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남·원·정’이 있었다. 2000년대 초반 한나라당에서 당내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당시 이회창 총재 등 주류에게 각을 세웠던 소장파 3인방, 남경필·원희룡·정병국 의원을 일컫던 말이다. 최근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주도한 것으로 드러난 민간인·정치인 사찰의 실체를 밝히라며 야당보다 더 치열하게 싸우는 한나라당 의원 3인방을, ‘정·남·정’이라고 부른다. 정두언·남경필·정태근 의원이다. 또 남경필이다.
남 의원은 “지금 (권력 사유화 세력의 실체를) 밝히고 제어하지 않으면 다음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공멸할 수도 있다”며 “정치생명을 걸겠다는 말을 결코 레토릭(‘정치적 수사’를 뜻함)으로 보지 말라”고 말했다. 1998년 정치 입문 이후 줄곧 비주류로 살아온 그를 8월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났다.
-남 의원은 8월11일 민간인 사찰 사건에 대한 검찰 특별수사팀의 중간 수사결과 발표 이후 “수사 의지가 없거나 능력이 없다”고 비판했다. 앞으로 검찰의 태도가 바뀔 것으로 보나.=진경락 공직윤리지원관실 기획총괄과장이라고 있다. 조직도를 보면 수사관들이 수집한 정보가 모이는 ‘스테이션’(정류장을 뜻하는 말로 수집된 정보가 가공돼 다른 곳으로 전달됐다는 의미로 사용)이었다. 그런데 사건 초기 수사 대상에서 빠졌고 아예 다른 곳으로 발령을 내버렸다. 중간 수사결과 발표 즈음 뒤늦게 압수수색을 하면서 부산을 떨었다. 증거를 없앨 시간을 벌어준 것 아닌가. 검찰이 어디까지 갈지 여전히 의심스럽다.
-검찰이 ‘살아 있는 권력’을 제대로 수사한 적이 있나. 검찰의 의지가 의심스럽다면 국회에서 특별검사제를 도입하거나 국정조사를 하면 되지 않나.=단기간에 끝날 사안이 아니다. 긴 호흡으로 가려 한다. 국무총리와 장관 후보자들의 인사청문회가 끝나면 이 문제가 가장 뜨거운 이슈로 부각될 것으로 본다. 특검이나 국정조사 얘기도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겠는가.
-이번 사안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누구를, 무엇을 조사해야 한다고 보는가.=정부의 중요 문서가 담겨 있는 (공직윤리지원관실) 하드디스크를 누군가 파괴했다. 증거 인멸 과정을 밝히면 어느 선에서 구체적으로 누가 지시를 내렸는지 나올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것도 나쁘지만 그것을 덮고 거짓말하는 것은 더 나쁘다. 대통령의 권력을 사유화해 국정을 농단하고 인사에 개입한 세력이 있다. 나는 2010년판 대한민국 ‘빅 브러더’라고 부른다. 국민이 대통령에게 위임한 권력을 불법적으로 사유화한 세력이다. 이들의 촉수, 조직원들이 정부 곳곳에 포진해 있다.
-빅 브러더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가. 사찰의 배후로 지목된 박영준 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현 지식경제부 2차관)과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인가. 이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인사에 개입한 사례를 알고 있는가.=빅 브러더는 개인이 아니라 권력을 사유화한 집단, 세력이다. 심증은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 없이 실명을 거론하는 것은 옳지 않다. 솔직히 권력투쟁으로 비치는 것도 부담스럽다.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몇몇 사례를 보면, 불법으로 뒤를 캐서 법적인 문제가 있으면 옷을 벗기고 사생활의 치명적 약점을 찾아내 집으로 보냈다. 그 자리에 누구를 앉혀야 하는데 별 문제가 없는 사람이 차지하고 있을 경우엔 그 사람을 영전시켜서라도 자리를 비우게 했다.
-남 의원을 포함해 ‘사찰 피해 3인방’의 경우도 마찬가지인가. 세 의원은 인사 대상자도 아닌데 사찰을 해서 그들이 얻을 실익이 무엇이라고 보나.=사찰로 끝나지 않았다. 사찰한 내용을 왜곡했다. 먼저 증권가 정보지(흔히 ‘찌라시’라고 부름)에 흘리고 타블로이드판 주간신문에 보도하게 하고, 이를 다시 종합해 보고서를 썼다. 일부 드러난 사찰 보고서 내용은 국세청과 검경, 출입국관리소, 국정원 등이 공조해야 만들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그런데 결론은 모두 ‘뭐뭐한 듯’이라고 써 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사실인 것처럼 보이도록 왜곡했다. 과거 독재정권의 존안 자료 같은 이런 보고서를 어떻게 활용했을까. 아마 (사찰 대상자들이) 정권의 중심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용도로 사용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주변에 가면 권력 사유화 문제를 제기할 테고 자신들의 권력이 위태로워질 테니 아예 싹을 잘라버리자는 것 아니었겠나.
-그런 구체적인 사례가 있나.=지난해 나를 포함해 몇몇 의원이 이 대통령과 안가에서 만나기로 한 적이 있다. 사적인 모임인 만큼 참석자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모임 당일 아침에 어느 신문에 보도가 됐다. 대통령의 사적인 일정은 공개되면 바로 취소한다. 우리가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할지 뻔하니까 그 세력들이 차단하려고 일부 언론에 흘린 것이다.
-사찰 피해 3인방의 기자회견 등이 여러 차례 언론에 보도됐는데, 이명박 대통령도 사안의 심각성을 알고 있지 않을까.=직간접적으로 인지했을 수는 있다.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거나 개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빅브러더가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청와대와 한나라당 내에서는 ‘순망치한’(脣亡齒寒·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을 거론하면서, 박영준 전 차장과 이상득 의원의 책임을 물으면 결국 화살이 이 대통령을 향하게 될 텐데 이쯤에서 그쳐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무엇이 한나라당과 우리나라를 위한 일인지 잘 생각해야 한다. 지금 밝혀내고 제어하지 않으면 그들은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려 할 것이다. 그들의 힘은 점점 비대해져서 괴물이 되고 그 권력으로 정권 재창출 과정에 적극 개입하려 할 것이다. 역대 정권에서 비슷한 시도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역사가 잘 말해주지 않나. 최악의 경우 한나라당이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공멸할 수도 있다.
-남 의원은 이 사안을 밝히는 데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했다. 그런데 세 의원이 현재의 싸움을 지속할 수 있을지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우리는 사법기관이 아니다. 수사권이 없어 이번 사안을 밝히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또 문제를 제기하는 쪽보다 덮으려는 세력의 힘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도 소통과 발전의 과정이다. 진짜 보수라면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정치생명을 걸겠다는 말, 결코 레토릭이 아니다. 이 문제를 파헤쳐 밝혀내면 100%를 얻는다. 정치인으로서 당과 국민을 위해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깨지고 밟히더라도 진실은 결국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게 돼 있다. 결국 이기는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한나라당 의원 가운데 세 의원의 주장에 동조하는 이가 얼마나 되나.=사실 사찰 피해자의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사안의 심각성에 공감하는 분이 늘고 있다. 다음 선거는 결국 당사자들의 문제다.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이명박 정부에서 불법 사찰이 있어서는 안 된다,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한다는 공동성명을 조만간 낼 예정이다. 동의하는 의원들의 서명을 받고 있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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