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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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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안에 당신 있다

등록 2006-12-28 00:00 수정 2020-05-03 04:24

직업·사회적 직위·거주 지역 고스란히 드러나는 달력의 사회학…명화 들어간 10만원짜리 VIP용 달력은 ‘선택된 소수’의 품으로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주부 강홍자(59)씨는 낯선 집에 갈 때마다 그 집의 달력을 유심히 살펴본다. 달력은 한 사람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망을 비추는 정직한 거울이다. 달력에는 그 사람이 다니는 회사, 거래하는 은행이나 보험사, 고향, 종교는 물론이고, 예술적 취향과 교양 수준 등을 가늠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정보들이 녹아 있다. “달력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강 알 수 있거든요.” 그는 “자식들이 커서 좋은 기업에 들어가면, 그 회사 달력을 안방 한가운데 자랑스럽게 걸어놓는 어른들이 많다”고 말했다.

“달력 통해 사회적 지위 변화 느껴”

달력의 일차적인 기능은 날짜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기능이 확장되는 추세다. 사람들은 달력을 돈 주고 사는 상품이 아닌 연말이 되면 관계를 맺어온 이들과 주고 받는 ‘선물’로 생각한다. 그 때문에 달력은 명절날 들어오는 선물의 개수나 결혼식장의 하객 수, 장례식장의 국화 꽃다발과 비슷한 사회적 역할을 담당한다.

전주에 사는 남아무개(64)씨는 “달력을 통해 퇴직 뒤 사회적 지위의 변화를 느꼈다”고 말했다. 그가 공직에서 물러난 것은 5년 전이다. 해마다 여남은 개씩 들어오던 달력이 어느 순간 뚝 끊겼다. 산뜻하게 디자인된 대기업 달력이 걸려 있던 안방 가운데 자리는 교회 달력과 집 옆의 허름한 공업사 달력 차지가 됐다. 업무상 비행기를 이용할 기회가 많았던 탓에 몇 해 동안 배달돼오던 항공사 달력도 더는 구경할 수 없게 됐다. “그래도 살아온 습관이 있어서 방방마다 달력을 걸어야 하거든.” 그는 은행에 갈 때마다 고객용으로 대량 생산된 달력을 한 부씩 구해온다. 남씨는 “그래도 모자랄 땐 서울 사는 아이들에게 달력을 몇 부씩 구해달라고 부탁한다”고 말했다.

달력과 달력 소비자와의 관계는 일반적인 제품-소비자 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특성이 있다. 달력은 기업을 홍보하는 노골적인 마케팅 수단인 동시에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이다. 사람들은 기업 광고를 사무실이나 집 안에 붙여놓는 데 거부감을 느끼지만, 달력에 대해서만큼은 예외다.

박금준씨는 1999년 6월 홍익대에 제출한 석사논문 ‘문화적 가치로서 캘린더의 역할 및 방향성에 관한 연구’에서 “캘린더는 소비자들에게 긍정적인 기업 이미지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차지한다”고 주장했다. 예전의 달력이 1년 동안 자사 제품을 이용해준 고객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선물의 위치에 머물렀다면, 지금은 기업이 추구하는 경영 철학과 기업의 이미지를 전하는 매개체 구실을 한다. 기업들은 이익의 사회 환원 등의 목적을 위해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기 힘든 명화를 실어 소개하기도 하고, 공익 문구들을 담기도 한다.

‘극소수’ 고객 겨냥한 VIP 달력도

달력이 고급화 바람을 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다. 기업들은 ‘선택된 소수’에게 특별 제작한 달력을 배부하기 시작했다. 달력은 날짜를 보여주고, 고급 문화를 간접 체험하게 돕는 매개체 기능을 넘어 한 사람이 속한 계층을 규정하는 역할까지 맡게 됐다. 삼성문화재단 홍보팀에서 일하는 박미선씨는 “1996년 업계 최초로 삼성에서 앙리 마티스의 명화를 넣은 VIP용 달력을 제작했다”고 말했다. 삼성의 달력은 일반 펄프 용지보다 10배 이상 수명이 길고 생동감 넘치는 색상을 표현할 수 있도록 면으로 만든 프랑스산 ‘아르슈’지에 유명 화가의 명작을 정교하게 ‘오프셋 인쇄’해서 만든다. 아르슈지는 나폴레옹이 문서보관용으로 썼다는 종이로, 보존성이 높아 보통 달력 용지보다 가격이 많게는 20배까지 차이 난다. 보통 달력은 4가지 색깔을 조합해 색을 표현하는 ‘4도 인쇄’(신문 컬러면이 보통 4도 인쇄다)로 찍어내는 데 반해 VIP용 달력은 적게는 15도, 많게는 40도까지 인쇄한다.

박미선씨는 “처음에는 그룹 임원 등을 통해 삼성그룹에 고마웠던 분들에게 소량 제작해 배부했다”고 말했다. ‘삼성에서 달력을 받았는지’ 여부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가늠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기 시작했다. 삼성 쪽은 2000년부터 일반 판매를 시작했고, 삼성미술관 ‘리움’이나 호암미술관에 가면 누구나 앤디 워홀과 김환기 화백의 작품이 들어 있는 2007년판 달력 2종 세트를 구입할 수 있다. 판매 가격은 8만원이다. 무슨 달력이 “그렇게 비싸냐”란 생각이 들다가도, 직접 달력을 보고 인쇄 상태와 종이 질감을 느끼고 나면 “역시 돈값을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삼성이 시작한 달력의 고급화는 빠른 속도로 다른 기업들에도 전이됐다.

신세계백화점은 오스트리아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을 활용해 2007년용 달력 18만 부를 찍었다. VIP 달력은 따로 있다. 배경 그림은 일반용과 같지만 고급지를 사용했고, 백화점 협력사 대표들에게만 한정 배부한다. 우리은행도 도상봉·유영국·민경갑 등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PB(프라이빗 뱅커)들이 관리하는 특별 고객들에게 2만 부만 배포한다. 국민은행의 경우, 장욱진 화백의 작품으로 처음 ‘극소수’ 고객을 겨냥한 2007년용 VIP 캘린더를 만들었다. 국민은행 로고는 오른쪽 하단에 무채색으로 표시돼 멀리선 알아볼 수 없다.

시골엔 여전한 ‘일력’의 인기

달력은 계층뿐 아니라 지역도 가른다. 시골의 달력은 글자 크기가 크고 활자가 두껍다. 대기업 달력보다는 농협·주유소·음식점·농약판매상·약국 등의 달력이 많다. 배경 사진도 유명 화가의 세련된 작품보다는 이발소 그림처럼 투박한 것이 특징이다. 달력 숫자 밑에는 빈 공간이 여유롭게 남아 있어, 그날 날씨와 작업 내용을 적을 수 있다. 그렇게 몇 년치 달력을 모으면 자연스럽게 농사 교본이 만들어진다. 하루에 한 장씩 찢어 날짜를 넘기던 ‘일력’도 도시에서는 자취를 감췄지만, 시골에서는 요즘도 자주 쓰인다. 날짜가 지난 일력은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훌륭한 화장지 대용품으로 뒷간에서 최종 소비됐다.

인쇄전문 업체 삼화인쇄는 덩치 큰 은행들이 일반 고객들을 위해 만드는 달력을 대량 주문 생산한다. 이 회사에서 일하는 양회웅씨는 “은행들은 고객 수가 많아 한 번에 50만~60만 부씩 대량 주문한다”고 말했다. 올해 이 회사에서 찍은 금융권 달력은 신한은행·우리은행·교보생명 등이다. 그는 “예전에는 플라스틱 쫄대를 이용한 달력이 많았지만 요즘 나오는 제품들은 대부분 트윈 스프링을 쓴다”고 말했다. 일반용 달력 한 부의 제작비는 보통 150~200원이다.

VIP용 달력의 제작 부수는 1천 부에서 3만 부 사이다. 삼성 쪽은 “제작 부수는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지만, 5만 부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VIP용 달력의 제작비는 5만원에서 10만원에 이른다. 우리는 거의 비슷한 모양을 한 200원짜리와 10만원짜리 달력이 동시에 소비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모든 ‘짝퉁’과 사치품이 그렇듯 일상에서 그 차이를 느끼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눈 밝은 소수만이 알아볼 뿐이다. 그럼으로써 ‘달력의 사회학’은 비로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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