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2천년 전 로마에 맞서 끝까지 싸운 곳, ‘골리앗이 된 다윗’은 진짜 마사다인 ‘가자’를 잊었다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사해를 마주 보고 덩그러니 우뚝 섰다. 유대 사막 서쪽 끝자락에서 도드라진 모랫빛 기암괴석은 황량한 광야의 장엄한 외침이다. ‘마사다.’ 유대왕 헤롯이 기원전 37~31년 그 바위덩이 꼭대기에 난공불락의 성채를 세웠다. 로마의 왕관을 써 유대의 미움을 산 헤롯이 말년에 안식처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가 죽은 지 75년이 지난 서기 66년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에 맞서 봉기에 나섰다. 싸움은 해를 넘겨가며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반란의 중심은 마사다로 모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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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73년 플라비우스 실바 로마 총독이 마침내 마사다 토포에 나섰다. 마사다 가까이에 숙영지를 마련한 로마군은 우선 성채를 철저히 봉쇄했다. 이어 장벽을 쌓기 시작했다. 마사다를 빙 둘러 쌓인 장벽은, 갇힌 이들에겐 철저한 고립을 뜻했다. 그럼에도 싸움은 이듬해 봄까지 이어졌다. ‘미국-이스라엘 협력재단’이 운영하는 ‘유대가상도서관’(www.jewishvirtuallibrary.org)의 자료를 보면, 유대 지도자 엘레아자르 벤 야이르가 이끈 당시 ‘반란군’은 어린이까지 합쳐 960여 명에 불과했다.
극우 성향 의원 “부시한테 배워라”
‘선택’의 순간은 여지없이 찾아왔다. 살아서 노예가 될 것인가, 차라리 죽음으로 맞설 것인가. 하늘이 내린 요새도 마지막 불길을 피할 순 없었다. 전사들이 모였다. 건장한 남성 10명이 선택됐다. 끝까지 마사다를 지키던 이들의 목숨을 그들 손으로 거뒀다. 그 10명 중 다시 ‘마지막 1명’이 선택됐다. 그리고 마침내 홀로 살아남은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렬한 최후였다. 이스라엘 정부는 “자기 땅에서 자유를 지키려는 의지의 상징”인 마사다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보존하고 있다.
5월15일 오전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마사다에 올랐다.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와 함께 케이블카를 타고 절벽의 꼭대기에 올라섰다. 는 이날 오후 이스라엘 의회에서 연설에 나선 부시 대통령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오늘 아침 마사다를 방문했다. 용기와 희생의 기념물이었다. 그 역사적인 곳에서 이스라엘 병사들은 ‘마사다가 다시 함락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이스라엘 국민 여러분께 말씀드린다. 마사다는 절대 다시 함락되지 않을 것이며, 미국은 여러분과 언제나 함께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인구는 700만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테러와 악에 맞설 때면, 3억700만 명이 함께한다. 미국이 이스라엘과 함께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이란과 레바논의 헤즈볼라, 가자지구를 장악하고 있는 하마스를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다. 이스라엘의 인권유린을 비판해온 국제사회에 대한 성토도 잊지 않았다. 그는 “민주주의는 인권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며 “그런 점에서 유엔이 중동에서 가장 민주적인 나라인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인권결의안을 지속적으로 통과시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그저 이렇게 짧게 입에 올렸다. “이스라엘은 건국 120주년도 축하하게 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주국가로서, 안전하고 번성하는 유대인의 조국으로서 말이다. …팔레스타인 주민들도 오래도록 꿈꿔온 조국, 인권을 존중하고 테러를 거부하는 법치국가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연설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여러분은 ‘약속의 땅’에 현대적인 사회를 이룩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유산을 지켜가는 국가를 이뤄냈다. …신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시길.”
서안과 가자로 갈려서 맞은 재앙의 날
부시 대통령의 연설에 이스라엘 정치권이 흥분한 것은 당연했다. 는 극우 정치인 제불룬 올레브 국민연합종교당 의원의 말을 따 “부시 대통령이 올메르트 총리에게 시오니즘이 뭔지를 한 수 가르쳤다”고 전했다. 극우 성향의 리쿠드당 출신인 루벤 리블린 의원도 “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들도 부시 대통령처럼 연설하기만 하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여전히 ‘마사다’에 살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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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각,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들어선 요르단강 서안에선 ‘재앙의 날’ 행사가 한창이었다. 1948년 시작된 팔레스타인 난민의 60년 신산스런 역사를 기리는 사이렌이 라말라의 마나라 광장에 울려퍼졌고, 서안 전역에서 크고 작은 집회와 시위가 잇따랐다. “이 사랑스런 땅에 두 민족이 살고 있다. 오늘 건국을 기념하는 이들과 나크바로 고통받는 이들이다.” 마무드 아바스 자치정부 대통령은 이날 미리 녹음된 연설에서 “팔레스타인 민중은 고통스런 기억 속에서도 고향 땅으로 돌아갈 희망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며 “점령자들이 우리 땅에서 떠날 시간이 됐고, 재난을 끝낼 때가 왔다”고 강조했다.
가자지구에서도 나크바 60주년 행사가 열렸다. 하마스 지지자 수천 명은 이스라엘 검문소로 몰려가 봉쇄정책에 저항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슬람 저항단체 지하드가 마련한 행사에선 500명의 어린이가 모형 박격포와 로켓을 손에 들고 가자시티 중심가를 행진했다. 매년 되풀이되는 나크바의 일상이다. 다만 올해는 한 가지 극명한 차이가 있다. 지난해 6월 이후 아바스 대통령의 파타당이 장악한 서안지구와 권좌에서 축출된 하마스가 장악한 가자지구로 팔레스타인이 철저히 갈려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군의 봉쇄로 고립된 채 식량과 의약품 등의 반입조차 쉽지 않은 가자의 고통은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대신 지난해 11월 미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에서 열린 중동평화회의 이후 허망한 평화협상만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다. 특히 수뢰 혐의로 사법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는 올메르트 총리에 대한 사퇴 압력이 커지는 상황이어서, 평화협상이 진전을 보일 것으로 보는 이들은 거의 없다.
무엇보다 협상의 당사자여야 할 하마스가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지난 2006년 1월 자치의회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집권에 성공한 하마스를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철저히 배척했다. 아바스 자치정부 대통령이 이끄는 파타당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린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장악한 뒤에는, 이스라엘의 봉쇄와 끝없는 무장공세가 매일이다시피 가자의 메마른 땅을 때려대고 있다.
“불과 석 달 전 내 아들 하삼의 장례를 치렀다. 대학에서 재정학을 전공했고, 장래 회계사를 꿈꾸던 21살 앳된 아이가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목숨을 잃었다. 지난 2003년엔 장남 칼레드를 땅에 묻었다. 나를 겨냥한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살던 집이 무너져내렸고, 딸과 아내도 부상을 당했다. 같은 건물에 살던 이웃들도 여럿 죽거나 다쳤다. 또 지난해엔 사위도 이스라엘군의 공세로 비명에 갔다.” 외과의사 출신으로 하마스 정부에서 외교장관을 지낸 마무드 알자하르는 최근 에 보낸 기고문에서 “하마스 없는 평화는 있을 수 없다”며 이렇게 썼다. 알자하르의 비극은 곧 가자의 일상이다. 누가 민주주의를 말하는가? 그 땅의 비극은 이미 ‘인도적 재난’으로 굳어졌다.
“하마스 없는 평화는 있을 수 없다”
부시 대통령이 이스라엘 의회에서 연설을 하던 날, 아랍 전역에 흩어져 살아가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재앙’을 상징하는 검은 풍선을 띄웠다. 이날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하늘을 가린 풍선은 모두 2만1195개. 풍선 하나는 나크바의 하루다. 골리앗이 돼버린 마사다의 후예들이 ‘다윗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검은 풍선은 늘어만 갈 터다. 그때까지 마사다의 참혹한 저항은 팔레스타인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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