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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는 고소한 냄새가 난다

등록 2008-01-18 00:00 수정 2020-05-03 04:25

[놀이] 정문 앞 광장에서 맥주 마시며 영화 즐기는 용인 태영 데시앙아파트

▣ 김경욱 기자dash@hani.co.kr

경기 용인시 풍덕천2동 태영 데시앙아파트 광장에는 주말마다 고소한 냄새가 난다. 아이들은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보고, 어른들은 아이들의 ‘견제’를 피해 팝콘을 안주 삼아 생맥주를 홀짝인다. 이곳 주민들은 매주 토요일 해가 지면 아파트 정문 앞 광장에 모여 함께 영화를 즐긴다. 무료로 제공되는 팝콘과 맥주의 비용은 주민자치회 회비로 충당한다. 겨울철에는 지하주차장이 상영관이다.

100명 자리에 400명이 모이다

이곳 주민들은 2006년 6월 게시판에서 ‘주민과 함께 보고 싶은 영화를 뽑아주세요’라는 공고를 접했다. 주민자치회 대표 고부재(46·회사원)씨가 붙여놓은 것이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주민들이 많은데 영화를 상영하면 많이 모여들 테니 서로 친해지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생각에서였다. 6월17일 고씨는 광장에 하얀 천으로 스크린을 설치하고 집에서 쓰던 컴퓨터를 들고 나왔다. 누군가 쓰다 버린 스피커는 일찌감치 확보해둔 상황이었다.

광장에서 영화를 틀어준다는 말에 50여 명의 주민들은 “이게 뭔 일인가” 싶어 하나둘 모였다. 첫날은 컴퓨터와 스피커가 부실해 원활하게 상영되지 않았다. 사람들도 곧장 자리를 떴다. 실패였다. 하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닌가. 고씨는 컴퓨터와 스피커를 교체하고 프로젝터도 새로 구입했다. 스크린도 처음 상영 때보다 두 배 정도 큰 것으로 바꿨다. 2주 뒤에 다시 영화를 틀었다. 처음 상영했을 때와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모였지만 자리를 뜨는 이들은 적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산책을 하던 주민들까지 합세했다.

고씨는 내친김에 팝콘 기계를 구입하고 생맥주를 뽑아 마실 수 있는 기계도 빌렸다. 팝콘과 생맥주를 공짜로 먹으며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플라스틱 의자 100개를 구해 깔아놓았지만, 역부족이었다. 400여 명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의자를 치우고 돗자리를 깔았다. 너나 없이 일손을 거들었다. 시간이 지나며 인근 삼성병원 환자들까지 휠체어를 타고 오기도 했다. 영화가 끝나자 “2차!”를 외치며 이웃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영화로 시작된 소통은 주민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부녀회, 자치회 등 주최 쪽만 참석해오던 단오 윷놀이 대회나 동지 팥죽나눔 행사, 정월 대보름 행사에 자발적으로 주민들이 모였다. 사람들이 모이니 아이디어도 모였다. 어린이들은 “아파트에서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도서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어른들은 “방전된 자동차를 단지 내에서 충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람들이 모이니 아이디어가 모이네

주민자치회는 자동펌프를 관리사무소에 비치해 아이들도 쉽게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을 수 있도록 했다. 또 지난해 9월 잘 사용하지 않는 입주자대표 회의실을 비우고 도서관으로 개조했다. 도서관이 생기자 시험 기간에는 자리를 맡기 위해 중·고등학생들이 관리동 앞에 길게 줄을 서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방전된 자동차는 지하주차장 청소를 위해 구입한 발전기를 이용해 충전한다.

주민들은 아파트 생활에도 정이 있고 재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들은 이제 또 다른 ‘놀이’를 준비하고 있다. 5300여만원을 들여 광장 한켠의 경비실을 옮겼다. 광장을 넓혀 연극이나 음악 공연을 위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다. 작은 아이디어와 노력이 모여 사람 사는 냄새가 고소하게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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