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분홍 할머니’ 정애순(85)씨가 씨앗을 보여주고 있다.
4월 느티나무 꽃이 떨어지던 날, 경남 남해의 한 마을회관에 할머니 네 명이 앉아 있다. “씨 받아서 심고 또 심고 그런 씨 없나?” 남해여성농민회 토종씨앗연구모임 단장인 김한숙(56)씨가 물었다. “한 개도 없다. 그거는 애렵다(어렵다). 다 사서 하지.” 다들 “없다, 없다” 손사래 치는 사이 꽃분홍색 티셔츠에 꽃무늬 바지를 입은 한 할머니가 “콩이 있는데, 메밀…” 슬쩍 흘리며 일어섰다.
꽃분홍 티셔츠에 맞춤한 꽃분홍 고무신을 신은 할머니가 앞장섰다. 70도로 굽은 그의 분홍 등 뒤로 한숙씨와 토종씨앗 단원인 ‘꼬막’, 필주, 빵집 언니 ‘콩풀’이 줄줄이 따랐다. 화분에 심은 식물도 다 죽이는 나는 노래하는 꼬막(35)을 지원하고 농사짓는 필주(31)의 호위무사가 돼주는 남해 여농의 의리에 반해서 쫓아 나왔다.
“이건 아롱이동부, 옆집 할배가 맛있다고 줬는데, 할배는 세상 떴어.” 꽃분홍 할머니 손바닥에 점박이 무늬가 있는 베이지색 콩들이 올망졸망 놓여 있다. “이건 검은 동부.” 이 콩은 털이 반지르르한 고양이 같다. “언제부터 씨 받으셨어요?” “2~3년 됐지.” “메밀 이야기도 했는데.” “아이고, 스무 살에 시집와서 이적지까지 안 했나(씨를 계속 받았다). 내 나이가 팔십다섯이다. 오래됐는데….” 꽃분홍 할머니가 검은 비닐봉지를 꺼내오며 걱정이 되는지 “(싹이) 안 날 텐데” 되뇐다. 단원들이 콩과 메밀을 받아 수집 봉투에 담고 할머니 이름과 지역을 적었다. 정애순, 85살.
“마음이 정말 좋은 분이셨어. 다들 ‘없다’ 하니까 살짝 마음이 아프셨던 거야. 뭐라도 주고 싶으셨던 거지.” 할머니 집을 나서며 한숙씨가 말했다. 사실 자가채종한 지 2~3년밖에 안 된 이 콩들은 탈락이다. 토종씨앗의 절대적 기준은 없지만, 여농에서는 7대 이상 자가채종(보통 15~20년)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 정도 이 땅에 적응해 꾸준히 싹을 틔운 종자라면 이 땅의 작물이라고 본다.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주르르 앉아 있는데 보라색 조끼를 입은 한 할머니가 지나갔다. “씨앗 받은 거 있어요?” “없다.” “시금치는?” “없지. (종자) 값이 억수로 올랐다.” 남해 특산물이 시금치인데 거의 일본 회사에서 종자를 사다 기른다. 상품이 된 종자는 씨앗을 잘 맺지 못한다. 종자회사가 수정을 못하도록 계량(F1)한 경우가 많다. 그래야 계속 팔 수 있으니까. 아이엠에프(IMF) 때 우리나라 대표 종자회사 4곳 중 3곳이 외국 기업에 팔렸고, 우리 무·배추 종자 중 절반, 양파·당근 종자 중 80% 이상의 권리가 외국회사에 넘어갔다.(2018년 연합뉴스) 돈 안 되는 종자들은 사라져갔다. 작물이 획일화될수록 병충해에 취약해진다. “대대로 받아온 씨의 권리는 농부들한테 있지. 우리는 그 권리를 기록하는 거야.”
아무래도 공친 거 같은데 한숙씨는 집집이 돌아다니자고 했다. 씨 받는 건 고되다. 개량종보다 돈도 안 된다. “남 얘기 잘 안 듣는 어머니들은 마을회관에 잘 안 오셔. 그런 분들한테 씨앗이 있어. 누가 편하다, 맛있다 해도 쉽게 안 바꾸는 고집이 있지.” 연속 허탕을 치는데 한 할아버지가 불러 세워 꼬투리 그대로 검은 씨앗을 보여준다. 고삼이라고 했다. “구더기 있는 데다 던져놓으면 없어져. 가려움증에도 좋고. 우리 아버지 때부터 이 집에서 자랐던 거야. 가을에 오면 백도라지 씨를 줄게.” 씨앗을 수집 봉투에 넣고 할아버지의 이름과 나이를 쓴다. 박현중, 79살. “씨앗이 소중한 줄 아는 사람들은 주려고 해.”
마을과 동떨어진 밭 중간에 대나무로 둘러쳐진 동그란 요새가 있다. 그 안이 ‘은둔 고수’의 집이다. 이장이 그런다. “1980년대부터 그렇게 농사지었다던데, 고집이라면 천연기념물감이지.” 나도 이 고수의 이야기를 전설처럼 들은 적이 있다. 농약도 비료도 쓰지 않고, 경운도 하지 않고 씨를 받아가며 홀로 농사짓는다고들 했다. 비닐 멀칭과 비료 대신 벤 풀로 작물 곁을 덮어둔다. “처음엔 눈길도 안 주시더라고. 여농 사람들이 여러 번 찾아갔지. 씨앗 지키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아시니까 이제는 받아주시지. 집 안 큰 수조에 빗물을 받아 쓰셔. 화장실 옆에 콩대를 놓아 분뇨를 발효해 퇴비로 만드시더라고. 소비를 극도로 안 하고. 자기 먹을 거 농사짓는 것 말고는 더 안 바라시는 거 같더라.” 그의 밭에서 수십 년 대를 이어온 밀이 바람에 흔들렸다. 다들 찰옥수수만 찾는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매옥수수가 컸다. “밀이 익으면 씨앗을 얻으러 갈 거야.”
2021년 남해에 여성농민회가 생기고 토종씨앗연구모임이 꾸려졌을 때 한숙씨는 “자의 100%”로 단장이 됐다. “어릴 때부터 농사가 좋았어. 엄마 일 도와주러 밭에 가면 그 시간은 오로지 엄마랑 같이 있을 수 있잖아.” 여성농민회가 생기기 전부터 그는 씨앗을 받았다. 그의 밭엔 소마늘과 토종 뿔시금치, 토끼 귀처럼 생긴 옛날 상추가 큰다. “시어머니가 마늘장아찌를 주셨는데 정말 맛있는 거야. 소마늘이래. 작은데 마늘맛이 강하지. 시중에선 못 구해. 씨를 안 놓치려고 노력하지.” 2001년 남해로 이사 온 뒤 아이들에게 “힘들 때 돌아올 수 있는 고향을 주고 싶어” 정착한 한숙씨의 정원엔 들꽃이 자란다. 그는 꽃차를 만드는 법도 가르친다. “나는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거 같아. 이 정도로 그냥 살면 좋겠어.”
한숙씨가 토종씨앗을 찾으러 다니다 만난 ‘신달팥’ 할머니 이야기를 해줬다. 옛날 마늘을 찾다 공친 날 할머니가 아이보리색 신달팥을 보물처럼 보여줬다. “내 심을 것밖에 없다”던 할머니를 졸라 열 알을 받았다. “우리 집에 소마늘 씨앗이 있다고 하니 여든이 넘은 할머니 눈이 반짝이는 거야. 궁금하시대. 심어보고 싶대. 농사꾼이신 거지. 수수 키워 빗자루를 만드는 어머니들이 있거든. 우리가 막 대단하다 하면 부끄러워하셔. 자기 일에 대한 존중을 한 번도 못 받아본 거지. 씨앗 지키기도 농사도 대단치 않다고 하시지.” 여성농민회는 전국에서 토종씨앗을 수집해 기록을 남긴다. 씨앗과 모종, 정보를 나눈다. 싹을 틔워 다시 씨를 받는다. 애순씨의 메밀과 현중씨의 고삼은 대를 이어갈 거다.
한 주 뒤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남해 여농 ‘마귀할멈’(스스로 붙인 별명)의 밭에 모여 토종씨앗을 심었다. 작고 붉은 쥐이빨옥수수, 꼬투리가 긴 갓끈동부, 얼룩이 있는 쉬파리동부, 고소한 풀비린내가 나는 누에땅콩…. 마귀할멈의 흰색 진돗개 ‘간지’(간지 나다란 뜻)가 발을 동동거렸다. 한쪽엔 뿔시금치가 수꽃과 암꽃을 피워올렸다. 엄지손톱만 한 진초록 개구리가 튀어올랐다. 몸이 굵은 지렁이를 흙으로 덮어주며 한숙씨가 말했다. “얼마나 귀한 건데.”
글·사진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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