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황스럽고 터무니없는데 웃게 된다, 부조리 개그 TV애니메이션
▣ 이명석 대중문화비평가
“인생은 자동차에 붙은 스티커처럼 치사해.”
살다 보면 술 한잔 마시고 싶은 날이 있다. 아무나 붙잡고 심야 영화관에서 밤을 새우고 싶은 날도 있다. 야구장에 가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야 속이 풀리는 날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여러분 각자가 알아서 하시기 바란다. 다만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마구 웃어버리고 싶은 날이 있다면, 내가 확실한 해결책을 알려주고 싶다. 을 만나면 된다. 긴 시간도 필요 없다. 5분이면 족하다.
화면에서 삐져나온 기이한 털 하나
케이블에도 여러 애니메이션 채널이 있지만, 솔직히 어른들이 들여다보며 키득거릴 프로그램은 잘 없다. 같은 홈코미디도 그럭저럭 볼 만하지만, 아무래도 밋밋하고 착한 결론이 간지럽다. 에서도 통렬한 개그들이 등장하지만 동글동글 귀여운 캐릭터들의 애교가 좀 과하다. 진짜 온몸의 신경세포를 찌르르하게 만들 제대로 된 개그를 만날 순 없을까? 얼마 전 심야의 TV에서 제대로 마주쳤다.
사실 건전한 시민들이 아무런 준비 없이 이 애니메이션과 대면하면 십중팔구 당혹감에 휩싸이리라. ‘숲의 요정’은 요정의 여왕을 흉봤다가 ‘남자 화장실의 요정’으로 전락하고, 마법봉을 휘두르는 소녀는 변신 중에 옷을 벗게 되는 장면을 두려워하는데 대신 그의 아버지가 회사에서 나체가 된다. 큐피드는 어느 남자의 연애를 강제로 이뤄지게 해준 뒤 천국으로 돌아간다. 그 길은 좁은 하수관인데 그 조임에 쾌감의 소리를 내지른다. 일본을 대표하는 시인 바쇼는 여행 중에 독버섯을 먹었다가 하이쿠(일본의 전통시)의 신이 삼바 리듬으로 따라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지? 화면에서 삐져나온 기이한 털 한 올이 코끝을 간질인다. 불쾌하잖아. 기분 나빠.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 털이 좀더 기어나오길 바란다. 차라리 재채기를 터뜨리게 더 세게 간질여줘! TV 화면의 검은 빈틈에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키득대는 나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비치고 있다.
스카이라이프·디지털케이블 애니박스와 케이블 챔프를 통해서 방송되는 의 원작은 이다. 일본 슈에이샤의 에 2000년 1월 시작해 지금은 에 연재를 이어가고 있는 개그만화다. 뻔뻔하게도 작가의 이름을 제목에 내세운 이 작품은 단행본 만화가 300만 부를 가볍게 돌파하는 인기를 모았고, TV 애니메이션으로 3기까지 제작·방영되며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보통 개그만화는 TV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의 애니메이션 버전으로 실력을 보여준 다이치 아키타로 감독이 원작의 감각을 제대로 되살리며 짧으면 1분, 길어야 5분에 불과한 에피소드로 개그 펀치를 날리고 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치사해.” “어른은 있잖아, 치사한 법이란다.”
에피소드마다 서로 다른 캐릭터들이 새로운 이야기를 펼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코드는 ‘치졸함’이다. 서유기의 주인공들이 오랜 고행 끝에 천축국에 도착하자, 삼장법사를 비롯한 일행들은 1등으로 골인하기 위해 갖가지 치사한 술수를 쓴다. 일본 개국 시대의 해리스 총영사는 미래 세계에서 온 듯한 거대한 탈것을 만들어 행진하는데, 그 이유는 페리 제독보다 더 강한 임팩트를 주어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서다.
치졸함에서 생존의 노하우를 배워보자
이런 쪼잔한 이기심은 자연스럽게 ‘궁상맞음’으로 이어진다. 작가는 스스로 블랙잭을 닮은 영웅으로 등장하는데, 적을 물리칠 때는 약국의 할인카드를 표창처럼 사용하고, 토끼 인형의 떨어진 팔은 반액 할인 스티커로 붙여준다. 사장은 과자에 사은품으로 들어가는 카드를 제대로 그리지 않는다고 직원을 혼내지만, 어차피 ‘짝퉁’이라 너무 닮게 그리면 곤란하다.
정말 터무니없는 착상들이지만, 이상하게도 그 리얼리티가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그래, 인생은 치사하고 구질구질한 거지. 화면 속의 어느 주인공이 자동차 유리에 붙은 스티커를 떼려고 애쓴다. 손톱으로 긁어도 삑삑 소리만 나고, 기껏 뗐더니 흔적이 더 흉측하다. 아 저게 삶이구나, 하고 깨닫는다.
키득대며 동감을 표하고 있으면 패배자다. 좀더 나아가 그 치졸함에서 생존의 노하우를 배워보자. 야쿠자가 내 아들 때문에 자기 자식이 다쳤다며 위자료를 요구한다. 돈이 없다니까 사과라도 하라고 한다. 그러면 묘하게 허리를 숙여 사과하는 척, 토끼 요가 자세를 취해보자. 상대가 짜증을 내면 요통에 좋은 삼각 자세를 취하며 사과를 해보자. 참다 못한 야쿠자가 시범을 보인다며 허리를 숙인다. 이제 아들과 나란히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자. 신경질적인 배경 리듬이 묘하게 사람의 신경을 건드리며 약올라 미치게 만든다.
은 1990년대 일본 만화계에 선풍을 불러일으킨 개그만화의 조류를 21세기로 이어왔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 개그 작품들 중에서는 등 과격파 악취미 만화들이 국내에 좀더 알려진 편이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는 요시다 센샤, 와다 라디오, 아이하라 고지 등의 부조리 개그, 무의미 개그가 그에 못지않은 활약을 보여왔다. 조금 스타일의 차이는 있지만, 이 계열의 또 다른 히트작으로는 우스타 교스케의 를 들 수 있다.
이 경향의 작품들은 거의 낙서와 같은 그림체로 온갖 패러디를 일삼으며 기성의 상식을 가차 없이 파괴해간다. 물론 60년대부터 이어온 개그만화의 기초가 ‘상식 파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80년대부터 떠오른 부조리 코드는 이제 ‘반전’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한다. 도대체 아무런 맥락도 연관도 의미도 없는 장치들이 등장하고, 거기에서 논리적 연결을 찾으려는 캐릭터들을 시니컬하게 조롱한다.
의 한 에피소드는 학습 애니메이션 흉내를 내더니, 갑자기 고추잠자리 알의 크기를 프로야구 선수 노모 히데오와 비교한다. 요정이 날아와 마법봉을 주는데 이름이 ‘홍명보’다. 이유는 없다. 가장 인기 있는 연속 에피소드로는 ‘명탐정 우사미’를 들 수 있는데, 토끼 우사미가 매번 눈을 커다랗게 뜨고 추리를 하는 듯하지만 언제나 범인은 변태 쿠마키치군이고 스스로 폭로당한다.
이렇게 적나라한 연예계 폭로는 없었다
90년대 부조리 계열의 만화는 편집부에 팩스로 원고를 보내도 될 만큼 그림이 유치하고 조악하다는 의미로 ‘팩스 만화’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역시 이러한 키치적 성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데, 애니메이션 버전은 그 표현을 적절히 가져오며 매번 실험적 영상을 보여준다. 칸의 모양이 작아졌다 커졌다 하는 출판만화의 프레임을 옮겨오기도 하고, 만화에서 기묘한 모양으로 그려지는 의성어도 그대로 표현한다. 골판지에 그린 캐릭터 얼굴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놀란 표정을 만들어내는 등 주옥같은 유치함이 이어진다.
지금까지의 에피소드 중에서 최강은 역시 1기 4화의 ‘종말’ 편이라고 여겨진다. 지구에 대운석이 접근하면서 종말이 눈앞에 다가오자, 방송사 특집 토크쇼에 등장한 유명인들은 저마다의 본성을 커밍아웃한다. 나는 최근 몇 년간 연예계의 위선을 저렇게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작품을 본 적이 없다. 마술사와 초능력자의 위치를 뒤집는 지적 비판 정신까지 스며 있다.
방송시간: 애니박스 5월30일 금 밤 9시/ 6월11일 수 오후 5시30분/ 6월13일 금 저녁 7시30분·챔프(케이블) 토요일 새벽 1시·TU(위성DMB)애니박스 매주 화~금 오후 4시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받는 사람: 대통령님♥’…성탄 카드 500장의 대반전
서태지 “탄핵, 시대유감…젊은 친구들 지지하는 이모·삼촌 돼주자”
한덕수, 내란 엄호 논리로 쌍특검법 거부…정국 불안 고조
15년 전 사별 아내 이야기에 울컥…고개 숙인 헌법재판관 후보자
이승환·예매자 100명, 대관 취소 구미시장에 손배소 제기한다
메리 ‘퇴진’ 크리스마스…광화문 시민들이 바란 성탄선물은
[영상] 이재명 “한덕수 또다른 국헌문란 행위, 반드시 책임 물을 것”
허락 했을까요 [그림판]
구미 공연 취소된 이승환에…강기정 시장 “광주서 합시다”
[단독] 입법조사처 ‘한덕수, 총리 직무로 탄핵하면 151명이 정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