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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부한다, 시에나의 카타리나를

고통의 경력으로 영향력 쌓았던 여자들… 지혜를 배우되 답습은 하기 싫어
등록 2026-04-30 21:51 수정 2026-05-07 07:52
플랑드르 화가 가스파르 드 크레이어(1584~1669)가 그린 시에나의 카타리나. 저작권 만료 작품 누리집 ‘아트비’(Artvee)

플랑드르 화가 가스파르 드 크레이어(1584~1669)가 그린 시에나의 카타리나. 저작권 만료 작품 누리집 ‘아트비’(Artvee)


에이드리언 리치가 쓴 스물한 편의 사랑 시 연작 중 여덟 번째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자, 그것은 끝났어. 자신의 고통을 소중히 간직하던/ 그 여자는 죽었어. 나는 그녀의 후손이야./ 나는 그녀가 내게 물려준 흉터를 사랑해./ 하지만 여기서부터 너와 함께 계속 가고 싶어/ 고통의 경력을 쌓으려는 유혹과 싸우며.”(‘공통 언어를 향한 꿈’, 에이드리언 리치 지음, 허현숙 옮김, 민음사 펴냄, 2020)

이 구절을 읽으며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역시 선배님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여성이 얼마나 고통을 사랑하는지, 고통의 경력을 쌓으려는 유혹이 얼마나 그녀들에게 강력한지를 일찍이 알아본 것이다. 고통을 지속시키는 죄책감과 수치심. 그 짜릿한 내면의 스위트 스폿(Sweet Spot·딱 맞는 지점)을….

고통을 겪고, 거의 선택하고, 정말로 고통을 벗어날 기회 앞에서 망설이거나 다시 익숙한 자리로 돌아가고, 같은 고난을 반복해도 도통 달라지지 않는 예민하고 연약한 상태에서 고통을 감수하고, 오래 감수함으로써 고통을 통해 자신을 설명하게 되고, 이를 통해 일종의 카리스마를 획득하게 되는 것. 이렇게 획득한 카리스마로 타인을 수동적 형태로 통제하는 것. 이는 여자들이 오랫동안 계승해온 일종의 힘 아닌가?

 

카리스마 획득 수단

 

머릿속 여러 장면이 떠오른다. 이를테면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어머니.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느그 아부지랑 같이 살며 얼마나 고생했는데!” 막장 드라마의 클리셰인 고부 갈등도 마찬가지다. “아가야, 나 때는 이런 행동 꿈에도 못 꿨다.” 이야기란 이렇게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도구로 쓰일 수도 있다. 가련한 이야기라면, 듣는 사람이 부드러운 마음씨의 소유자라면, 청자는 화자의 요구를 더욱 거부하기 힘들어진다.

이 분야의 대가가 있다. 성녀로 추앙받는 중세시대 이탈리아 시에나의 카타리나(1347~1380)다. 카타리나는 16살에 결혼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금식을 시작했다. 먹기를 멈추자 부모는 굴복했고 그녀는 결혼하지 않을 수 있었다. 카타리나는 이후 신에게 헌신하는 삶을 산다. 그녀는 일생 동안 다가오는 고통을 참아냈다기보다는 고통을 적극적으로 생산해냈다. 쇠사슬로 자기 몸을 채찍질하고 극도의 금식을 감행했다. 생의 마지막에는 성체 외에 아무것도 삼키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33살에 탈진해 사망했다.

그러나 생전, 카타리나는 교황을 설득해 아비뇽의 교황청을 로마로 귀환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대단한 전략가였다. 그녀는 수백 통의 편지를 쓰면서 당대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무기도, 직함도, 재산도 없는 여성이 어떻게? 카타리나는 교회에 저항하지 않고 완벽하게 순종했고, 여자로서 겪었을 부당함에 불평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 입으로 자기 의견을 말하지도 않았다. 카타리나는 극심한 고행과 신에게의 완벽한 헌신을 자처함으로써 권위를 획득했다. 카타리나의 카리스마는 자기 자신을 극단적으로 통제함으로써 얻어졌다.

여성의 글쓰기와 정치 참여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일까. 실제 카타리나의 편지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고 용맹하지만, 중세 성화에서 카타리나는 파리하고 연약하며 신비롭게 그려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신비화와 왜곡은 카타리나를 아둔하고 유약한 여성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역으로 그녀를 보호했다.

 

통제로 얻은 권위

 

중세 서양사학자 캐럴라인 워커 바이넘은 이렇게 말한다. “여자들은 금식을 통해서 자기 몸 그 이상의 것을 조정(manipulate)했다. 여자들은 금식을 통해서 자기 가족이나 상충 종교집단, 그리고 하느님까지도 조정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극단적으로 억압적인 환경에서도 인간은 어떻게든 자신의 행위성을 획득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마련이다. 그럴 때 몸은 종종 유일한 언어가 된다. 여성에게 가능한 삶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중세 시기, 어떤 여자들은 극단적 금식을 강행해 자신의 삶과 주변을 “조정”했다. 그들의 모습에서 극단적 다이어트를 반복하는 한국 여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고 말한다면, 너무 큰 비약일까?

그러니 “고통의 경력을 쌓으려는 유혹”은 강력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효과가 있었으니까. 역사적으로 검증된 전략인 것이다.

카타리나에게서 지혜를 배우되, 그녀의 방식을 답습하고 싶지 않다. 나는 쇠사슬로 내 등짝을 후려치며 걷고 싶지 않다. 아프니까. 굶주리고 싶지 않고 때로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싶다. 맛있으니까.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 즐거이 누리고 지내면 왜 안 되는가.

당연히, 어떤 고통은 피할 수 없다. 때론 상황이 끝날 때까지 혹은 상황을 바꿀 힘이 생길 때까지 버티는 방법밖에는 없다. 또 고통을 주던 상황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은 그 파장 아래에 있어야 한다. 고통이 준 흉터도 시간이 지난다고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고통을 감수하는 것 자체가 정체성이 되어버려서 익숙한 고통을 지속하는 데 추가적인 힘을 쓰는 상태다.

그러니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는 얼마나 정확한가. 고통을 주던 과거의 상황은 끝났다. (“자, 그것은 끝났어.”) 그 파장 아래에 있어야 했던 시기도 끝났다. (“자신의 고통을 소중히 간직하던 그 여자는 죽었어.”) 잊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의 나에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으니까. (“나는 그녀의 후손이야. 나는 그녀가 내게 물려준 흉터를 사랑해.”)

 

고통을 위한 제언

 

다음은 이제 ‘어떻게’의 문제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너와 함께 계속 가고 싶어/ 고통의 경력을 쌓으려는 유혹과 싸우며.”) 어떻게 함께 갈까.

내 눈앞의 이 사랑스러운 미친 여자. 자신의 힘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그녀가 그녀 자신보다 고통과 더 가까울 때에,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파괴하는 존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할 때에, 구슬픈 비애의 곡조에 몸을 맡기고 바이올린을 켜며 비장미를 만끽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때에, “우리 이제 다른 노래 연주해볼까요” 말하며 기타를 드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전기 고문 의자에 앉힐 때에, 그럴 때 그녀 곁을 떠날 생각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래도 당분간 같은 노래를 연주해야 할 것이다. 나도 저 여자 자리에 있었던 때가 있으니까. 언제든 또 그럴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품속에서 낡은 하모니카를 꺼내 구슬픈 곡조에 화음이라도 넣어본다. 원한다면 동냥도 하고 누더기도 걸치면서. 그러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템포를 높여보는 것이다. 진지하고 비장했던 우리의 모습이 초상집 각설이패처럼 보일 때까지.

하미나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저자

 

*공격성은 인간의 기본 특성이자 생명체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지니고 길러야 할 자질입니다. 터부시돼온 여성들의 공격성에 대해 말합니다. 4주마다 연재.

하미나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저자. 본인 제공

하미나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저자.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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