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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이 악다구니의 끝은 어디인가



과로와 스펙 채우기의 참혹함, 승자독식의 냉혹함… 중간계급이 몰락하면 무경쟁 ‘신분사회’ 올 수도
등록 2010-05-14 13:28 수정 2020-05-03 04:26
경쟁, 이 악다구니의 끝은 어디인가. 컴퓨터그래픽/ 손정란

경쟁, 이 악다구니의 끝은 어디인가. 컴퓨터그래픽/ 손정란

요람에서 무덤까지, 경쟁의 연속이다. 입시 경쟁, 취업 경쟁, 승진 경쟁 그리고 외모 경쟁….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열쇳말 중 하나는 ‘경쟁’이다. 경제성장과 함께 성찰과 회의의 대상이 돼야 할 경쟁이 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아 오히려 날개를 달았다. 이렇게 경쟁 위주로 재편된 사회에서 성장한 한국인에게 경쟁이 내면화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경쟁의 내면화는 새로운 말, 오래된 구호에서 공히 드러난다.

국민 신조어 ‘엄친딸’ ‘엄친아’

‘엄친딸’(엄마 친구 딸) 혹은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는 순식간에 국민이 공감하는 신조어가 되었고, 이제는 방송 등에서 없어서는 아니 될 필수어가 되었다. 공부 잘하고 말 잘 들을 뿐 아니라 외모까지 완벽해 부모에게 무한 자긍심을 주는 엄친딸은 이웃집 평범한 자녀에게 무한 스트레스의 근원이 돼왔다. 그러니 이 단어가 뜨자마자 공감대가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된 것은 당연한 일. 별다른 저항감 없이 이 단어를 쓰다가 이렇게 우리는 비교하고 경쟁하는 풍토에 깊이 감염됐음을 다시 씁쓸하게 확인한다. “너 나랑 경쟁하자는 거냐?”는 말이 심한 ‘욕’이라는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선 문화적 금칙어가 되었을 법한 단어 아닌가.

새로운 단어뿐 아니라 오래된 구호도 경쟁사회의 단면을 반영한다. “파이팅!” 국적 불명의 응원 구호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 ‘독하다’. 다른 문화권의 응원 구호는 대개 우리 편을 응원할지언정 상대와 “싸우라”고 독려하진 않는다. 나가 싸워서 이기지 않으면 생존을 보장받지 못했던 구시대의 잔재가 너무도 선명한 ‘콩글리시’다. 한국인이 태어나면서 익히는 필사적 경쟁의 문화가 새겨진 단어라 아프다. 이렇게 너무 “파이팅”하다 보니 무조건 이기기 위한 짬짜미도 ‘경기의 일부’로 여기는 문화가 생겼다. 최근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발전 짬짜미 논란에서 보이는 것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반칙에 너그러운 한국 사회다.

마치 피부와 같아서 떼놓기 힘든 경쟁의 원리는 어떻게 한국인의 심성에 파고들었을까? 식민의 역사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적자생존 논리가 사회의 논리를 넘어 개인의 규율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한국은 약소국이라 강대국에 주권을 빼앗겼다, 같은 논리는 민족주의가 적자생존과 결합된 대표적 사례였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비평가)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는 우생학이 과학적 패러다임으로 여겨지면서 ‘경쟁주의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가설’이라고 보는 견해가 자리잡았다”며 “이렇게 우생학이 경쟁을 유지하기 위한 핑계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한반도의 근대화는 출발부터 ‘따라잡기’. 서둘러 따라잡으려면 속도가 중요하고 결과가 전부였다. 정희준 동아대 교수(체육학)는 “지지리도 못살았던 기억을 간직한 기성세대가 지금도 많다”며 “그 배고픈 기억은 여전히 경쟁으로 인한 모든 부작용을 용서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너무도 가까운 진리의 기억으로 ‘자수성가의 추억’이 있다. 1960~80년대 경제성장 시기에 교육과 부동산이라는, 신분상승을 위한 두 개의 사다리가 있었다. 그것은 단지 극소수의 성공만은 아니었다. 상당수 한국인이 기회만 잡으면 인생역전이 가능했다. 그것은 한국과 출발점이 비슷하던 다른 제3세계 국가에 견줘 광범위했다. 내가 아니면 우리 가족이, 그것도 아니면 주변의 누군가가 사다리를 한두 칸이라도 올라간 사례는 손에 잡힐 듯이 널려 있었다. 이것은 모두에게 조금만 하면 나도 성공할 수 있었단 환상과 회한의 교훈을 남겼다. 그러니 모두가 성공을 향해서 경쟁하는 길로 일로매진. 승자는 승자대로 달콤한 추억 때문에, 패자는 패자대로 쓰린 기억 때문에 자식을 ‘족치는’ 기성세대가 되었다.

하나의 열풍이 불면 모두가 그것을 둘러싼 경쟁에 나선다. ‘몸짱’ 열풍 속에 운동하는 사람들(왼쪽). 한겨레 박미향 기자, 지하철 환승역의 풍경.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하나의 열풍이 불면 모두가 그것을 둘러싼 경쟁에 나선다. ‘몸짱’ 열풍 속에 운동하는 사람들(왼쪽). 한겨레 박미향 기자, 지하철 환승역의 풍경.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이명박과 자수성가의 욕망

이명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은 욕망도 그것과 다름없다. 여전히 모두가 빨리빨리 성공하는 사회라는 보랏빛 약속은 이미 이루지 못할 환상이 됐지만, 너무도 가까운 성공의 기억은 기대를 접지 못하게 했다. 한나라당은 배출한 대통령부터 자수성가형 인물인 ‘자수성가 정당’이다. 정확히 말하면,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 이상한 방법을 통해 성공한 이들의 ‘이상한’ 자수성가 정당이다. 그러니 21세기 청년 세대의 급진적 구호 중 하나는 ‘자수성가 없는 사회, 우리 사회 좋은 사회’ 아닐까.

이렇게 필사적인 경쟁사회를 독일에서는 ‘팔꿈치 사회’라고 부른다. 강수돌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2008년 펴낸 저서 에서 “옆사람을 팔꿈치로 치며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치열한 경쟁사회”로 팔꿈치 사회를 정의했다. 쇼트트랙 경기처럼 심판의 눈을 피해 팔꿈치로 서로를 적당히 치면서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경쟁의 원리는 가정에서부터 학습된다. 강수돌 교수는 2003~2005년 한국·독일·일본·미국의 직장인 750여 명을 대상으로 ‘일에 대한 태도’를 조사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려 노력했는가?’라는 질문에 한국은 75%, 미국 69%, 독일 50%, 일본 26%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학습된 성과 지향은 직업에 대한 태도로 이어진다. 같은 조사에서 ‘만약 당신이 일을 안 해도 될 정도로 충분한 돈을 얻었다면 그래도 계속 일을 하고 싶은가?’라는 물음에 ‘일을 그만두고 여가를 즐기겠다’고 응답한 비율은 미국 59%, 독일 43%, 일본 40%, 한국 25% 순이었다.

강 교수는 책에서 “좋은 성적으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성과주의적 성장 과정이 노동에 지나친 가치를 두는 중독을 낳았다”고 지적했다. 익히 알려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장의 노동시간은 이러한 경쟁 지향 사회의 서글픈 반영이다. 강 교수는 “‘직장에서 쫓겨나면 죽음’이란 의식이 팽배하다”며 “여기에 세계 최고의 장시간 노동이란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있다”고 분석했다. 이렇게 필사적인 경쟁 풍토를 정유성 서강대 교수(교육학)는 “피난민 근성”으로 표현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됐지만, 여전히 전쟁 중인 사회란 것이다.

이런 사회의 권력은 무한 경쟁의 풍토를 제로섬게임으로 몰아간다. 모두가 하나의 점을 향해 달리고, 성과는 일부에 독점된다. 정유성 교수는 “공부를 잘해서 좋은 학교를 나오고 돈을 잘 벌어야 성공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는 제로섬 경쟁을 무한 반복할 수밖에 없다”며 “차라리 실험적으로 노동강도가 높은 광부 같은 직업을 하나 선정해 의사나 변호사만큼 월급을 많이 줘보면 어떨까”라고 제안한다. 삶의 트랙이 다양화되고, 한 번 실패해도 ‘두 번째 기회’가 있어야 경쟁이 덜하단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주체는 강자와 동일시를 통해 성과주의 태도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 임지현 한양대 교수(역사학)도 “학교에서 경쟁을 학업성적으로 환원하고, 기업의 경쟁을 인간적인 직장 만들기가 아니라 일등 이윤기업으로 환원하는 단순화된 경쟁의 논리가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승자 독식의 사회, 짬짜미가 판친다

과한 경제적 보상이 주어지는 과도한 경쟁에선 짬짜미가 발생한다.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는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들의 짬짜미는 딱히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올림픽에서 우승하면 ‘인생의 로또’라고 부를 만한 과도한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에 생긴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이들뿐 아니라 한국에선 모두가 누군가 얻으면 누군가 잃는 제로섬 경쟁, 경제적 보상에만 집중한단 것이다. 노 교수는 “해마다 정해진 정부의 지원금을 둘러싸고 학자들마저 매시즌 경쟁을 벌인다”며 “국가가 제로섬게임을 벌이는 경쟁 구도로 국민을 몰아넣는 사회에서 명예를 위한 경쟁이란 구석기 시대의 돌도끼와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모두가 승자가 되는, 명예를 위한 경쟁은 드문 한국이다.

그렇다면 무한 경쟁을 완화해 참혹한 경쟁사회를 극복할 방법은 없을까?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는 한국 사회의 무너진 안전판을 지적했다. 박 교수는 “유럽 등 중심부 국가에선 복지 체계가 경쟁을 완화하고, 인도와 방글라데시 등 주변부 사회에선 지역공동체 혹은 대가족공동체 안의 유기적 관계가 한 개인을 무한 경쟁에 덜 노출시키는 쪽으로 작동한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학자금이 필요하거나 직장을 구하는 경우 문중의 네트워크가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반면 상당수 유럽 국가는 대학이 평준화돼 내신이 일정한 수준 이상이면 대부분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 그는 “예컨대 노르웨이 대학에서 교수끼리 업적 경쟁을 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어차피 임금 협상을 개인이 아닌 노조가 단체로 교섭하기 때문”이라며 “교섭도 저임금 노동자부터 챙겨줘야 한다는 연대 원칙에 바탕하기 때문에 업적이 많다고 무조건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니다”라고 전했다.

다시 일상으로 눈을 돌려보자. 여름과 겨울철 올림픽은 물론이요, 월드컵과 월드베이스볼클래식까지, 사시사철 계절을 가리지 않는 ‘스포츠 공화국’ 한국의 스포츠 열기는 만성화된 경쟁사회의 반영이 아닐까. 개천에서 용 나는 경쟁이 사라진 시대에 우리는 김연아 같은 서민 출신의 소녀가 세계적 경쟁에서 승리해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 것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잠시 뒤집어보면, 스포츠를 통해 성공신화를 끝없이 재현하는 사회가 보인다. 경쟁의 쾌락에 중독된 우리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한국인은 스포츠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이기는 걸 좋아한다”는 정희준 동아대 교수의 지적이 뼈아프다.

거리에 나서면 즐비한 명품 가방에도 경쟁의 문화는 숨 쉬고 있다. 똑같은 브랜드의 약자가 새겨진 가방의 끝없는 행렬에는 ‘내가 최소한 경쟁에서 도태되진 않았다’고 호소하는 애처로운 존재증명이 보인다. 애초에 명품은 자신이 이룬 성취에 대한 증거라고 홍보됐으나, 한국에선 실패한 자가 아니란 호소가 되었다. 일본 정도를 빼면 세계 어디에서도 이렇게 거리와 지하철과 직장에서 똑같은 명품 가방의 행렬을 보기 어렵다고 한다. ‘몸짱’ 열풍이 불면서 거리 남녀의 몸도 ‘다이내믹 코리아’ 구호를 다시 한번 현실에서 증명할 만큼 급변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남성의 왕(王)자 복근과 여성의 에스(S) 라인은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 되었다. 혀를 두르게 하는 빠른 변화의 속도에, 같은 시간을 주고 성과를 내는 경쟁을 한다면 단연 ‘한국 애들’이 일등일 것이란 짐작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무한 경쟁, 약한 경쟁력?

불행히도 무한 경쟁이 강한 경쟁력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우리나라는 2007년 OECD 국가 중에 연평균 노동시간은 2316시간으로 단연 최장이지만, 생산성은 옛 동구권 국가를 빼면 꼴찌 수준이다. 정희준 교수는 “그나마 경쟁력도 내부용”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오늘도 경쟁에 중독된 사회는 실무에서 그리 필요 없는 ‘스펙’이란 허구의 기준을 놓고, 헛것인 경쟁을 벌인다. 자본이 명령하는 경쟁을 거부한 김예슬씨의 대학 거부 선언이 울림을 주는 이유다.

경쟁의 종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교육과 부동산이란 신분 상승의 사다리마저 부러져버렸다. 이택광 교수는 “경쟁은 ‘비슷한 처지’를 보장받아야 가능한데, 중간계급(의식)의 몰락은 경쟁 자체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최소한의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지 않으면 자연히 경쟁의 열기도 식기 마련이다. 출발점 자체가 다른 구도가 굳어짐으로써 구성원 절대다수가 경쟁에서 성과를 얻는 쾌락을 얻지 못하면, 인도나 필리핀처럼 아예 경쟁 없는 ‘신분사회’로 가게 된다. 일본의 같은 책에 나오는, 경쟁을 포기한 청년 세대의 정서가 한국에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무경쟁 사회로 ‘문득’ 바뀌는 변화도 먼 얘기가 아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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