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제안을 함께 했던 이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그 씨앗이 맺혔다. 그 이름은 ‘역사를 여는 사람들 ㄱ’이다. 한글 자모의 첫머리인 ‘ㄱ’을 모임 이름 뒤에 넣은 것은 일의 시작이라는 뜻도 있지만, ‘기억’을 음차(音借)한 것이기도 하다. 이들이 펼칠 역사신탁 운동은 근현대사에서 사라져서는 안 될 기록과 기억을 보존하고 복원하자는 사업이다. 신탁에 참여하는 이들이 건물이나 대지 등의 공간을 사거나 기증받아서 역사를 기록하는 공간으로 재구성해 후대로 전승하자는 운동이다.
‘역사를 여는 사람들 ㄱ’은 경술국치 99주년(8월29일)을 하루 앞둔 2009년 8월28일 서울 남산에서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누리집은 <u>‘blog.daum.net/historytrust’</u>이다. 은 남산 역사신탁 사업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보도할 계획이다. 편집자
서울 중구 예장동 2-20번지의 옛 중앙정보부장 관저. 남산 역사신탁 운동의 발기인 대회를 열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8월28일 오전 10시30분, 발기인 대표로 기자들 앞에 선 윤여준 한국지방발전연구원 이사장(전 환경부 장관)은 솔직했다.
“제가 처음 제안을 받고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공교롭게도 안기부에서 2년 남짓 일했단 말입니다. 노태우 정부 시절 안기부장 언론특보로 와서 남산에서 2년간 일했습니다. 제 방이 본관 2층에 있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남산을 드나들면서 여기에 경술국치의 현장인 일본 통감관저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명색이 고위 공직을 지낸 사람이고, 나름대로 역사의 중요성을 알고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남산의 진실을 몰랐다니 얼굴을 들기도 힘든 심정이었습니다. 여기에 온 것은 그런 부끄러움을 좀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고, 정신적으로 속죄한다는 뜻도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참석한 이들에겐 한결같았다.
천정배 의원 “경술국치 현장인 줄 몰랐다”남산 역사신탁 운동을 이끌 ‘역사를 여는 사람들 ㄱ’의 대표를 맡게 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최근 3년간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원회에 참여해 1960~70년대 중앙정보부에서 벌어진 일들을 조사하면서 이곳에서 벌어진 역사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발기인으로 참여한 천정배 의원(민주당)은 “제가 사교육은 아니래도 공교육은 누구보다 충실하게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남산이 경술국치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며 “그만큼 우리 역사 교육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갈 길이 바쁘다. 서울시가 지난 3월 발표한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 때문이다. 한홍구 교수는 “서울시의 계획은 남산의 접근성 개선, 생태 및 산자락 복원, 역사 복원 등을 통해 남산을 시민에게 되돌려준다는 것”이라며 “다만, ‘역사 복원’ 계획에 결정적인 역사적 고려가 들어 있지 않아, 근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이 중요한 역사적 공간인 통감관저 터와 옛 안기부 건물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지적했다. 서울시는 올해 서울시 균형발전본부를 해체하는 것을 시작으로, 남산에 있는 안기부의 옛 건물들을 2011년까지 모두 철거한다는 계획이다(2011년은 공교롭게도 중앙정보부 창설 50주년이 되는 해다).
한홍구 교수는 옛 중앙정보부 건물 중에서 대표 격인 중앙정보부 남산 본관(현 서울유스호스텔), 지하취조실(제6별관, 현 서울유스호스텔 앞 서울종합방재센터)과 대공수사국(제5별관, 현 서울시청 별관) 그리고 ‘6국’(현 서울시균형발전본부) 건물은 꼭 보존해야 한다고 꼽았다. 그는 “서울시와 공식적인 협의를 통해 이 건물들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철거가 아닌 다른 형태로 되살리는 방안을 만들어보려 한다”고 설명했다. 2011년 6월10일(중앙정보부 창설 50년)을 목표로,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유엔과 아우슈비츠박물관 등 인권·평화 관련 국제기관·단체들과 함께 근대유산 지정 청원을 할 계획이다. 근대유산 지정이 이뤄지면 이곳을 ‘아시아인권평화센터’ 또는 ‘평화공원’으로 만들자는 국민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킨다는 복안도 갖고 있다.
현재 잔디밭 공원으로 남아 있는 일본 통감관저 터도 마찬가지다. 역사신탁 사업 실무를 총괄할 서해성 소설가(한신대 외래교수)는 “일단 내년이 한일합방 100년인 만큼, 100년의 역사를 기억하고 교육의 현장으로 삼기 위해 경술국치 현장인 통감관저를 옛 모습으로 복원해 생생한 역사 교육의 장으로 만드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며 “경술국치의 현장을 되살릴 다른 방안도 고민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올바른 복원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이르면 9월 하순에 역사와 건축에 대한 국제심포지엄을 열 계획”이라며 “이 심포지엄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보존하는 폴란드와 일제 식민지를 경험한 중국과 대만의 전문가들은 물론, 일본 학자들도 불러 인류 공통의 지혜를 모아볼 생각”이라고 밝혔다.
한국방송과 문화방송 등 국내 방송 4사와 를 비롯한 일간지 등 취재진 40여 명이 몰린 이날 기자회견에는 일본의 〈NHK〉도 취재를 나왔다.
기자회견을 마친 발기인들은 취재진과 함께 통감관저 터와 중앙정보부의 옛 건물들을 둘러보는 답사에 나섰다. 이번 답사에서는 이 지난번 답사 때 파악하지 못한 새로운 사실들이 공개됐다. 한홍구 교수와 서해성 소설가는 중앙정보부와 안기부 시절 고위직을 지낸 이들을 만나 이 일대에 얽힌 역사를 채록했다.
중앙정보부장의 옛 관사에서 통감관저 터까지는 보통 걸음으로도 3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이곳이 통감관저가 있던 자리임을 확인해줬던 하야시 곤스케(1860~1939)의 동상 받침대 판석은 통감관저 터 옆 공터의 석조 벤치가 돼 있었다. 2006년까지 시멘트 바닥 농구장이었던 이 터를 잔디밭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이 대리석 널판의 의미를 알 리 없는 건설업자가 벤치로 재활용한 것으로 보였다.
안기부 떠나면서 폭파 해체 요청통감관저 터에 들어서면 뒤편 언덕으로 이어지는 석조 계단이 보인다. 계단은 휑한 시멘트 바닥의 공터로 이어진다. 한홍구 교수는 “바로 여기가 1961년 중앙정보부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었다”며 “당시에는 여기에 퀸셋 막사(천막으로 만드는 조립형 군용 막사)를 치고 처음 정보부 요원들을 모았다고 한다”고 말했다. 정보부 요원들이 늘어날 때마다 남산 곳곳에 퀸셋 막사가 들어섰다. 744호 기사에서 밝힌 대로, 그 일대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왜성대’ 지역이다. 한 교수는 “이 자리에는 1970년대 중반에 제1별관이 들어섰는데, 이 건물에서는 주로 통신 도·감청이 이뤄졌기 때문에 1995년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안기부가 여기를 떠나면서 폭파 해체하도록 요청했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제1별관이 해체된 공터 옆에는 안기부 본관(현 서울유스호스텔)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다. 천정배 의원은 “1980년대 안기부에 끌려간 이들을 접견하려면 남산 안기부 입구에 있는 ‘주자파출소’에서 면회를 신청하고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며 “그나마 안기부가 조사 중인 인물의 접견을 허용한 것은 1989년 문익환 목사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안상운 변호사(발기인)도 “민변 활동 당시 안기부에서 조사받은 이들을 면회할 수 있는 곳은 3곳이었다”고 자신의 경험을 밝혔다. 가장 보편적인 곳이 서울 중부경찰서 면회실로, 주자파출소에서 접견을 신청하고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면 ‘중부경찰서로 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한다. 안상운 변호사도 문익환 목사를 중부경찰서에서 접견했다. 중앙정보부장 관사에서 멀지 않은 정문 쪽 면회소에서도 접견이 이뤄졌다. 1990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활동을 하다 구속된 박노해 시인을 정문 면회소에서 만났다고 했다. 1992년께는 본관에서 접견이 이뤄지기도 했다. 안상운 변호사는 “1992년 안기부에 붙잡힌 전대협 간부들은 안기부 본관에서 면접했다”고 그때를 떠올렸다.
일행은 서울종합방재센터 옆 터널을 지나 현재의 서울시청 별관으로 향했다. 한홍구 교수는 “이 터널을 지나느냐 마느냐가 끌려온 사람의 운명을 갈랐다”고 설명했다. 제5별관으로 통했던 이 건물은 대공수사국이었는데, 간첩 혐의를 받는 이들이 조사받는 곳이었다. 한 교수는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에서 간첩사건을 조사하면서 얻은 결론인데, 남북 분단 이후 남쪽에서 검거된 간첩(고정간첩) 1100여 명 중 엄밀한 의미에서의 남파 간첩은 50여 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며 “나머지는 간첩으로 의심될 일을 한 이들이나 무고한 이들이 간첩으로 조작된 것인데, 그 조작이 모두 이 건물에서 이뤄졌다”고 말했다.
“중부경찰서로 가라” 그나마 고마운 접견한홍구 교수는 “때마침 오늘(8월28일) 1980년대 ‘가족간첩단’으로 몰렸던 송씨 일가 사건이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며 “송씨 가족 사건이야말로 안기부가 무고한 이들을 간첩으로 조작한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전쟁 때 월북한 인사의 가족을 고문해 ‘북한에 다녀와 간첩활동을 했다’는 허위자백을 받아내 간첩단으로 몬 사건이다. 한 교수는 “그 집안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평소 알고 지내던 군인에게 ‘육해공군은 알겠는데, 해병대는 뭐하는 곳이냐’고 물었던 것을 군사정보 수집·탐지 활동 혐의로 엮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조병현)는 이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던 송씨 일가 8명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송씨 일가의 장남 기홍(65)씨는 무죄 선고 뒤 만난 기자들에게 “그때 수사관들을 지금 본다고 해도 때려 죽이고 싶을 정도”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는 “당시에도 대법원이 두 번이나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을 했는데, 정권과 안기부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며 “당시 우리를 조사했던 수사관들에게는 간접적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서해성 소설가는 “안기부에서도 대공수사 때 하는 고문은 정치범에 비할 수 없이 강도가 높았다”며 “이런 모진 고문을 해야 하니까 제5별관은 다른 건물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에 들어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시 별관으로 쓰이는 지금에는 ‘푸른도시국장실’ ‘물관리국장실’ ‘맑은환경본부장실’ 등이 입주해 있다. 푸르고 맑음을 추구한다는 현재의 이 건물의 역할과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한다’던 20년 전 건물의 역할은 몸서리치게 달랐다.
정상덕 원불교 교무(발기인)는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에게 들은 이야기로 자신의 감상을 대신했다. 정 교무는 “신영복 교수로부터 1960년대 통혁당 사건으로 끌려가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을 당시의 이야기를 들었다”며 “신 교수가 사흘간 무자비하게 두드려맞고 기절했다가, 자신을 취조하던 수사관이 자신의 딸과 한없이 다정스런 목소리로 전화하는 소리를 듣고 깨어나, 인간의 이중성에 몸서리쳤다고 했다”고 말했다.
공포의 ‘인간 분쇄기’ 협박 일삼아정 교무는 “또한 중앙정보부나 안기부에 끌려갔다 돌아온 이들은 수사관들이 ‘인간분쇄기’ 이야기로 협박할 때가 가장 치떨렸다고 했다”고 전했다. 당시 중정 요원들은 취조를 하다가 말을 듣지 않으면 ‘지하 3층에 가면 대형 분쇄기가 있다. 네가 대답하지 않으면 거기에 던져넣으면 끝이다. 그러면 네 몸뚱아리는 산산조각 나서 한강으로 통하는 하수구로 흘러간다. 그리고 실종신고 내면 끝이다’는 식으로 협박을 했다고 한다. 이런 시설은 실제 없었다. 그러나 지옥 같은 매타작에 정신이 혼미해진 이들에겐 그보다 더한 시설도 있을 것이란 공포감이 한없이 밀려들었을 것이다.
안상운 변호사는 제5별관 앞을 떠나며 “경찰은 악명 높았던 ‘남영동 분실’을 ‘박종철 인권기념관’으로 바꾼 바 있다”며 “그곳보다 더 많은 인권침해와 고문이 광범위하게 이뤄졌던 이곳이 이제는 아시아 평화와 인권의 중심으로 서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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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준 전 장관은 노태우·김영삼 정부 시절에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과 환경부 장관을 지냈고, 2003년에는 한나라당 부설 여의도연구소장을 지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안기부장 언론특보를 지내기도 했다. 지내온 경력과 달리 늘 젊은 시각에서 역사와 현실 문제에 접근해왔다. 지난 5월 이 대표적인 ‘합리적 보수’로 그를 첫손 꼽은 이유이기도 하다. 발기인대회가 끝난 뒤 못다 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안기부장 언론특보 당시의 경험을 소개해달라.
=정보기관은 내부의 다른 조직의 일은 알지 못하도록 하는 ‘내부 차단의 원칙’이 있다. 특히 나는 부장의 특보로, 방계 조직에 속해서 그 조직의 본류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정보가 배제됐다. 그런 점들은 철저했다.
-역사신탁이 대중적인 운동이 되려면 뭐가 필요하다고 보나.
=요즘 국민 대중이 관심을 가지는 사안이 워낙 많아 쉽사리 국민적 호응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장기적으로 의지를 가지고 끈질기게 해야 할 운동 같다. 그러나 꼭 필요한 사업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경술국치를 단지 역사의 기록으로만 알고 있다. 통감관저를 복원하게 된다면, 당시 역사를 정확하게 기록·복원해서 지금의 젊은 세대가 당시 상황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내가 기자로 활동할 때(윤 전 장관은 언론인 출신이다), 1890년에서 1910년 사이에 발행된 와 등을 보다가 ‘나라가 망해가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고 비감했던 적이 있다. 나라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가라앉는 과정을 보면서 ‘일본인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 쉽게 빼앗을 생각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운 역사는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역사운동이 가야 할 방향에 조언을 한다면.
=각자의 생각이 다르고 판단이 달라서 반대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전 국민이 호응한다고 생각하면 안 될 것이고, 생각이 다른 이들은 토론하고 설득하고 때로는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지금 새삼스럽게 반일운동 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리는 일이다. 세상에, 나라를 빼앗겼던 민족이 그 과거를 정리하지 않고 건국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러나 일부에서는 ‘지금 와서 옛날을 들춰 특정인들을 공격하려고 한다’는 논리를 펼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잘 알려야 한다.
글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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