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방송에서 ‘서울 나들이’란 개그 코너가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주인공을 맡은 개그맨은 누가 들어도 완벽한 경상도 억양으로 “저 서울 사람이에요”라고 외치곤 했다. ‘서울 사람’이라는 또 다른 코너에선 아예 ‘서울 사람이 되자’는 가훈을 무대에 걸어뒀다. 동네마다 향우회 없는 곳이 없고, 만나면 지연부터 따지는 나라에서 왜 그렇게 ‘서울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걸까?
답은 간단하다. 교육·경제·문화·정치 등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분야의 핵심이 서울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이 아닌 곳에선 먹고살 길이 막막하다. 지방자치단체마다 기업을 유치하거나 사회간접자본 시설을 확충해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약속하지만 실제 효과는 미미하다. 강원 폐광지역 개발대책으로 만든 강원랜드(현 하이원리조트)는 지역 주민 1300여 명을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채용해 비난받았고, 한 해 매출 1조원의 30%가량을 폐광지역개발기금과 세금으로 내지만 주민의 도박중독이나 청소년의 음란홍보물 노출 같은 ‘사회적 비용’과 맞바꿀 수 있느냐는 의문을 사고 있다. 또 각 지역에서 대형 할인마트 입점에 반발하는 주장의 핵심 근거는, 일자리는 창출되지만 질이 낮고 주변 영세업체를 무너뜨리는데다 이익도 지역 바깥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이런 것 말고, 생산·소비·재투자 과정이 오롯이 ‘지역 친화적’일 순 없을까? 거대자본이나 중앙정부의 개입 없이, 지역 스스로 주민의 요구를 원하는 방법으로 해결할 길은 없을까? 지역을 중심으로 연대에 기반한 협동조합의 역사가 오랜 서구에선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에서 그 답을 찾아냈다. 사회적 경제의 정의는 다양하지만 △이윤보다 조합원과 지역사회의 이익을 중시하고 △의사결정 과정이 민주적이며 △지역 주민의 참여를 중요시한다는 본질은 같다. 쉽게 말해 협동조합·노동조합·시민단체 같은 ‘제3섹터’가 국가와 시장이 내팽개친 주민의 복지를 껴안아 지역 발전을 주도하는 것이다.
캐나다는 여기에 지방정부·연방정부의 지원을 결합시켰다. 시작은 실업률이 10%를 넘는 등 극심한 경기침체에 빠졌던 1980년대 초 퀘벡주였다. 퀘벡 주정부는 고용을 안정시키기 위해 퀘벡노동자연맹과 합의해 노동연대기금을 설립했다. 노동자들이 저축의 일부를 출연해 만든 연대기금을 중소기업이 일자리를 늘리는 데 쓰도록 했다. 주정부는 기금에 매칭펀드 형태로 참여하는 한편, 돈을 출연한 노동자의 소득세를 깎아줬고, 연방정부는 이에 따른 세수 감소를 보전해줬다. 또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공동체 발전 전략을 고민하던 민간기구인 지역사회경제개발기업(Community Economic Development Corporation)이 여러 비영리 기업을 만들어 복지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간병, 환경, 재활용, 관광, 주거, 직업훈련,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사회적 기업이 등장해 퀘벡 주민을 고용했다. 퀘벡주에서 연대기금의 투자를 받은 기업은 1880여 곳, 그 결과 만들어진 일자리는 12만6천여 개에 이른다(2008년 말 기준).
이렇게 탄생한 사회적 기업들과 그 바탕이 된 각종 사회단체들이 주정부와 원활한 소통을 하기 위해 연대조직인 ‘샹티에’(Chantier)를 만들어 1996년 퀘벡 주정부가 재정위기와 실업문제 해결책을 찾으려고 제안한 ‘퀘벡의 경제·사회 미래에 관한 대표회담’(Summit on the Ecomonic and Social Future of Quebec)에 참여했다. 또한 사회적 경제를 실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노동조합, 기업, 정부의 파트너십을 지원하는 역할도 맡았다. 2001년 주정부 공식 기구로 출범한 ‘사회적 경제 위원회’는 실무대표기관인 샹티에를 동등한 협상 파트너로 인정했다. 이런 퀘벡의 움직임에 다른 주정부는 물론 연방정부도 주목했다. 2004년 폴 마틴 당시 총리는 ”사회적 기업가는 강한 공동체에 필수적”이라며 사회적 경제를 캐나다의 핵심적 사회정책 수단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2008년 말 현재 캐나다 전역에서 사회적 경제에서 일자리를 찾은 이는 200만 명(전체 인구 3천만 명)에 이른다.
유럽 전체 도시 중에 잘살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이탈리아 볼로냐시는 다양한 형태의 수많은 협동조합이 사회적 경제를 주도적으로 발전시키고, 시정부는 법적·제도적으로 이를 지원해준 사례다. 협동조합은 농산물 생산이나 구매, 공장 운영, 의료, 직업교육 등에 뜻을 함께하는 조합원이 공동으로 출자해 만들어지고, 소유·운영·이익 분배 등 조합 운영의 모든 과정도 민주적으로 이뤄진다. 협동조합 자체가 일종의 사회적 기업으로, 볼로냐시는 지방정부의 경제 영역을 사실상 협동조합에 내줘 민관 협치를 하는 셈이다.
볼로냐시 협동조합의 규모는 놀랍다. 시민 둘 중 하나는 어떤 협동조합에든 가입해 있다. 협동조합 수가 400개에 이른다. 제조업·서비스업·농업 등 각종 부문에서 활약하는 협동조합은 연간 130만 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며, 지역 국내총생산(GDP)의 40%를 차지한다. 물론 모든 조합은 수익금의 일부를 지역 발전을 위해 쓴다.
그 배경엔 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헌법에 협동조합 지원 내용을 반영할 만큼 뿌리 깊은 좌파적 전통이 있다. 이에 더해 좋은 기술과 혁신 능력을 가진 대규모 기업은 볼로냐시 기업의 90%가 넘는 소기업(50명 미만)과 기술을 공유하면서 이들의 수준을 함께 끌어올렸다. 연대 정신에 기반한 주민의 노력이 ‘부’와 ‘살고 싶은 공동체’를 만든 셈이다.
여리지만, 우리나라에도 사회적 경제의 ‘싹’은 자라고 있다. 협동조합에 기반한 사회적 경제 모델은 강원 원주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원주에선 1971년 조합원들이 모여 출자한 신용협동조합 ‘밝음신협’이 탄생했다. 이후 공동구매를 목적으로 하는 소비자협동조합, ‘한살림’을 비롯한 생활협동조합, 의료생협 등 모두 12개의 협동조합이 생겨나면서 3만여 명에 가까운 조합원들은 조합들 간에 네트워크를 형성해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이들은 원주에서 친환경 무상급식을 관철시켰을 뿐만 아니라 무농약 쌀과자 공장, 노인 일자리 창출 기업 등 여러 사회적 기업도 만들었다.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는 이들 사회적 기업의 성과가 매출과 지역 사회에 미친 영향을 포함해 400억원에 이른다고 분석한다. 원주시는 농업·교육 정책 등을 수립할 때 이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을 받는 데 행적적인 도움을 준다.
우리나라 여행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제주 올레길은 조금 다른 형태의 사회적 경제 모델이다. 언론인 출신인 서명숙씨는 스페인 산티아고 도보여행에서 돌아온 2006년 말, 길에서 느낀 행복을 나누고 싶어 고향인 제주도에서 ‘실험’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제주도청과 서귀포시청 공무원들을 만나 새로운 여행 코스 개발을 제안했고, 걷기 좋은 길을 찾으려고 노숙까지 하며 몇 달간 서귀포 일대를 헤맸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소떼를 방목하는 사유지 주인들은 “소를 놀래키거나 쓰레기를 버리지만 않는다면 좋다”고 기꺼이 문을 열었고, 이웃한 두 마을 해녀들 사이의 ‘구역 다툼’ 때문에 오래전 끊어졌던 길도 다시 잇게 됐다. 서귀포시청은 혼자 사는 ‘할망’들이 민박집을 할 수 있도록 도배 비용 등을 지원했고, 해병대는 인적 끊긴 옛길에 산처럼 쌓인 돌들을 골라내 길을 복원하는 데 힘을 보탰다.
‘사회적 기업’ 육성안, 지방선거 공약으로
2007년 9월 사단법인 ‘제주 올레’의 출범과 함께 올레길이 개장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해 석 달 동안 3천 명에 그쳤던 ‘올레꾼’은 이듬해 3만 명, 2009년 9월 말 25만1천 명으로 급증했다. 이들이 걷기만 했을까? 아니었다. ‘2박3일짜리 렌터카·리조트 패키지’라는 제주 여행의 공식을 ‘열흘짜리 도보여행’으로 바꿨다. 서귀포시청은 이런 변화가 지역 상권을 되살리고 있다고 분석한다. △재래시장 이용객 17%(하루 6천 명→7천 명) 증가 △현지 농수산물 구입 증가 △올레 음식점 250곳 등 지역 식당 활성화 △올레길 전용 민박 등 동네 숙박시설 증가 및 이용객 10배 증가 △동네버스 이용객 400% 증가 △폐점 업체 20곳 재개업 등 동네 상점 활성화 등이 근거다.
유명 호텔이나 리조트, 렌터카 업체의 수익은 본사가 있는 ‘육지’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올레꾼이 주로 이용하는 민박집이나 게스트하우스, 버스에 지불하는 비용은 고스란히 제주에 남는다. 올레꾼은 하룻밤 묵어가는 비용으로 1만5천~2만원을 지불할 뿐이지만, 민박집 할머니는 월평균 116만원가량의 수입을 얻게 된다. 걷다가 마주친 동네 구멍가게에서 사먹은 물, 음료수, 초콜릿 따위는 문을 닫았던 가게 주인을 다시 세상으로 불러냈다. 올레가 인기를 끌면서 서귀포시청도 ‘슬로관광도시육성팀’을 꾸려 이를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는 ‘관광자원’으로 가꾸려는 노력을 더했다. 하염없이 이어진 길에 부족했던 간이 화장실을 설치했고, 육지의 기업과 올레길 마을을 연결해 농수산물 직거래, 관광상품 개발 등을 돕는 ‘1사 1올레 마을 결연사업’도 추진했다.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인 하승수 변호사는 “지역에서 외부 자본을 끌어들여 대규모 개발사업을 벌이면 이익은 주민이 아닌 외부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 제주 올레는 아직 사회적 경제의 맹아 단계지만, 지역의 특성을 잘 살려 민관이 함께 노력하면 지역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6월 지방선거에 나서는 이들 가운데서도 사회적 경제에 주목하는 이들이 있다. 특히 사회적 기업 육성은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서울시장 선거), 노옥희 진보신당 울산시당위원장(울산시장 선거), 남기호 민주당 전남도의원(전남 광양시장 선거) 등 여야나 광역·기초 단체를 가리지 않고 공약으로 내세운다. 무상급식 논쟁으로 복지 문제에 관심이 커진데다, 좀체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경제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는 까닭이다.
경기지사 선거 출마를 선언한 심상정 전 진보신당 대표는 ‘경기도 순환경제’라는 이름의 사회적 경제 도입을 공약으로 내놨다. 시·군 단위 주민들이 스스로 보육원 설립이나 의료생협 구성, 친환경 먹을거리 공급 등 가장 절실한 복지 프로그램을 만들어 기금을 조성하면, 경기도가 매칭펀드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6천억원 규모의 도민은행을 만들어 서민·소상공인이 활용하도록 해 사회적 경제에 ‘피’가 원활히 돌게 하고, 사회적 기업도 대대적으로 육성하겠다고 했다. 지방자치의 주체인 주민이 경제 영역에도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참여함으로써 자치 영역을 확대해 민주주의를 강화하자는 아이디어다.
“지속 가능한 지역사회의 재구성 고민할 때”하지만 ‘토대’가 너무 빈약하다. 전창환 한신대 교수(국제경제학)는 “사회적 경제를 도입해보자는 취지에는 동감한다”면서도 “외국과 달리 한국은 노조 조직률·협동조합 가입률이 낮은데다 주민들을 조직할 역량을 가진 시민단체가 있는지도 의문스럽다”고 회의적인 전망을 내놨다.
이런 가운데서도 생활협동조합이 사회적 경제의 출발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조금씩 확산되고 있다. 조합원이 꾸준히 증가하는데다 영리가 아니라 친환경 무상급식 같은 사회적 공공성을 추구하는 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정규호 ‘모심과살림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조합원이 생활하는 지역을 기반으로 먹을거리는 물론 교육·복지·환경 등 다양한 생활 속 과제를 의제화하고 실천하는 생활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은 지역사회를 지속 가능하게 재구성하는 사회적 경제 전략으로 함께 다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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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기업이라고 하면 ‘복지’만 떠올리게 마련인 우리에겐 황당한 얘기로 들리지만,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시엔 서커스를 가르치는 사회적 기업이 1980년대 중반부터 활약하고 있다. 바로 “서커스를 통해 지구와 인간의 지속 가능한 발전의 길을 모색한다”는 목표로 설립된 ‘라 토후’(La Tohu)다. 몬트리올 제리 스트리트 이스트에 있는 이 회사 건물엔 세계 최대 서커스 회사인 ‘태양의 서커스’ 본부도 입주해 있다.
몬트리올 북부 서민·빈민층 밀집 지역인 이곳은 원래 석회석 채석장이었다. 캐나다에선 평지를 파내 석회석을 채굴하는데, 이곳의 채굴량은 어마어마해 몬트리올시 현대 건축물의 대부분을 여기서 나온 시멘트로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석회석은 화수분이 아니었고, 수십 년의 채굴이 끝난 뒤 남은 건 깊이 80m, 넓이 192ha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구멍’이었다.
몬트리올시는 이 구멍을 쓰레기로 메웠다. 시의 쓰레기 매립장으로 사용한 것이다. 일반 쓰레기로 악취가 진동해 주민들이 고통을 겪은 것은 물론, 4천t 이상의 독성 화학 쓰레기를 그냥 묻어버려 지하수가 오염될 위기에 놓였다. 스며든 빗물에 독성 화학물질이 섞여들어 지하수로 흘러간 것이다. 메탄가스까지 계속 발생해 주민들의 반발이 극에 달해서야 몬트리올시는 매립을 중단했다.
재생이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매립지가 서커스 공연장으로 탈바꿈한 건 이 지역 출신 여성 무용가의 아이디어였다. 버려진 땅을 주민들의 예술성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제안을 몬트리올시는 거절하지 않았다. 노동연대기금을 지원받아 설립된 라 토후는 지하에 파이프를 설치해 오염된 침출수를 오수처리장으로 내보냈다. 메탄가스는 주변 지역 1만여 가구가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는 화력발전의 연료로 활용했다. 그리고 이곳에 서커스 공연장을 지어 1987년 국립 서커스학교도 입주시켰다. 지역의 서민층 청소년을 대상으로 직업교육을 실시해 서커스단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왔다. 서커스에 재능이 없는 이는 청소나 설비 분야의 사회적 기업으로 연결시켰다. 지역 주민의 아이디어가 시민사회와 지방정부의 지원을 받아 환경을 살리고 일자리를 만드는 사회적 기업이 된 것이다.
캐나다가 보여주는 사회적 기업의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폐허가 된 공장 부지를 사들여 사회적 기업·협동조합을 설립하는 부동산 개발업체, ‘호혜와 평등’이라는 사회적 경제의 이론적 배경이 된 칼 폴라니 연구소, 서민·빈민층이 조합원이 돼 공동주택을 건설하는 주거협동조합, 지역주민 교육기관…. 원칙은 단 한 가지, ‘지역 사회의 공익을 위하는 것’뿐이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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