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40대, 버려진 영혼의 노숙자여

직장선 생존경쟁 몰리고 가정선 왕따 신세인 ‘산업화 시대 버려진 막내’들의 탈출구는 어디에
등록 2009-06-26 14:08 수정 2020-05-03 04:25

한국의 40대 아저씨는 야누스의 얼굴을 지녔다. 무섭거나 우습거나, 혹은 모두 누리거나 가장 비참하거나. 이들은 겉으론 자신감이 넘쳐 보이지만 속으로 자신이 없는 존재다. 집에선 가부장, 밖에선 상사로 군림하는 존재지만 사실은 여기저기서 왕따당하는 영혼이다. 40대 남성 20명의 인터뷰를 토대로 연구한 정유성 서강대 교수(교육문화학)는 보고서 ‘한국 40대 직장 남성들의 생활과 인권-사회의 병리, 육체의 손상, 영혼의 노숙’(이하 ‘영혼의 노숙’)에 바탕하면 그렇다. 정 교수는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40대 남성의 속내를 인권의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그의 연구는 한국인권재단이 시작하는 생활인권 시리즈의 첫 결과물이다. 그의 연구를 토대로 ‘영혼의 노숙자’로 떠도는 40대 남성의 오늘을 그려보았다.

40대, 버려진 영혼의 노숙자여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40대, 버려진 영혼의 노숙자여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IMF에 이어 국제 금융위기까지 ‘두 번의 겨울’

먼저 40대 아저씨를 위한 변명. 그들을 위한 인권도 있다. 인권의 개념은 날로 확장돼왔다. 인권은 이제 공평하고 좋은 세상의 상징적 등가물, 즉 ‘은유로서의 인권’이 되었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사회과학부)가 지적한 “모든 사회적 고통을 해결하는 치유제로서 인권” 말이다. 그러니 장시간 노동과 과도한 경쟁에 시달리는 그들에게도 인권은 절실하다. 정유성 교수는 “구체적 생활에서 사람답게 살 권리인 생활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40대 남성 직장인들은 어두운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강한 40대 남성, 그들의 착각이자 남들의 오해다.

그래서 40대 남성의 현실. 김기정(44·가명)씨는 오늘도 자정이 가까이 돼서야 일이 끝났다. 월·화·수·목·금 그리고 토요일. ‘전쟁 같은 밤일’은 지나간 옛 노래가 아니다. 직원 3명을 데리고 웹진, 사보 등을 만드는 업체를 운영하는 김씨는 일에 치여 지낸다. 낮에는 영업, 밤에는 원고. 밤낮으로 일에 쫓기면 한 주가 훌쩍 지나가버린다. 그래도 5년 전 그때에 견주면 지금은 괜찮다. 그는 39살에 정리해고를 당했다. 다니던 잡지사를 타의로 그만두고 구직을 했으나 허사였다. 그는 “나이도 애매하고 경력도 볼품없었다”고 돌이켰다. 40대 남성, 그들도 우리처럼 두 번의 겨울을 겪었다. 아니 겪고 있다. 1990년대 후반의 국제 금융위기 그리고 오늘의 전 지구적 경제위기다.

그래도 서른 즈음에 겪었던 위기는 탈출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마흔을 넘어서 겪는 위기는 여기서 떨어지면 나락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영혼의 노숙’ 보고서엔 처절한 증언이 넘친다. “IMF 때 먼저 다니던 직장에서 나왔는데, 그 경험 때문인지 악착같이 살아남으려고 기를 쓰게 돼요.” “거의 전쟁터였어요. …경쟁이 심하다 보니 온갖 음모와 술수도 난무하고. 결국 저는 잘리고 말았지만, 이제 차라리 시원하고 마음 편해요.” 자신을 도왔던 친구가 최근에 권고사직당했다는 소식에 가슴이 먹먹한 40대도 있다. 다음 카페 ‘맞벌이 부부 10년 10억 모으기’에는 “오늘 회사에서 그 친구를 내보내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제 40대 중반 나이에 평생을 회사만 알고 다닌 친구가 내쳐졌다니 가슴이 먹먹합니다”라는 하소연이 올라온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당시 “어렵게 사는 저를 찾아와 아내와 아이들에게 자장면과 탕수육을 사주기도 하며 늘 힘을 주었던” 친구였다.

세상을 바꿔보려고도 했고, 가족을 위해 희생도 했다. 그렇게 ‘회사 인간’으로 살아왔으나 어느 순간, 그들은 ‘내’가 없다고 느낀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세상을 바꿔보려고도 했고, 가족을 위해 희생도 했다. 그렇게 ‘회사 인간’으로 살아왔으나 어느 순간, 그들은 ‘내’가 없다고 느낀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1960년대에 태어난 40대 남성은 ‘회사 인간’이다. 회사는 그들에게 단순한 직장을 넘어선 존재의 근거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안정된 직장에서 보람을 찾는 ‘노동 서사’를 허하지 않는다. 통계도 ‘사오정’(45살 정년)의 오늘을 말한다. 한국고용정보원의 자료에 바탕하면, 2009년 1월 실업급여를 신청한 사람은 40대가 3만1573명으로 모든 연령대에서 가장 많다. 이렇게 죽어라 일했지만 억울하게 잘렸으니, ‘40대 남성 사망률 세계 1위’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해고는 살인’이라는 슬로건이 단순히 수사가 아닌 것이다.

인생 이모작을 하라며 등 떠밀지만

그러니 아무리 수모를 당해도 직장에 죽어라 붙어 있으려 한다. 이정훈(45·가명) 부장은 캔디도 아닌데 외로워도 슬퍼도 참는다. 회사는 그에게 몇 달째 업무를 주지 않는다. 상사들의 눈초리는 당연하고, 후배들도 “하루 종일 포털만 쳐다본다”고 수군거린다. 그래도 학생인 딸들을 생각하면 대기업 부장을 그만둘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에게 실직은 존재를 흔드는 끔찍한 공포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는 일본의 사례를 전한다. 일본엔 실업자를 위한 맞춤형 서비스도 있다. 실직자를 위해 유령회사 명함을 만들어주고, 그에게 전화가 오면 여직원이 지금 외출 중이라고 말해주며, 퇴직금을 받아두었다가 매달 월급처럼 입금해주는 업종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다가올 미래인지 모른다.

인생의 전반기를 아날로그 세대로 살았으나 후반기는 디지털 세대로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세상은 자꾸만 이모작을 하라고 등을 떠민다. “평균수명이 점점 늘어나면서 중년의 삶은 자꾸만 버거워진다. 예전 같으면 석양을 바라보며 생애의 갈무리에 들어갈 나이였지만, 지금은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고 갈 길은 아득하다. …모질게 살아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며 생애를 결산하고 추수하고 싶은데, 세간에서는 인생의 이모작을 준비하라며 새로운 출발을 권유한다. 자기만의 행복한 경험을 찾으라고 충고한다. 가능할까?”(김찬호 교수의 글 ‘안개 속에 사라지는 이정표’에서)

영혼의 거처를 잃은 회사 인간은 집으로 눈을 돌린다. 그러나 너무 늦지는 말아야 한다. 정유성 교수는 부모들을 상대로 한 교육 도중 아이가 몇 살, 몇 학년인지를 물었다. 교육에 참석한 100여 명의 아버지들은 모두 안다고 했지만, 1 대 1로 물어보자 실상이 드러났다. 아이의 반과 담임 교사의 이름까지 아는 아버지는 한 명뿐이었다. 아이가 몇 반인지는 태반이 몰랐고, 심지어 “11살인데 4학년인가 5학년인가” 하는 아버지도 적잖았다. 정 교수는 “한국 사회엔 편모 교육 관행이 있다”며 “이런 현실에서 아이가 어머니와는 애증이라도 생기지만, 아버지에겐 아예 무관심해진다”고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마인드프리즘 대표도 상담 사례를 전했다. 그가 만난 40대 아버지는 자녀와 평소에 친구처럼 지낸다고 생각했다가 어느 날 고교생 딸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깜짝 놀랐다. 거기엔 아빠에 대한 ‘욕설’이 가득했던 것이다. 정 대표는 “가족과 얘기를 나누면서 그는 비로소 자신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이 짐작과 다름을 알게 됐다”며 “이런 착각은 중년 남성에게서 종종 발견된다”고 전했다.

“아빠와 고민 나눈다”는 자녀 4% 불과

통계도 ‘아빠의 착각’을 말한다. 여성가족부가 2006년 발표한 ‘2005년 전국 가족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아버지의 50.8%가 ‘자녀가 고민이 생길 경우 가장 먼저 나와 의논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자녀들 가운데 ‘아빠와 고민을 나눈다’는 비율은 4%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아이는 대부분 아빠를 친구는커녕 상담자로 여기지도 않는다. 그래서 ‘영혼의 노숙’ 보고서엔 “아버지는 그저 돈 벌어오는 기계라고 생각하는 것이 전반적 세태예요. 아내도 그렇고, 아이한테 아빠가 왜 좋냐고 물으니까 돈 벌어와서 좋다고 하더라고요”라는 푸념이 그치지 않는다. 이렇게 한 번 깨어진 일과 삶의 균형은 쉽사리 중심을 잡기가 어렵다.

그렇게 40대 남성은 집안의 왕따가 되었다. ‘영혼의 노숙’엔 외계어를 쓰는 아이들과 대화조차 어렵다는 부모들도 있다. “애들이 다 커버려 대화도 어렵고, 뭐 지들 쓰는 말도 잘 못 알아듣겠어요. 애들이 쓰는 용어도 써보고 그러는데, 애들이 대화를 잘 안 하려고 해서….” “특히 중학생이 되면서 더 그래요.” 심지어 자녀와 부인을 외국에 보낸 ‘기러기 아빠’의 기막힌 고백도 있다. “떨어져 있다 보니 대화를 더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이들과 인터넷이나 화상통화 같은 것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요. 아내하고도 그래요.” 그러니 이들의 영혼은 집에도 밖에도 머물지 못하고 노숙하며 떠돈다.

병든 사회는 그들의 육체를 손상시키고 영혼마저 노숙으로 떠민다. 타인을 배려하고 관계를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설 자리를 잃는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병든 사회는 그들의 육체를 손상시키고 영혼마저 노숙으로 떠민다. 타인을 배려하고 관계를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설 자리를 잃는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어제의 ‘386’은 오늘의 ‘486’이 되었다. 1980년대 마지막 학번인 1970년생이 올해로 마흔이 되면서 더 이상 ‘30대에 80년대 학번’인 386세대는 없다. 이제 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세대는 모두 40대다. 그렇게 20여 년이 흘렀다. 세상의 변화에 참여한 이들이 적잖은 이 세대는 어느새 사회의 허리인 중견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제자리, 성공은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들은 “허울 좋은 민주화와 가차 없는 신자유주의” 사이에서 헤맨다. 역시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영혼의 노숙’ 보고서엔 “세대마다 불안감이야 다 있겠지만 40대가 가장 심한 거 같아요. 승진을 해도 뭔가 보장되는 느낌이 없고 불안하기만 하니까”라는 하소연이 넘쳐난다. 그래서 이들은 “고속성장의 막차에 올라탔다가 이름 모를 간이역에 버려진 세대”로 스스로를 표현한다.

닮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아버지를 닮아가

세월은 영혼의 분열도 낳았다. 산업화 세대인 아버지를 거역해서 민주화운동에 공감했던 아들이 은근히 보수적인 아버지로 변하는 경우도 적잖다. 신경민(48·가명)씨는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최근 촛불집회에 나가는 고등학생 아들이 불안하다. 그는 지난해 초여름 밤늦게 거리를 헤매다 돌아온 아들을 붙잡고 일단은 공부를 하라고 다그쳤다. 언젠가 아들이 병역거부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덜컥했다. 이렇게 그는 갈수록 ‘보수’로 기우는 자신의 감성에 스스로도 당황한다. 그렇게 그들은 새 시대의 맏이를 꿈꾸었으나 구시대의 막내로 남았다.

‘영혼의 노숙’ 보고서에 담긴 촛불집회와 여성운동에 대한 반응도 호의만은 아니다. 오랫동안 운동에 헌신해온 40대도 “쇠고기 문제가 그렇게 이 사회에서 큰 문제가 되는 건지는 의문이 생겨요”라고 답했다. 나아가 그는 “차라리 정권에 대한 반대 정서가 표출된 운동이 아니었을까요”라며 ”특히 촛불을 새로운 시민운동의 맹아로 보는 시각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덧붙였다. 자신의 세대와 다른 운동에 대한 불편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심지어 여성운동에 ‘반감’을 표하는 이들도 많았다. “사회적 상식선을 넘어서는 무리한 요구.” “여성운동이 필요한 시기는 이제 지난 것 같아요.” 인터뷰에 응한 20명 가운데 18명이 여성운동에 부정적인 생각을 밝혔다.

감수성 훈련 나서 영혼의 안식 구해야

이렇게 그들은 그토록 닮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아버지를 닮아간다. 정치의 민주화를 위해서 노력했지만 일상의 민주화는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이 세대는 전통적 관계망에 기대는 경향이 적잖다. 학연·지연·혈연은 여전히 이들에게 가장 ‘나종 지니인 것’으로 남아 있다. 정유성 교수는 “명퇴를 당하고 장사라도 하려면 인맥을 다져두는 수밖에 없다는 이들도 있다”고 전했다.

이렇게 떠도는 영혼은 어느 순간에 자신이 없다고 느낀다. ‘영혼의 노숙’ 보고서에 인용된 40대의 고백이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아내 앞에서 나는 나를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아내의 남편입니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아이들 앞에서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 아이의 아빠입니다. 요것조것 조잘대는 막내의 물음에 만사를 제쳐놓고 대답부터 해야 하고, 이제는 중학생이 된 큰놈들 때문에 뉴스 볼륨도 숨죽이며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40대 남성은 자신감에 넘쳐 보이지만 속으론 자신이 없다.

자신을 찾을 방법은 없을까? ‘영혼의 노숙’ 보고서는 ‘상징적 자살’을 권한다. “지식인들이 계급·계층의 평등을 이룩하려면 하루에도 몇 번씩 상징적이나마 계급·계층적인 자살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적했던 브라질의 교육철학자 파울루 프레이레의 말처럼, 자신이 살아온 방식을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권리도 얻지 못한단 것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싸워서 얻는 ‘사냥꾼’에서 벗어나 삶을 가꾸고, 보살피며, 돌보는 ‘정원사’가 되라고 충고한다. 당장 아버지 교육에 참여하고, 감수성 훈련에 나서야 영혼의 안식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병리를 떠안은 그들을 위해 사회는 치유를 지원해야 한다. 다행히 중년 남성의 생활인권에 주목하는 징후가 곳곳에서 보인다. 참여연대 느티나무 아카데미는 오는 9월에 ‘남자들의 수다방’을 연다. 35~55살 남성들이 모여서 노래와 영화를 통해 얘기를 나누고, 서로에게 멘토가 되자는 취지다. 그렇게 변화는 시작된다.




‘영혼의 노숙’ 보고서 쓴 정유성 교수
불쌍한 ‘낀 세대’지만 불행을 자초한 면도


정유성 교수.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정유성 교수.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정유성 서강대 교수(교육문화학)는 ‘비명’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40대 직장남성 20명의 인터뷰를 하면서 그들이 보내는 구조 신호를 보았다. 정 교수는 “생각보다 40대 남성의 현실은 참담하고, 자기 인식은 비루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가 들었던 비명은 ‘한국 40대 직장남성들의 생활과 인권-사회의 병리, 육체의 손상, 영혼의 노숙’에 담겼다.

-40대 여성도, 30대 남성도 아니고 왜 40대 남성을 주제로 삼았나.
=이들은 우골탑을 세우면서 대학을 다녔지만, 공부하란 아버지의 뜻을 거역했다. 그리고 상징적 아버지인 정치적 독재자에 맞서 투쟁한 세대다. 끔찍한 단절을 피부로 경험한 첫 세대다. 이렇게 정치적·경제적 단절은 있었지만 이전 세대와 문화적 단절까지 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오늘이 궁금했다. 40대 남성은 생활인권의 측면에서 보면, 탄압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웰빙 인권’으로 보아도 수혜와 소외가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는 독특한 존재다.
-실제로 보니 어떤가.
=서구의 68세대는 아무리 못해도 하나는 남겼다. 그것은 탈권위다. 일상의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68세대 지식인은 자기부터 끈질기게 노력했다. 그러나 한국의 386세대는 일상에서 권위주의에 도전하지 않았다. 이전 세대처럼 가족의 부양자로서 권위도 여전히 향유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말처럼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 아이를 독재자로 키운 첫 세대다. 이렇게 ‘낀 세대’로 이들은 힘들지만, 불행을 자초한 측면이 있다. 남성 스스로 아내와 대화하고 자식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그런 자각이 부족하다.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제도의 문제를 넘어서 생활·문화·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사회는 바뀌지 않는다. 남성이 스스로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웰빙 인권의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더구나 40대는 삶의 전환을 꾀할 시기다. 무조건 살아남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무엇으로 살아남느냐를 생각해야 한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