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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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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점원들이 거리로 나선 까닭은

영업시간 연장 움직임에 맞서는 화장품 판매원 노조들…
부족한 휴일·일상화된 야근에 육아·가사는 포기해야 하는 처지
등록 2010-02-11 17:34 수정 2020-05-03 04:26

백화점 종사자에겐 3대 금칙어가 있다. “없어요” “안 돼요” “몰라요”다. 고객이 찾는 물건, 고객이 하는 요구, 고객이 묻는 질문에 부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다. 완곡한 표현을 빌려 다른 식으로만 뜻을 전할 수 있다. 고객은 언제나 왕이다. 3대 금칙어는 백화점을 상대로도 쓸 수 없다. 백화점이 영업시간을 고무줄 늘리듯 늘려도, 휴일 없는 노동을 강요해도 백화점 종사자는 백화점의 횡포에 부정적인 말을 할 수 없다. 백화점은 ‘왕’보다 무서운 일자리이기 때문이다.

백화점이 ‘고객 편의’를 앞세울수록 백화점 노동자의 노동강도는 강해진다. ‘화려함의 상징’인 백화점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변변한 휴게실 하나 없는 노동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보인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백화점이 ‘고객 편의’를 앞세울수록 백화점 노동자의 노동강도는 강해진다. ‘화려함의 상징’인 백화점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변변한 휴게실 하나 없는 노동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보인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밤 9시 폐점 추진에 “우리가 기계냐”

잠시 주춤했던 추위가 다시 기승을 부리던 지난 1월21일 이른 아침. AK백화점 경기 분당점 앞에 피켓과 플래카드를 든 3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산하 백화점 화장품 판매직 노조원이다. 샤넬, 로레알, 엘카 등 7개 외국 화장품 판매원인 이들은 AK백화점의 부당 영업 행태를 막기 위해 모였다. 백화점은 2월부터 폐점 시간을 밤 9시로 연장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었다. 엘카의 이미숙 노조위원장은 “정상 영업시간인 저녁 8시 폐점 시간도 지키지 않고 30분 연장영업을 수시로 하면서 또 밤 9시까지 영업하겠다는 것은 노동자를 기계로 아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백화점 화장품 판매직 노조는 매주 목요일 전국 백화점을 돌며 선전전을 벌이고 있다. 이들의 구호는 하나다. ‘연장영업 반대, 주 1회 휴점제 시행’이다. 이렇게 거리에서 구호를 외친 지 벌써 6개월째다. 이날도 백화점 앞에서 출근길 시민과 백화점 노동자들에게 요구사항을 적은 전단지를 나눠줬다. 한쪽에선 이들의 요구에 힘을 실을 범국민 서명도 받았다. 추위에 떨며 서 있는 노조원이 내미는 전단지를 같은 백화점 노동자인 AK백화점 직원들도 외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받아든 전단지는 백화점 입구에서 보안요원에게 압수당해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노동자의 요구사항은 채 읽히지도 못한 채 쓰레기가 됐다.

백화점 1층, 향기롭고 화려한 조명 아래 서 있어야 할 화장품 판매원이 거리에서 찬 바람을 맞으며 백화점 영업시간 단축에 매달리는 건 왜일까? 현재 백화점 영업시간은 오전 10시30분부터 저녁 8시까지다. 1996년 이전까지만 해도 백화점 영업 종료 시간은 저녁 7시였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백화점의 영업시간 연장이 본격화돼, 정상 영업시간은 지금의 저녁 8시로 1시간 늘어났고 주말 영업은 이보다 30분 더 늘린 저녁 8시30분이 됐다. 연장영업의 명목은 ‘소비자의 편의’였다. 이제 월~목요일은 저녁 8시, 금~일요일은 저녁 8시30분에 폐점하는 게 업계 관행이 됐다. 노동자도 고객도 저녁 8시30분이 정상 영업시간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영업시간 종료 뒤 ‘VIP만의 쇼핑’ 아시나요

영업시간 외 영업도 벌어진다. VIP 손님을 위한 ‘나이트 파티’다. 지난 2009년 10월, A백화점의 한 지점. 저녁 8시가 되자 영업 종료를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쇼핑백을 든 손님이 하나둘 백화점을 빠져나가자 정문에 셔터가 내려졌다. 영업시간 종료. 하지만 본격적인 영업은 이제 시작이었다. 백화점 후문이 슬며시 다시 열렸다. 초대권을 가진 이들이 하나둘 들어갔다. 초대받은 자들만 누릴 수 있는 ‘쇼핑 파티’다. 턱시도를 차려입은 직원이 손님을 반겼다. 파티 시간은 저녁 8시30분부터 밤 10시까지. 초대받은 이들은 백화점에서 연 매출 5천만원 이상을 결제한 우수고객 400여 명이다. 손님은 층층이 마련된 다과를 즐기며 편안하게 파티를 즐겼다. 아니 쇼핑을 즐겼다. 이 시간은 소수의 손님만 초대해 백화점 문을 개방하기 때문에 낮 시간의 북적거림 없이 쾌적한 쇼핑을 즐길 수 있다. 백화점은 파티 손님을 위한 특별 상품도 따로 준비한다. 낮에는 없던 명품이나 사은품이 매대에 진열된다. 유명 연예인의 미니콘서트, 댄스 공연 따위로 쇼핑의 흥을 돋워 손님의 지갑을 열게 한다.

하지만 초대받은 우수고객이 선택받은 자만의 여유, 있는 자만의 사치를 누리는 그 시간은 백화점 판매원의 잃어버린 ‘시간 주권’이다. 백화점 노동자는 하루 9시간을 서서 일한다. 백화점이 비정기적인 나이트 파티라도 하는 날은 12시간을 서 있는다. 이 백화점에서 일했던 최소영(가명)씨는 “파티가 끝나고 영업 마감을 하고 나면 서둘러 집에 가도 밤 12시를 넘는다”며 “다음날 또다시 서서 일하다 보면 다리가 후들거린다”고 말했다.

나이트 파티는 이벤트성으로 열린다. 명품관을 갖춘 백화점 지점들이 주로 여는 행사다. 지난해엔 백화점 3사가 한 번 이상씩 나이트 파티를 열었다. A백화점 마케팅 담당자는 “나이트 파티를 여는 날은 평소보다 5배 이상의 매출을 올린다”고 말했다. 백화점은 노동자의 쉴 권리를 빼앗아 이윤을 남겼다.

고무줄 영업시간은 시 외곽 백화점에서도 눈에 띈다. 경기 용인에 위치한 B백화점. 이 백화점은 다른 백화점보다 1시간 늦은 오전 11시30분에 개장해 2시간 늦은 밤 10시에 문을 닫는다. 서울 중심가의 백화점에서 일하다 C백화점 근처로 이사 오면서 근무지를 이곳으로 바꾼 이현정(가명)씨. 백화점 경력 2년차인 그는 “근무시간이 늦춰졌을 뿐 일하는 시간은 비슷한데 밤늦게 일하는 것이 피로감이 더 큰 것 같다”고 말했다. 늦은 퇴근 탓에 어린이집에서 생후 6개월 된 아이를 데려오는 건 언제나 남편 몫이다. 집에 오면 이씨는 잠든 아이 얼굴만 보고 밀린 집안일을 시작한다. 밤 12시나 돼야 겨우 잠을 청할 수 있다. 주말 없는 백화점 노동자인 그가 아이와 눈을 마주칠 때는 출근 전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려다 줄 때뿐이다. 이씨는 “휴무일에는 아이와 함께 놀아주려고 다른 약속은 되도록 잡지 않는다”고 말했다.

백화점 화장품 판매직 노조는 매주 목요일 전국 백화점을 돌며 ‘연장영업 반대, 주 1회 휴점제 시행’을 요구하는 선전전을 벌이고 있다. 1월21일 열린 AK백화점 분당점 앞 선전전 모습.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제공

백화점 화장품 판매직 노조는 매주 목요일 전국 백화점을 돌며 ‘연장영업 반대, 주 1회 휴점제 시행’을 요구하는 선전전을 벌이고 있다. 1월21일 열린 AK백화점 분당점 앞 선전전 모습.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제공

밤 10시 넘어 퇴근… 생후 6개월 아이 ‘생이별’

IMF 위기를 겪으며 백화점은 ‘주 1일 휴점제’를 ‘월 1회 휴점제’로 바꿨다. 공식적으로 한 달에 네 번 이상 쉬던 것이 한번으로 줄었다. 이마저도 백화점 간 경쟁이 심해지면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인력 문제로 휴가를 마음대로 쓰지 못하거나 주5일제 근무가 여의치 않은 약소 브랜드의 경우 노동강도는 더욱 세진다. 백화점 종사자는 공휴일인 빨간 날도 쉴 수 없다. 추석 등 명절 연휴에 이틀씩 쉬던 것도 지난해엔 설과 추석 모두 하루에 그쳤다. 휴일이 줄수록 일은 더 해야 한다. 주말까지 껴 딱 3일뿐인 이번 설 연휴에도 C백화점은 쉬는 날 없이 영업을 한다.

그러나 누구 하나 백화점 영업 행태에 불만을 제기하지 못한다. 백화점 운영방식 때문이다. 백화점은 협력업체 노동자, 소사장제 노동자, 아르바이트생 등으로 고용이 이뤄진다. 백화점이 ‘갑’, 입점업체와 노동자가 ‘을’인 상태에서 을은 갑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다. A백화점 관계자는 “연장영업에 따른 추가 노동은 수당으로 챙겨주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는 반응이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백화점 종사자에게 연장시간에 따른 야근은 건강을 위협한다. 이보은 여성환경연대 사무처장은 “특히 여성 노동자의 잦은 야간 근무는 신체 호르몬 분비를 교란해 유방암 발생률을 높인다는 보고가 이미 학계에 나와 있다”며 “여성 노동자의 건강권이 연장영업으로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늦은 퇴근 시간과 주말 없는 노동의 가장 큰 문제는 가족이 희생된다는 점이다. 시간 주권이 없다 보니 작은 경조사부터 육아 문제까지 풀어야 할 매듭이 끝이 없다. 전체 백화점 직원의 90% 이상이 20~30대 여성인데도 육아와 출산은 엄두를 내기 힘들다. 미혼·비혼이 넘치고 애를 낳지 않겠다는 직원도 많다. A백화점에서 근무하는 노원정(가명)씨는 “정부가 저출산 해결을 위한 각종 정책을 내놓는데, 그것보다 여성 노동자가 많은 서비스업의 근무시간을 줄이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백화점 노동자들의 요구를 대변할 조직이 아직은 미약하다. 백화점 종사자의 대부분은 판매원과 계산원인데, 이중 정규직 노동자가 상대적으로 많아 노조를 결성한 것은 화장품 판매원들뿐이다. 백화점 전층에서 판매원 노조가 있는 곳은 1층이 유일한 셈이다. 2004년 샤넬에서 외국계 화장품 중 최초로 판매원 노조가 결성된 뒤 로레알, 엘카, 클라란스 등 7개사의 노조가 차례로 만들어졌다. 이은희 로레알 노조위원장은 “백화점 노동자가 하나 돼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일이 어려운 만큼, 정규직 노동자가 있는 곳부터 먼저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될까 두려웠지만 성과도 있었다. 밤 9시까지 영업하려던 신세계 서울 영등포점 타임스퀘어, AK백화점 경기 분당점 등의 영업시간 연장을 막았다. ‘빨간 날’도 지켰다. 지난 1월1일, 신정 연휴 영업을 준비하던 백화점 몇 곳이 결국 휴점했다. 이은희 위원장은 “다행히 몇몇 백화점의 파행 영업을 막았지만 법적인 규제가 절실히 필요하다”며 “우리의 요구사항이 담긴 유통산업발전법이 만들어지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간 주권’ 찾을 수 있는 건 결국 연대뿐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은 지난 2008년 11월 주 1일 휴점제를 의무화하고 저녁 영업시간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유통산업발전법을 발의했다. 독일의 경우 저녁 8시에 폐점하고 일요일은 휴점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이 의원은 “지난해엔 지식경제부가 유통산업발전법안 중 대형마트와 SSM(기업형 슈퍼마켓)을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바꾸는 내용에 반대하면서 법안이 처리되지 못했다”며 “올해엔 지방선거 전에 처리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백화점 노동자의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선 화장품 판매원 노조 외에도 목소리를 더 보태야 한다. 정민정 민주노총 여성부장은 “휴식 없는 노동은 개인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며 “대형 유통점을 상대로 시간 주권을 찾으려면 국내외 화장품 판매원을 포함해 백화점 모든 노동자가 단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보은 여성환경연대 사무처장은 “근본적으로는 더 편리하고 빠른 소비를 추구하는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라며 “백화점 노동자들의 요구에 공감하는 소비자들의 연대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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