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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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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협운동에 뿌리를 둔 일본 지역정당들…
생활 속 문제를 정치적·정책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공감 속에 급성장
등록 2009-12-31 06:12 수정 2020-05-02 19:25

지요다 클럽, 가나가와 네트워크, 도쿄 생활자 클럽, 새정치 지바…. 일본 지방자치제도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인 ‘지역정당’의 이름이다. 지역정당이란 우리나라처럼 ‘지역주의’에 편승한 정당이란 뜻이 아니다. 광역자치단체나 기초자치단체 단위의 지역에서만 활동하는 정당을 일컫는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마포구에 ‘마포○○당’, 부산 부산진구에 ‘부산진구시민모임’ 같은 정당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지역정당은 말 그대로 지역 현안에 집중해 주민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가장 큰 관심을 둔다. 일본 중앙정치가 전후 반세기 넘도록 자민당·공명당의 보수연합에 지배당한 반면, 지방정치에선 비교적 다양한 세력이 활약할 수 있었던 배경엔 이런 지역정당들이 자리잡고 있다.

2009년 12월14일 일본 지바시의 ‘시민 네트워크 지바’ 소속의원들이 시의회 사무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대표적 지역정당인 네트워크는 일본 사회에 생활정치를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09년 12월14일 일본 지바시의 ‘시민 네트워크 지바’ 소속의원들이 시의회 사무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대표적 지역정당인 네트워크는 일본 사회에 생활정치를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78년 네트워크 탄생, 1979년 첫 당선자

그 가운데서도 눈길을 사로잡는 건 ‘가나가와 네트워크’ ‘시민 네트워크 지바’ ‘요코하마 네트워크’ ‘도쿄 생활자 클럽’처럼 생협 운동에 뿌리를 둔 지역정당이다. 지역정당 가운데 가장 활동력이 왕성할 뿐만 아니라 여성, 특히 주부가 지방자치의 주인공으로 나서 ‘생활 정치’를 전파했기 때문이다.

고도 경제성장에 따른 후유증으로 1970년대 일본은 심각한 환경오염 문제를 겪게 됐다. 주부들이 안전한 먹을거리를 찾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 건 당연했다. 유기 농·축산물과 생산자-소비자간 신뢰를 내세운 ‘생활클럽 생협’은 도쿄를 비롯한 대도시를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됐다. 생활클럽 생협은 세 집 이상이 공동구매를 하면 배송비를 받지 않았고, 동네마다 회원들을 모아 환경 교육도 해줬다. 자연스레 주부들이 ‘조직화’됐다. 생협 회원들의 자발적인 공부 모임도 생겨났다. 복지·교육·공동체·정치 등으로 관심 분야는 나날이 확대됐다. 1978년 마침내 “생활방식을 변화시키자”는 슬로건을 내세운 지역정당 ‘도쿄 생활자 네트워크’가 탄생했다. 이듬해 도쿄도 네리마 구의회 선거에선 지방의원도 배출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창당’과 ‘당선’이 잇따랐다.

네트워크가 지방자치 속으로 급속도로 파고들 수 있었던 건 누구나 느끼는 생활 속 문제를 정치적·정책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집에서 아이들에게 아무리 식품첨가물이 들어간 음식을 먹이지 않더라도 학교 급식이 달라지지 않으면 소용없고, 폐식용유 비누를 나 혼자 쓴다고 해서 수질오염을 막을 수 없다. 이런 문제를 가장 잘 아는 주부가 직접 정치와 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기존 정치인들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네트워크 활동을 한 후쿠시 요시코 도쿄도 의원은 이런 네트워크의 논리가 제대로 먹혔다고 소개한다. 이렇게 당선된 네트워크 소속 의원들은 각 지역에서 노인 질병수당을 신설하고, 학교 급식에 지역에서 생산한 식재료를 쓰도록 하는가 하면, 새집증후군을 줄이는 주택 건설 지침을 마련하는 등 복지·환경·교육 분야에서 큰 변화를 이끌었다.

식상해진 ‘여성 후보’에 대한 고민
요코하마시 가나가와구 아이스링크장 벽에 그려진 대형 벽화.

요코하마시 가나가와구 아이스링크장 벽에 그려진 대형 벽화.

주민과 지방의원의 거리도 가까워졌다. 2009년 8월 요코하마시 가나가와구의 아이스링크장 벽은 알록달록 색색의 그림으로 뒤덮였다. 폭이 46.5m, 높이가 7m나 되는 거대한 벽화였다. ‘탄생,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제목의 이 벽화는 요코하마 개항 150주년을 기념해 가나가와구 초·중·고교생 84명이 닷새 동안 그린 것이다. 아이디어는 일본에서 벽화 화가로 유명한 니시모리 데이코가 냈다. 특별한 행사를 기념해 벽화를 그려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대부분 철거해버리는 관행에 안타까움을 느낀 니시모리는 가나가와구의 ‘요코하마 네트워크’ 소속 시의원인 쓰기야마 노리코를 찾아갔다. 그는 벽화를 영구 보존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는 한편, 요코하마시 보조금 30만엔(약 390만원)을 따냈다. 여기에 주민 기부금 200만엔(약 2600만원)이 더해져 벽화가 완성됐다. 다른 의원들 같으면 흘려들었을 아이디어를, 쓰기야마 의원은 “학생들이 요코하마시에 대한 자기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할 좋은 기회고, 마을도 아름답게 가꿀 수 있겠다”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네트워크가 ‘여성의 정치조직’이라는 것도 장점이었다. 남성 중심의 부패한 정치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은 “최소한 여성들은 나쁜 짓을 안 한다”며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대감을 표시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거나 같이 장을 보면서 형성된 주부들만의 관계망이 당선에 일차적 힘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엔 다른 정당에서도 여성 후보가 종종 등장한다. 지역사회에서 전업주부는 점점 줄고 있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건 정년퇴직한 고령의 남성들이다. 네트워크로서도 새로운 지지층 확대 전략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시민 네트워크 지바’의 미와코 유아사 의원은 “위기감을 느낀다. 예전엔 생활을 이해하는 여성이 지방자치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신선하게 여겨졌지만, 지금은 (남성 후보를 내세운) 민주당도 우리처럼 ‘생활정치’를 얘기한다. 전문성을 확보하고, 역량 있는 후보를 발굴하는 게 과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네트워크가 지방의원 후보를 내보내는 구조 자체가 전문성을 강화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비판도 나온다. 네트워크는 기본적으로 의원을 주민의 ‘대표자’가 아니라 ‘대리인’으로 인식한다. 이 때문에 네트워크의 모든 회원은 선거에 출마할 수 있고, 한 사람당 당선 횟수는 2~3회로 제한하고 있다. 전문적인 역량이 쌓이더라도, 이를 발휘할 시간이 부족하단 얘기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치를 위해

또 의원들은 의회에서 논의되는 모든 사안에 대해 의견을 낼 때 네트워크 사무국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 물론 네트워크 사무국에서 의원과 회원들의 의견이 민주적으로 수렴되지만, 어느 것 하나 의원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구조는 다른 정당 의원이나 단체장에게 ‘교섭권이 없다’는 인식을 심어줬고, 가끔은 정치적으로 무시당하는 일도 벌어진다.

후쿠시 요시코 의원의 경험과 실천은 네트워크는 물론, 한국의 지역 운동단체들에도 시사점이 있다. 후쿠시 의원은 ‘도쿄 생활자 네트워크’에서 활동하다 1983년 무소속으로 도쿄도 스기나미 구의원 선거에 당선됐고, 1999년부터 도쿄도 의원을 지내고 있다. 1993년부턴 ‘자치시민 93’이란 정치단체도 운영 중이다. 그는 정치를 시작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지역구에서 학습모임을 지속하고 있다. 주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현안과 관련한 전문가를 불러 강의를 듣거나, 자체적인 자료 조사를 하기도 한다. 후쿠시 의원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공부하고 자치하지 않으면 지방자치는 불가능하다.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바로 나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도쿄·지바·요코하마(일본)=글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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