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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럽게 솟는다 용산 615m, 중구 960m

등록 2007-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전국에 추진 중인 500m 넘는 건물만 6곳…한국은 왜 수직을 열망하는가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한국은 열풍이 지배하는 사회다. 4800만 명으로 이뤄진 거대한 사람의 무리가 하나의 사회현상에 ‘꽂히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사람들은 무서운 속도로 집중하고, 파고들고, 싸우며, 결국은 세계가 놀랄 만한 성과를 이뤄낸다. 그 지나친 쏠림이 만들어내는 우스꽝스러운 풍경들은 때때로 서구인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입바른 소리 잘하는 지식인들의 술자리 안줏거리가 되기도 한다. 영어 열풍이 그렇고, 아파트에 대한 짝사랑이 그러하다. 서울 용산에 600m가 넘는 초고층 빌딩 건설이 들어선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의 느낌도 그와 비슷한 것이었다.

마천루 순위가 여자양궁 순위?

수직에 대한 한국 사회의 열망은 이미 정상의 범위를 뛰어넘은 지 오래다. 서울 용산 물류센터 터에 건설이 추진되고 있는 최고 615m짜리 건물을 포함해 전국에서 추진 중인 500m 이상의 초고층 건물은 서울 송파구 잠실 제2롯데월드(555m·112층), 마포구 상암동 국제비즈니스센터(580m·130층), 중구 금융관광허브 초고층 빌딩(960m·220층), 인천 송도 인천타워(610m·151층), 부산 롯데월드(510m·107층) 등 모두 6곳에 이른다. 2007년 3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대만 ‘타이베이 101’의 높이가 509m에 이르는 점을 생각해볼 때 한국 사회가 보여주는 ‘수직에 대한 열망’의 정도가 어느 수준인지 짐작해볼 수 있다(머잖아 한국이 차지한 세계 마천루 순위는 세계 여자 양궁 선수권대회 순위와 비슷해질지 모른다).

구영민 인하대 건축학과 교수는 대한건축사협회에서 내는 월간지 2006년 10월호에 발표한 논문 ‘수직의 욕망’에서 “아시아 지역에서 앞다퉈 초고층 건물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며 “(이는) 동시대 다른 국가들에 자국의 경제적 풍요와 성장을 과시하려는 상징성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최고 건물들은 그 시대의 정신을 반영해왔다. 해방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함경남도 흥남에 세계 최대의 질소비료 공장을 갖고 있던 노구치 시다가후가 1938년에 지은 8층 높이의 반도호텔(지금의 을지로 롯데호텔 터)이었다. 이 건물은 광복 뒤 주한 미군사령부와 미 24사단 사령부로 쓰였고, 이 호텔에 사무실을 둔 하지 중장을 만나기 위해 이승만·김구·김규식·김성수 등 정계 요인들이 자주 발걸음을 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경제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서울에는 KAL빌딩(1960년, 82m·23층), 상업은행 본점(1965년, 54m·12층), 유네스코빌딩(1966년, 52m·13층), 에스컬레이터가 최초로 설치된 조흥은행 본점(1966년, 63m·15층), 쌍용빌딩(1969년, 77m·18층) 등이 건축됐다.

14층 빌딩이 63빌딩으로 둔갑한 이유

그 무렵 건축된 건물 가운데 군계일학은 1971년 청계천 변인 종로구 관철동에 들어선 삼일빌딩(114m)이었다. 이 건물은 여의도에 63빌딩이 지어지기 전까지 세운상가, 청계고가와 더불어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도심의 ‘랜드마크’였다. 만주국 중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해방을 맞은 박정희는 부족한 자신의 민족적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전국 곳곳에 민족 영웅들의 동상을 지었고, 국기에 대한 맹세와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어 민족주의적 감성을 불러일으키려 노력했다. 그 당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듯 건물의 층수는 3·1운동을 상징하는 31층으로, 이름도 삼일빌딩으로 정해졌다.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주춤했지만, 1980년대 ‘3저 호황’의 여파로 한국 경제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대한생명이 협소한 남대문 사옥을 버리고 새 사옥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1978년 2월10일이었다. 애초 대한생명은 이후 ‘63빌딩’이라는 이름이 붙은 높이 249m짜리 초고층 건물을 지을 계획은 아니었다. 대한생명이 1996년에 펴낸 를 보면 처음 대한생명이 서울시에 제출한 건축허가 내용은 지상 14층, 지하 1층짜리 평범한 건물이었다. 건물이 당대 동양 최대 건물로 거듭나게 된 배경에는 88년 서울올림픽이라는 ‘국가 대사’와 신군부의 압박이 자리잡고 있었다. 올림픽 유치를 희망한 당시 신군부는 일본에 63층짜리 고층 빌딩이 신축되자, 대한생명 쪽에 동양 최고의 빌딩을 지을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 때문이었는지 63빌딩 옥상에는 직경 5.5m, 높이 8m짜리 성화대가 설치돼, 대회 기간에 밤새 불을 밝혔다고 한다. 빌딩 꼭대기에서 불타고 있는 성화가 건물 밑에서도 보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 목동 하이페리온 A동(256m·69층)과 도곡동 타워팰리스 G동(262m·69층) 등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설 때까지 63빌딩은 한국 경제의 성공신화의 대명사로 세인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용산 물류센터 터에 세계 최고 수준의 초고층 건물을 세운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뜻밖에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1950년 7월16일 그 터를 폭격하기 위해 떠올랐던 50여 대의 B-29 폭격기가 내는 굉음이었다. 1950년 6월25일 전쟁이 터진 뒤 대한민국 정부가 수원을 거쳐 대전으로 옮겨간 것은 1950년 6월27일 오후의 일이었다. 전쟁이 일어날 때 서울의 인구는 150만 명이 조금 넘었고, 전쟁이 끝나던 해인 1953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그 이전의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는 67달러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용산 물류센터는 화물들이 모이는 물류 중심지였다. 미군은 용산의 철도시설 조차장과 공작창을 폭격해 인민군의 보급로를 원천 봉쇄하기를 기대했다. B-29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폭격기로 날개 좌우의 길이가 70m에 달하는 ‘하늘의 요새’였다. 그 거대한 비행기들이 서울 하늘을 뒤덮고 있는 장면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오싹하다. 그 폭격으로 동쪽으로는 이촌동부터 서쪽으로는 원효로를 지나 마포구 도화동 공덕동까지 이르는 지역이 쑥대밭이 됐다. 국방부 정훈국이 1953년에 발행한 제4부 통계편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 때문에 사망한 시민을 4250명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중 용산에서 죽은 사람이 전체의 37.3%인 1587명에 이른다. 서울에 전쟁 고아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도 그 폭격 이후부터라고 한다. 건물이 들어서는 곳은 B-29의 폭격 목표 지점이었던 바로 그 터다.

건물부터 한-미 자유무역협정까지…

수많은 돈을 퍼부어 굳이 필요도 없는 초고층 빌딩을 지으려고 기를 쓰는 한국인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뤄낸 기적 같은 수많은 성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배고프고 불행하다. 성취에 대한 집착은 B-29에 폭격 맞던 시절부터 한국인들의 유전자에 각인된 서구에 대한, 특히 미국에 대한 열등감의 또 다른 표현은 아닐까.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행동하지만 용산의 615m짜리 건물부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까지, 한국은 열등감이 지배하는 나라인지 모른다.

* 손정목 1권(2003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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