담은 문서들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불법 사찰로 얻은 정보가 어떻게 가공돼 어디로 전달됐는지, 사찰의 몸통이 누구인지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났을 것이다.

증거를 인멸한 과정을 역으로 추적해도 부족하나마 비슷한 결론에 이를 수는 있다. 8월11일 중간 수사결과 발표 당시 이인규 전 지원관 등 민간인 사찰에 직접 관여한 3명만을 기소해 무능·부실 수사 비판에 직면했던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도 이 부분에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문화방송은 지난 8월18일 “검찰이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고의로 망가뜨린 전산업체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으며, 증거 인멸을 지시한 총리실 직원이 누구인지 알아냈다”고 보도했으나, 검찰은 이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다. 보도 내용을 좀더 살펴보면, 검찰이 서울 용산과 경기 안양의 전자상가를 탐문해 하드디스크를 훼손한 업체를 찾아냈으며 “7월 초 총리실 직원이 하드디스크 6대를 가져와 훼손을 의뢰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수사팀이 공직윤리지원관실 점검1팀에서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들고 나간 총리실 직원이 누구인지도 파악했으며, 그를 상대로 누가 증거인멸을 지휘했는지 추궁할 예정이라는 내용이 보도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상황 자체가 참 묘하다. 민간인 사찰 의혹에서 불거져나온 이번 사건이 “국민이 위임한 대통령의 권력을 사유화한 세력”에 의한 것이라며 몸통을 밝히라고 주장하는 쪽도, 더 드러나지 않게 꼭꼭 숨기려는 쪽도, 이 사안을 취재한 언론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 시민도 이미 몸통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름을 직접 거론하면서 특정하지 않을 뿐,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라는 정부의 공식 조직을 외피로 쓴 배후가 누구인지는 이미 알려져 있다.

 

“검찰이 못 밝히면 직접 증거 공개하겠다”

검찰의 중간 수사결과 발표 이후 정면 대응을 선언한 ‘사찰 피해 3인방’ 중 한 명인 정태근 한나라당 의원은 성명을 통해 “권력 사유화 유혹에 빠져든 소수 세력이 무리해서 확대한 자신들의 권력을 지역적 인맥을 바탕으로 보호·유지하기 위해 국정을 농단하고 반인권적인 불법행위를 자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두언·남경필 의원 역시 “국민이 위임한 대통령의 권력을 사유화해 인사와 이권에 개입한 것이 이번 사안의 핵심”이라고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 이 사안이 불거진 뒤 거취에 관심이 쏠렸던 박영준 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현 지식경제부 2차관)이, 기소된 ‘깃털’ 3명의 ‘몸통’이라고 행간에 담고 있다. 다만 마이크를 잡고 얘기하지 않을 뿐이다. 이 817호 줌인 ‘박영준 사조직의 민간인 사찰 의혹’에서 청와대 관계자의 의미 있는 발언을 인용해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박영준 차장의 지시로 동향보고서·정보보고서를 만들어 청와대에 보고했다. 이영호 비서관을 통할 때도 있고, 필요할 땐 박 차장이 이 대통령한테 직보할 때도 있었다”고 보도한 시점은 지난 6월 말이다.

은 정면 대응을 선언한 세 의원을 두루 취재했다. 대부분 배후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론하지 않는 이유와 민간인·정치인 사찰과의 연관성이 비교적 분명한 박영준 차관 이외에 이상득 의원이 몸통으로 지목받는 이유를 물었다. 이 의원의 경우 사찰 혹은 권력 사유화 주장과의 연결고리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찾자면 박 차관이 1994년 이상득 의원의 보좌관으로 출발해 지난 대선에서 조직(선진국민연대)을 담당한 중책을 거쳐, 현재는 이명박 정부의 ‘왕차관’ ‘실세 차관’이 되었다는 정도다.

이 의원과 박 차관의 이름을 특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세 의원 모두 준비된 멘트가 있었다. 심증은 있지만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 실명을 거론할 단계는 아니라는 얘기였다. 단기간에 승부를 볼 일이 아닌데, 실명을 거론한 뒤에는 권력투쟁 양상으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감도 표시했다.

이상득 의원과의 연관성에 대해 이름 밝히기를 꺼린 한 의원은 “SD(이상득 의원의 영문 이니셜)가 직접 개입하고 관여했다는 증거가 있다. (검찰 수사를 통해) 권력을 사유화하려는 세력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공개할 것이다. 그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정면 대응 방침을 밝힌 이후 세 의원의 외로운 싸움은, 국무총리와 장관 후보자들의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소강 국면을 맞고 있다. 그리고 청와대로부터, 혹은 지인들을 통해 직간접적인 회유·압력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지식경제부 차관으로 임명된) 박영준 차관 인사 내용을 미리 알려주면서 마치 최대한 성의를 보인 것처럼 말하더라. 박영준을 쫓아내면 다음은 이상득으로, 이상득 다음엔 대통령을 향하지 않겠느냐면서 이 정도에서 그만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얘기였다. 각자의 정치를 해야 하지 않느냐, 포지티브하게 하라는 얘기도 있었다.”

박영준 차관을 ‘실세 차관’으로 끌어올린 이명박 대통령의 ‘실세’ 발언 이후 ‘정면 대응 3인방’ 이외에도 ‘왕차관’과 ‘특정세력’을 비판하는 한나라당 내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박영준 차관을 ‘실세 차관’으로 끌어올린 이명박 대통령의 ‘실세’ 발언 이후 ‘정면 대응 3인방’ 이외에도 ‘왕차관’과 ‘특정세력’을 비판하는 한나라당 내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변함없는 대통령의 몸통 감싸기

3인방 중 한 의원의 말이다. 박영준 차관의 인사 배경을 설명하면서 미리 양해를 구한 것이다. 세 의원의 비판을 일정 부분 수용했으니 더 이상의 확전을 피하자는 것으로 해석될 만했다. 또한 박영준 차관을 사찰이나 인사 개입을 할 수 없는 자리로 비껴서 있게 하되, 여전히 정부에 남아 방패막이 구실을 하도록 하겠다는 의도도 엿보이는 조처였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의 생각은 참모들과 좀 달랐던 것 같다. 이 대통령은 8월16일 새로 임명된 장·차관급 인사들과 청와대에서 오찬을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물론 그 자리에 박영준 차관도 있었다.

“내가 임명한 사람 중에 왕씨는 없는데…. 이른바 ‘실세 차관’을 그렇게 부르는가 보던데, 나에게 그런 실세는 없다. 나는 일 잘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실세다.” 박영준 차장을 ‘왕차관’ ‘실세’라고 일컫는 데 대한 반응이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덕담으로 볼 수도 있었지만, 김희정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공표’되면서 그 발언은 정치색을 띠게 됐다. 지난 3월 이후 정국을 뜨겁게 달궜던 민간인 사찰, 그리고 정치인 사찰과 국정 농단·인사 개입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박영준 차관을, 이 대통령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신임한 이유는 뭘까? 평소 박 차관의 ‘업무 능력과 충성심’에 대한 이 대통령의 신뢰도가 높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마당에, 여권 내에서조차 사퇴의 목소리가 나오는데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대통령이 이렇게 힘을 실어주는데 검찰 수사 과정에서 박 차관의 ‘지문’이 나온들 조사할 수 있을까.

이 대통령의 ‘실세’ 발언은 3인방 이외에는 말을 아끼던 한나라당의 다른 의원들을 자극했다. 8월18일 열린 최고위원·중진 연석회의에서 친박계인 이해봉 의원은 “내각 개편을 보면 친위대 간의 소통에 불과하다. 모든 언론과 야당, 여당 내에서도 왕차관 문제를 제기하고 있고, 민간인·정치인 사찰에 관해 진위를 밝히라고 주장하는데 묵묵부답이다”라고 비판했다. 친이계인 이윤성 의원도 ‘실세’ 발언은 이 대통령이나 한나라당에는 치명적이고, 알려져서 좋은 쪽은 특정 세력뿐이라면서 발언을 공개한 청와대 참모들을 비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에도 바깥바람에 개혁이 좌초될까

확전을 자제하길 바라는 청와대의 바람과 달리, ‘정면 대응 3인방’은 긴 안목으로 차분한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이에 동조하는 의원도 소수이나마 이전보다 늘고 있다. 김성식·김용태·구상찬 의원 등이 중심이 돼 정치인 사찰을 비판하고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준비하고 있다.

변수는 있다. 10여 년 전부터 한나라당 내에서 벌어진 ‘당내 싸움’은 늘 일정한 패턴이 있다. 긴장감이 높아지다가도 바깥바람이 거세면 잠잠해진다. 집권 후반기에 접어든 이명박 정권이 궁지에 몰렸다 싶으면 ‘정면 대응’의 강도도 약해질 가능성이 크다. 과거와 다른 점은, 중진급 의원이 사찰이라는 범법행위에 의해 구체적인 피해를 입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실세’와 ‘3인방’의 싸움이 여권 전체를 뒤흔들 핵폭탄이 될지, 아니면 뇌관이 없는 고철덩어리가 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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