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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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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왜곡, 무모한 충성 경쟁”

등록 2004-09-02 00:00 수정 2020-05-03 04:23

동북아 학술세미나의 베이징 사회과학자들이 조심스럽게 털어놓는 ‘동북공정’에 대한 견해들


동아시아 역사 공동체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베이징 사회과학자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들도 일부 정치적인 학자들의 역사 왜곡이 탐탁지 않다는데….


▣ 베이징=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한-중간 고구려사 왜곡 문제로 첨예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가운데 중국 베이징에서는 남북한, 중국, 미국 등에서 온 역사·정치학자가 드물게 한자리에 모여 역사 문제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이번 국제학술 세미나의 주제는 ‘항일건국 이상과 동북아 국가의 개혁발전’. 참석자들은 민감한 고구려사 문제를 의식한 듯 발언에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특히 이번 회의에는 북한의 조선사회과학자협회 소속 대표적인 역사학자 6명이 처음으로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이번 국제 토론회를 통해 동북아시아 건국 이상이 구현·실현되기를 희망한다. 또 중국, 남한 학자들과 낯을 익히기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이번 학술 토론회에 그치지 말고 남북한, 중국 학자들이 자주 만나 사회과학자들의 본분을 지켜나가기를 호소한다.” 북한 대표단장인 송성윤 사회과학자협회 부위원장의 축사 한 토막이 보여주듯, 북한 학자들은 학술 세미나에서 가장 진지하고 열린 자세를 보여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남북한 · 중 · 미 학자들, 열린 자세

중국 베이징대학 동북아연구소와 중화문화교류와 합작촉진회, 조선사회과학자협회, 그리고 한국의 경남대학 극동문제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이번 회의는 8월25일부터 사흘간 베이징에서 열렸다. 중국 베이징의 내로라 하는 역사학자들이 두루 참석한 이번 회의의 화두는 동북아의 공동 번영을 위한 개혁과 역사 공동체를 만드는 현실적 과제였다. 윤대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부소장은 “현 시점에서 남과 북, 중국이 공동으로 항일건국 이상의 역사적 평가와 의미를 되새겨보고, 오늘날 당면한 각국의 개혁과 발전의 방향을 모색해보는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면서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발전을 위한 기틀을 다지기 위해서는 남북한, 중국 학자들의 긴밀한 교류와 협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남북한, 중국의 학자들이 더 자주 모여 미래 갈등의 불씨를 미리 없애고, 영구적인 동북아 번영과 협력을 토론하기 위한 역사 공동체 건설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에 대해 북한과 중국 학자들도 공감을 표시하면서 모두들 앞으로 더욱 활발한 학술교류에 나설 것을 다짐했다.

송영수 조선사회과학자협회 부위원장은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서로의 연구성과와 경험, 관심사에 대해 토론을 심화시켜 학술적 이해를 더욱 두터이 하고, 동북아 국가들의 건설과 발전에 기여하기를 바란다”고 맞장구쳤다. 송성유 베이징대학 동북아연구소장도 “관련국 학자들이 과거 역사의 경험과 교훈을 재정립해 21세기 동북아 국가의 평화발전에 나름대로 공헌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태균 서울대 교수는 ‘중용’의 개념을 통해 최근 동북아에서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는 민족주의와 패권주의를 극복하자고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최근 일본의 역사왜곡 교과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그리고 중-일, 한-일간 영토 문제 등은 모두 강력한 민족주의적 가치관 아래 나타나는 현상이다. 박 교수는 동북아의 민족주의는 폐쇄적이면서 패권주의적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는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사실 가운데 중간을 택하는 것, 즉 두 세력이 서로의 양보를 통해 하나의 합일점을 찾는 ‘중용’이 민족주의의 긍정적 측면을 잘 계승하면서도, 패권주의적이며 배타적인 성격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뜨거운 감자’인 고구려사 문제가 공식 의제로 채택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비공식적 자리까지 비껴가지는 못했다. 중국의 한 역사학자는 “일부 국수주의적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왜곡하는 무모한 짓을 저질렀다”고 잘라 말했다. 최근 중국 베이징의 정통 역사학자들은 당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드러내놓고 말은 못하고 있으나 창피해서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하겠다고 하소연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은 듯했다.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중국 내 역사학자들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주장은 명백한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창춘 등 동북지방의 일부 국수주의적 학자들이 중앙에 잘 보이기 위한 공명심 등으로 역사를 왜곡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동북공정에 지금도 참여하고 있다는 한 조선족 교수의 귀띔이다.

“정치적인 역사학자들이 문제”

익명을 요구한 다른 베이징대 교수도 베이징대 일부 역사학자들의 시각을 전하며, 역사를 보는 다양한 시각은 인정하지만 고구려사 왜곡은 처음부터 무리한 행위였다고 지적했다. 일부 정치적 성향이 강한 역사학자들의 충성 경쟁이 결국 큰일을 내고 말았다는 게 그의 견해다. 동북공정이 처음부터 치밀하게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려는 의도는 없었다는 주장도 이어졌다. “직접 공정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맹세할 수 있다. 필요하다면 훗날 관련 문건을 공개할 수도 있다. 2~3년 전 북한이 단독으로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신청한 게 화근이었다. 또 많은 남쪽 관광객들이 중국 동북지방에 와서 영토귀속을 주장하거나, 조선족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발언 등을 한 게 중국 지도부를 크게 자극했다. 중국 지도부가 이런 마당에 바보처럼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그러나 분명하게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 국민들이 우려하는 만큼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그는 후진타오 국가 주석이 참여 학자들에게 한국 등을 자극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연구하라고 직접 지시했다며, 모두들 이런 지시에 동의했다고 덧붙였다.

북한 학자들도 고구려사 문제에 대해 쉽게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은 분명했다. “역사는 누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지요. 진실은 반드시 승리하지요. 처음 만나 토론하는 자리에서 논쟁을 벌이는 것은 좋지 않지요. 만남 자체가 진전 아닙니까. 꼭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잘 알지 않습니까. ‘무언이 금’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노골적으로 개인적 견해를 내놓을 수는 없으나 중국쪽의 고구려사 왜곡이 말도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송동원 조선사회과학원 김일성동지혁명역사연구소 소장은 발표 논문을 통해 “우리나라에는 고구려, 고려와 같이 국력이 강하고 그것이 군사력에 의해 뒷받침됨으로써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굳건히 수호하고 수백년에 걸쳐 동방 일각의 강국으로 자랑을 떨친 빛나는 역사가 있다”며 “특히 고려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일컫는 대명사였으며 우리 민족사의 가장 빛나는 한 시기로 역사에 남아 있다”고 밝혀 고구려와 고려가 한민족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음을 뚜렷하게 부각시켰다.

후진타오의 야심과 ‘화이질서’론

중국의 패권주의 부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와 반론도 회의장을 긴장시켰다. 특히 리원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은 “중국은 영국, 독일, 일본 등과 다른 발전이념과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세계 강대국으로 도약해도 결코 미국처럼 패권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은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폭력과 전쟁을 반대하는 이념과 가치 그리고 전통을 유지해왔다”며 “중국 역사상 대외전쟁을 치렀던 많은 경우, 밖으로부터 침략을 막아내기 위한 것이었으며 군사력 비축도 자위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리원 연구원은 중국의 오랜 방어적 국방정책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적 증거가 만리장성의 구축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대한 반론도 조심스럽게 나왔다. 이원엽 베이징연합대학 교수는 “지난 4월 열린우리당 의원 몇명이 친중국정책을 주장한 데서도 엿볼 수 있듯이 한국은 미국과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미-중 사이에서 어떻게 전략적 균형을 맞출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그러나 중국의 한반도 정책은 ‘화이질서’라는 관점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1990년대 중국 베이징대의 한 역사학자가 주장한 ‘화이질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국가들을 모두 결합시켜 하나의 질서를 구축하는 게 중국의 국익에 가장 부합된다는 주장으로, 최근 고구려사 왜곡 문제도 화이질서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다른 참석자도 “일부 중국 지도자는 중국과 인접한 동북아, 동남아 주변국가들을 모두 편입시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다”며 “이런 계획은 이미 시작됐고, 착착 잘 진행되고 있다”고 거들었다. 이 학자는 동북공정도 화이질서를 구축하는 작업의 일환이라는 믿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동북공정에 참여했다는 학자의 주장과는 달리 “후진타오가 국가 주석으로 취임하기 이전부터 동북공정을 치밀하게 준비해온 걸로 안다”며 “후진타오는 장쩌민 등과 구별되는 자신의 치적 가운데 하나로 동북공정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소수민족 문제가 후진타오 시대의 최대 현안으로 떠오를 가능성에 대비해 동북지방 불안정 요인인 역사 문제에 대해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주도권을 확고히 잡아놓을 필요성이 오늘날 동북공정의 형태로 드러났다는 주장이다. 그는 “지난 3월 동북3성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사 등 고대사 관련 자료를 모두 중앙에서 수거해가는 바람에 이제 귀중한 고구려사 연구자료마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며 겉보기로는 후진타오가 역사전쟁에서 승자로 점차 굳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중국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학자들의 목소리는 우려와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이승률 베이징대 동북아연구소 객원연구원은 “중국이 가장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동북아 지역의 경제블록화는 논리적으로 국제협력을 요구한다”면서 “특히 경제블록화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한국과의 긴밀한 협력관계가 중요한 만큼 냉전시대에는 전략적 완충지로 간주해온 한반도를 새로운 역사발전의 동반자 관계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동아시아 역사 공동체’로 거듭나야

이에 반해 일본 군국주의 부활에 맞서는 남북한, 중국의 연대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관심을 끌었다. “동북아에서의 영구 평화의 추구는 동북아 모든 나라의 최종 목표일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유럽 공동체의 탄생도 마찬가지 목표를 추구했다. 동북아도 여기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유럽 공동체 형성의 목표는 독일 군국주의의 부활을 막는 것이었다. 우리는 일본 군군주의 부활을 막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요즘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조짐이 노골화되고 있다.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롯해 우익들의 준동을 소홀히 봐서는 안 된다. 동북아 나라들이 어떻게 협력하느냐는 곧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막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문 중국사회과학원 아태연구소 연구원의 지적이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드러난 각국 학자들의 다양한 시각은 동북아에서 안보나 경제 공동체 못지않게 역사 공동체의 건설도 멀고 험난한 길임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동북아 역사 공동체를 세워야만 모두가 평화롭게 번영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학자들의 공통된 인식도 선명하게 드러난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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