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칼럼 > 김남희 칼럼 목록 > 내용   2005년05월18일 제560호
티베트 소녀 데팔의 미래를 위해

[김남희의 길 위에서 주운 한 마디]

네팔 - “늘 웃지는 마. 가끔씩은 울기도 해야 건강에 좋은 거야.”

▣ 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인도에서 네팔로 가는 버스 안, 내 옆자리에는 한 소녀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무릎에는 헤세의 <데미안> 영문판이, 그 자세만큼이나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데팔, 나이는 열여섯. 물오르는 봄날의 나무만큼이나 싱싱한 나이였다. 데팔은 네팔에서 나고 자란 티베탄이었다. 네팔 땅에도 티베트에서 망명해온 사람들이 제법 살고 있었고, 그들 중 일부는 티베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인도의 다람살라 같은 곳으로 자녀를 유학 보내고 있었다. 데팔 역시 북인도의 무수리에서 티베탄 기숙학교에 다녔다. 그녀는 방학을 맞아 집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앙케트’라는 작은 노트의 사연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끝에 그녀가 제법 두꺼운 노트 한권을 내게 내밀었다. 아, 그건 내가 꼭 그녀의 나이였을 때 친구들과 주고받던, ‘앙케트’라는 이름의 설문과 답이 적힌 노트였다. 학년이 끝나거나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이면 교실 곳곳에 이런 노트가 돌고는 했다. 거기에는 그 나이 또래가 궁금할 법한 질문과 답들이 적혀 있었다. 학교에서 혹은 교회에서 그런 노트를 친구들과 돌리며 우리만의 비밀과 두려움, 희망을 그려보던 기억이 아릿하게 떠올랐다. 티베트 소녀들도 그렇게 사춘기의 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 환하게 웃고 있는 카트만두의 어린 소녀들.

열다섯 혹은 열여섯. 그 나이에 품는 세상에 대한 궁금함과 두려움은 어디나 다 비슷한지, 질문의 결은 닮아 있었다. 좋아하는 배우와 가수, 가장 기뻤던 순간, 슬펐던 기억, 존경하는 인물, 미래의 꿈…. 아이들은 정성을 다한 필체로 답을 적고, 어여쁜 그림이나 사진을 붙여놓기도 했다. 좋아하는 배우를 묻는 질문에 그들은 인도인 배우 이름을 적었고, 재미있게 본 영화도 인도의 국민 배우 샤루칸이 나오는 인도 영화, 좋아하는 가수와 노래도 전부 인도산이었다. 존경하는 인물을 묻는 질문에는 대부분 ‘부모님’이나 ‘달라이 라마’라고 답했고, 가장 두려워하는 건 ‘다가오는 미래’ 또는 ‘기말시험’ 같은 것이었다.

인생의 철학 혹은 삶의 좌우명을 묻는 자리에 적힌 말들은 이러했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조국을 잊지 말자.”(그들 조국의 처참한 상황이 떠올라 마음이 젖어왔다.) “공부 열심히 해서 부모님의 꿈을 이루어드리자.”(나의 꿈을 이루자가 아닌 부모님의 꿈을 이루어드리자라니?) “최선을 다해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자.” 인생의 목적을 묻는 질문에 한 소녀는 데이비드 베컴을 만나는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친구들은 데팔에게 이런 당부의 말을 남겼다. “인생은 아름답지만 너무 짧아. 그러니 즐기고,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렴.” “늘 웃지는 마. 가끔씩은 울기도 해야 건강에 좋은 거야.” “천번을 실패했다면 한번 더 시도하자.” 눈이 아파왔다. 늘 웃지는 마라는 그 말이 내게는, 늘 울지는 마라는 말로 들렸다. 천번을 실패했다면 한번 더 시도하라니. 한번만 실패해도 두번 시도할 용기를 내기 어려운 게 삶의 여정이라는 걸, 어린 그들이 알고 있을까?


△ 나라없이 떠도는 티베트인들은 네팔 땅에도 짐을 내려놓고 정착했다. 카트만두의 티베트 불교 사원.

나라 없는 설움을 알아요?

영어와 티베트어, 힌디어, 네팔어를 동시에 배우며 자라는 저 소녀들. 좋아하는 가수와 배우는 죄다 인디언인데, 인디언도 네팔리도 완벽한 티베탄도 되지 못하는 그들. 가장 두려운 것을 묻는 난에 대부분이 다가오는 미래라고 적는 아이들. 문득 다람살라에서 카페 ‘리’를 운영하는 내 친구 잠양이 생각났다. 십대 시절 무섭게 방황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그는 내게 반문했다. “누나의 고민은 누나 스스로 선택하거나 만들어낸 환경에서 비롯됐잖아요? 나는 아니었어요. 내 고민은 전부 내 삶의 외적 조건, 내가 사라진 나라의 국민으로, 남의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티베트라는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났다는 것, 거기서 발생했단 말이에요. 그건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거잖아요?” 나라 없는 설움을 내가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내가 알 수 있는 건, 티베트의 수많은 청소년들이 네팔에서, 인도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배낭을 메고 길 위에 나선 이후, 내 이름 석자와 상관없이 ‘한국인’이라는 그것 하나로 내가 규정되고 받아들여지는 일들을 겪어왔다. 그제야 ‘조국’이라는 것, 내가 나고 자란 나라의 이름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구속하며 평생을 따라다닐 숙명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라 없이 망명 정부를 꾸려가는 이 티베탄들의 숙명이 내 것보다 좀더 비감한 것임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트만두에서 데팔과 헤어지며 나는 그녀의 꿈을 위해, 미래를 위해 기도했다. 사과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가는 그 어린 소녀의 어깨는 가냘팠다. 그 가냘픈 어깨 위에 내려앉을 삶의 예외 없는 무게를 미리 생각해보며, 운명의 여신이 있다면 조금은 그녀를 편애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