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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하여라, 티베트의 오체투지

등록 2007-09-14 00:00 수정 2020-05-03 04:25

높이 펄럭이는 오성홍기와 감춰진 달라이라마 사진, 티베트 난민에게 꺼내보여준 당신들이 직접 보았어야 할 그곳 풍경들

▣ 라싸(티베트)·포카라·카트만두(네팔)=글·사진 임종진 사진작가
stepano0301@naver.com

마음이 급했다.

시간은 저만치 지나가는데 갈 길은 멀고, 운전기사는 길까지 헤맸다. 강하게 쏟아붓는 빗줄기와 곳곳에 입을 벌린 웅덩이 투성이인 낡은 도로는 택시를 마치 굼벵이 기어가듯 더디게 만들었다. 마음이 급한 이유는 그들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점점 불안감이 더해지면서 너무 섣부른 약속을 했나,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자왈라켈 난민촌을 다시 찾다

‘그래. 아무도 없을 거야. 사실 꼭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좀 늦으면 어때.’ 스스로 위로를 곁들이지만 심장은 빠르게 콩닥거렸다. 어쨌거나 누가 기다리든 그렇지 않든 그곳에 가야만 했고 애꿎은 운전기사를 재촉해 닦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약속한 오후 6시를 훌쩍 넘긴 시간은 가속 페달을 밟은 듯 빠르게 속도를 냈다. 그만큼 입술도 타들어갔다.

‘그러면 그렇지.’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네팔 북부 포카라 시내 외곽에 있는 자왈라켈 티베트 난민촌. 마을 들머리에 도착하자 한 시간이 넘도록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노인 4명이 벌떡 일어나 반긴다. “혹시나 네팔 경찰에게 해를 당한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면서 “이젠 마음이 놓인다”고 환하게 웃는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거듭되는 사과도 받을 일이 없다는 듯 손사래를 친다. 늙은 그들은 티베트 난민 1세대들이다.

약속은 전날 오후에 있었던 난민촌 방문길에 몇몇 노인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에 우연히 이뤄졌다. 티베트 여러 지역을 여행하고 왔으며 사진을 많이 찍었다는 말에 그들이 조심스레 “그 사진들을 볼 수 없겠느냐”고 부탁을 해온 것이다. 사진이 저장된 노트북 컴퓨터를 가져오려면 다음날 다시 와야 하는데, 그날은 히말라야 산행이 계획돼 있었다. 조금 망설였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내겐 단순한 여행지였던 티베트는 그들에겐 돌아갈 길이 막힌 고향이자 한이 서린 땅이기 때문이다. 결국 원래 일정인 네팔 트래킹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 트래킹 출발점인 나야푸르까지만 들르기로 하면서 “내일 오후 6시까지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히말라야의 설경에 잠시라도 묻히고 싶은 원래의 계획은 그들의 간절한 눈빛에 살그머니 사라졌다. 사실 나야푸르까지 다녀오는 내내 그들의 눈빛을 털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의 더딘 속도가 못내 가슴을 후벼댔던 것이다.

마을회관으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20여 명의 주민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회관 안에서 노트북 액정 화면의 푸른빛이 주변을 밝혔다.

“여기가 라싸(티베트 수도)예요. 여기는 장족거리에 있는 재래시장이고요.”

50년 만에 보는 고국 땅의 풍경에 그들은 감탄을 연발했다. 한 컷 한 컷 꼼꼼히 살펴보면서 혹시나 자신이 아는 지역이 나오지 않을까 시선을 거두지 못했고, 어떤 나이 지긋한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액정을 더듬으며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눈빛들이 펄펄 살아 튄다.

“여기는 포탈라궁이지요. 이날은 인민해방군들이 광장에 많았어요.”

붉은 오성홍기를 든 인민해방군들이 포탈라궁 앞 광장을 행진하는 사진을 보자 ‘아휴’하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과거 티베트 독립투쟁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동포가 살해되는 모습을 뚜렷이 기억하는 1세대들에겐 인민해방군은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티베트인들의 상징인 포탈라궁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인민해방군들의 행위에 그들은 분노를 드러내기도 했다.

중국어와 영어로 현란한 텔레비전

“팅그리 마을이에요. 네팔로 오는 길에 있지요. 아, 여기는 카루샹이라는 곳이네요.”

다시 이어지는 여러 지역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눈빛이 밝아졌다. 중국의 지배를 받기 전 티베트는 타클라마칸사막과 히말라야 북부를 아우르는 한반도의 12배가 넘는 땅을 가지고 있었다. 드넓은 평원과 뛰어난 자연환경 속에서 유목민의 기개를 맘껏 누렸던 자부심과 나라를 잃은 타향살이의 서러움이 그들의 표정에서 홀연히 교차됐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좀 행복해 보이더냐, 불행해 보이더냐”고 묻는다. 누군가 조용히 기억을 더듬듯이 입을 열었다.

“열다섯 명이 함께 산을 넘었지. 자고 나면 두세 명씩 죽어 있었어. 결국 끝까지 남은 것은 겨우 세 명이었지.”

다른 누군가가 이어받았다. “포탄이 마구 떨어지는 길을 헤치고 도망 나왔어. 살아남은 게 기적이지.” 누구나 할 것 없이 한마디씩 말문을 열었다. 눈시울을 붉혀가며 여러 차례 사진을 반복해서 보는 그들을 지켜보다가 티베트에서 목격한 수많은 형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라싸에 도착했던 첫날 게스트하우스에서 무심코 텔레비전을 켰다. 40여 개의 다양한 채널이 저마다 눈을 홀리며 지직거렸다. 무협물과 홍콩·할리우드의 액션물, 실시간 중계라는 스포츠물, 서너 개의 한국 드라마 등 현란한 영상물들의 뒤범벅이었다. 거기에 한국의 유명 연예인이 나오는 광고까지 끼었다. 모두가 중국어요, 영어다. 미련한 생각일까. 혹시나 기대했던 티베트의 문화와 역사를 가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단 하나도 볼 수 없었다.

티베트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긴다는 라싸의 조캉사원의 새벽. 길게는 몇 년을, 짧게는 수개월을 땅바닥에 온몸을 내던지며 한 걸음 한 걸음 찾아온 수많은 티베트인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오체투지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한없이 자신을 낮춰 임하는 그들의 모습은 경외감에 달리 보였고, 지켜보는 것 자체가 대단히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단순히 어떤 열정이나 종교적 것과는 사뭇 달랐다. 자신을 낳아준 대지와 몸을 맞닿게 하는 그들은 온몸을 땅에 던짐으로써 삶의 고단함과 여유로움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도 그들이 보여주는 환한 미소는 스스로 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어떤 경지와 같다. 중국의 지배를 벗어날 어떤 기미조차 없는 것이 현실인 상황에서 얼핏 미련스러워 보일 수도 있는 그들의 의식은 나라 없는 서러움이든, 삶의 무게든, 수많은 번민이든 모든 것을 하나의 가치로 바꾸었다. 이미 역사를 거스른 채 은밀히 진행되는 중국화의 물결이 티베트인들의 정신까지 범람하지는 않은 듯 보였다.

10살 이하 아이들에게 난민증이 없어

다음날 오후 티베트 라마교의 상징인 포탈라궁 앞 너른 광장에는 중국 인민해방군 창설 8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기록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짙은 국방색 제복을 차려입은 군인들은 총검으로 무장한 채 감독의 지시대로 붉은 오성홍기를 올려 세운 채 걷고 서기를 반복했다. 레일 위에 놓인 카메라는 포탈라궁을 배경으로 군인들의 움직임을 포착했고, 높은 계급의 한 장교는 더 힘있게 손발을 맞추라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언제부터 자기들의 땅이었을까. 누구를 해방시킨 것인지 알 수 없는 인민해방군들은 시시덕거리며 점령군으로서의 우위를 거만하게 드러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오래된 주택가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이 땅에 주저앉아 딱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낡고 소담스런 빈민가다.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여성들을 지나 안쪽으로 쭉 들어갔다. 목공인 실로(49)와 눈이 마주쳤다. 반가이 인사를 나눈 뒤 그의 권유로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부인 파쌍(47)은 계속 야크버터차를 건네며 환히 웃었다. 사는 데 어려운 것은 없느냐는 질문을 부질없이 건넸더니, 라마교의 경전이나 종교적인 문양을 조각해 내다 파는 목수일로 월 40위안(약 6천원) 안팎을 번다고 답했다. 라싸대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학교를 졸업한 뒤 식당이든 어디에든 취직해서 가사를 돕고 싶다고 말했다.

가난하지만 단란한 가족 풍경이 눈에 박힌다. 아쉬운 인사를 나누며 집을 나서려는데 벽면에 놓인 가구 유리창 너머로 달라이라마의 초상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중국 공안의 감시가 심해 평소 내놓지 못한다는데 괜찮으냐고 물으니 “요즘 들어 밖에 내걸거나 외부에 알리지만 않으면 그리 심하게 단속하지는 않는다”면서 “눈치를 보며 가끔 꺼내놓는다”며 웃는 모습이 선하다. 중국 당국은 티베트인 가정에서 ‘도망자’가 생기면, 남은 가족에게 1500위안(약 18만6천원)의 벌금을 부과한단다.

다시 네팔의 자왈라켈 티베트 난민촌. 인도 다람살라 티베트 망명정부에서 파견된 관리인 툽텐 초펠(45)은 네팔 전역 10여 군데의 티베트 난민촌에 10만여 명의 난민들이 살고 있다면서 2001년 독립을 희망하는 정치집회를 끝으로 현재는 전혀 허가를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어떤 형식으로든 독립을 위한 활동에 힘을 쏟고 싶다는 그는, 더 아쉬운 것이 1998년 이후 네팔 정부가 더 이상의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때부터 난민촌에서 태어나는 2세들에게도 난민증을 내주지 않는다면서 혹시 불법 체류자로 몰릴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카트만두 티베트 난민촌에서 만난 쉐랍 텐징(30)도 비슷한 걱정을 했다. 티베트의 명절을 지키고 역사를 가르치며 자신들의 전통과 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그는, 네팔에서 태어났고 처음 다람살라 티베트 망명정부에 갔을 때 가장 벅찬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조국이 있다는 게 너무 떨리고 감격스러웠지만 그래도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티베트 땅이다. 서른 살이 되도록 아직 가보지 못했다.” 그는 세 번이나 방문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티베트를 방문할 수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망명정부를 부정한다는 서명을 해야만 가능하단다.

난민증은 이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신분증이다. 그것이 있어야만 그나마 소소한 자영업이나 카펫 제조업, 기념품 제조업 등을 할 수 있다. 난민촌을 떠나서는 어떤 경제 행위도 할 수가 없다. 1998년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에게도 난민증을 발급해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신분의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 중국 정부의 원조에 기댄 네팔로서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계는 정직하지 않다”

가만히 옆 자리를 지키던 타쉬 니마가 조용히 입을 열더니, 같은 말만 되풀이해댄다.

“Only 6 hours talking! 6 hours!”(6시간밖에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고작 6시간!)

그는 열 살도 되지 않았을 때 형 둘과 함께 히말라야를 넘었다. 그는 여섯 번의 면회 신청 끝에 국경 근처에서 이뤄졌던 부모님과의 감격스런 만남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티베트를 탈출할 당시 자신의 나이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글도 읽지 못했던 그는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 26년 만에 만난 부모님과 겨우 6시간을 함께 있었다. 자신은 두툼한 방한복과 얼마의 돈을 주었고, 부모는 통째로 말려온 양 한 마리를 건넸다. 울다가 웃다가 준비해온 음식을 함께 먹었고, 짧은 만남 뒤 기약 없는 이별이 슬퍼 한이 맺혔다. 같은 난민촌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한 타쉬는 이 마을의 직업훈련학교에서 전기기술 교사로 재직 중이다.

“티베트의 영혼이 유린당하고 있다.” 니마 스테튼(54) 난민촌장은 “중국은 광활한 티베트의 자연 유산을 모두 가지려 한다”며 “고원에 매장된 우라늄이 그들의 목표”라고 말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사용할 금·은·동메달도 모두 티베트의 자원으로 만들어질 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제적 이득만 원하지 티베트의 독립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계는 정직하지 않다. 정면으로 맞서 중국의 부당한 행위를 지적하지 않는 것이다. 티베트의 인권을 무시하면서 평화를 말하는 올림픽을 중국에서 연다는 게 말이 되는가.”

날이 밝았다.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로 난민촌도 분주해진다. 여느 마을과 겉으로 보아 별다른 차이가 없다. 집집마다 문이 열리고,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학교에 간다. 구멍가게의 철문이 걷히고, 주인장은 물건을 정돈한다. 어느 누구나 자신에게 놓인 하루의 여백을 채운다. 날이 어두워져도 마찬가지다. 모두 거두어들이고 집으로 돌아와 고단함을 달랜다. 그러나 모두 난민촌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일 뿐이다. 돌아갈 고향이 그리운 티베트 난민들의 반복되는 하루일 뿐이다.



죽음 같은 순례의 길

1950년부터 매년 2500~3500명씩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로 다시 인도 다람살라로

지난해 9월30일 오전 8시께, 20~30명의 티베트인들이 해발 5700여m에 이르는 고산지역인 서부 낭파 국경지역을 넘어 네팔로 향했다. 그들이 국경을 넘는 모습은 초오유 산자락에서 등반 중이던 수십 명의 산악인들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한 발의 총성이 설원을 갈랐다. 중국 국경수비대원들이 망명길에 오른 티베트인들을 겨냥해 총격을 퍼붓기 시작한 게다. 당시 현장에 있다 중국군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티베트 난민들의 모습을 우연찮게 카메라에 담은 루마니아 출신 카메라맨 세르기우 마테이는 “마치 개를 잡듯 총을 쐈다”고 말했다. 마테이가 찍은 화면은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를 타고 전세계로 퍼지면서 티베트인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중국이 티베트 땅의 ‘주권’을 차지한 것은 1950년이다.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은 지금껏 매년 2500~3500명의 티베트인이 히말라야의 험준한 산맥을 뚫고 ‘자존심’을 찾아 꾸준히 네팔로 향해 왔다. 난민들은 그곳에서 다시 인도 땅 다람살라의 망명정부까지 험난한 여정을 이어간다. ‘티베트를 위한 국제 캠페인’(ICFT)이 해마다 내놓는 ‘위험한 월경-티베트 난민들의 곤경에 영향을 끼치는 조건들’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보면, 지난 2006년에도 모두 2600여 명이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 있는 티베트 난민접수센터에 새로 등록을 했다.
네팔 땅에서 피어난 민주화의 불꽃도 그곳에 삶을 의탁한 티베트 난민들의 삶엔 한 줌 볕이 돼주지 못했다. 지난해 5월 평화협상을 통해 마오주의 반군 진영이 오랜 내전을 그치고 정치권에 진입했지만, 오랜 세월 중국의 티베트 봉쇄정책을 지지해온 독재자 갸넨드라 국왕 시절의 정책은 흔들림 없이 유지되고 있다. 올 들어 탕자쉬안 국무위원과 우다웨이 외교부장 등 고위급 인사들의 네팔 방문이 꼬리를 물면서, 네팔 정부는 자국 땅에서 ‘반중국 활동’을 철저히 봉쇄할 것을 새삼 약속했다. 그리고 중국 당국은 네팔 국경지역 감시망을 더욱 강화했다. 그럼에도 ‘순례의 길’에 나서는 이들은 줄지 않고 있다. 정치·종교적 박해와 사회·경제적 차별을 피해 히말라야를 넘는 티베트인들의 목숨을 건 탈출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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