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보라 작가가 2025년 2월7일 경북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공 농성장에서 구미역을 향해 출발한 ‘가자 국회로!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용승계 희망뚜벅이’에 참가해 걷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연세대와의 퇴직금 수당 지급 소송 1심에서 일부 승소한 정보라 작가가 항소해 2심 판단을 받아보기로 했다. 연세대도 항소했다. 1심 선고는 2025년 1월8일 나왔다. 당시 대다수 언론이 정 작가가 받게 된 퇴직금과 수당의 금액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정 작가는 1심 판결 직후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언론의 이런 점에 대해 아쉬워했다. 또한 재판에서 거론한 핵심적인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점 역시 아쉬워했다. 그러면서도 판결문을 받아야 재판 결과에 관한 정확한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도 했다.
1심 선고로부터 한 달이 지난 2월7일, 경북 구미의 한 카페에서 정 작가를 만났다. ‘취미가 데모’인 작가답게 이날도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 노동자들의 ‘고용승계를 위한 국회로 가는 희망뚜벅이’ 첫날 행진에 참여한 뒤 곧바로 인터뷰 장소로 왔다. 한국옵티칼 공장이 있는 산단부터 구미역까지 12㎞를 걸어온 정 작가와 1심 판결과 항소 이유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정보라 작가가 2025년 2월7일 경북 구미역 앞 한 카페에서 한겨레21과 인터뷰하고 있다. 정 작가는 이날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용승계를 위한 희망뚜벅이 행진에 참여한 직후 인터뷰를 진행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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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에 보면 (저를) 단시간 근로자라고 표현했거든요. 저는 대학 강사가 단시간 근로자가 아니고, 업무 자체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전임교원(정교수)과 차이가 없다는 것을 증명받고 싶어 소송한 거였어요. 돈은 주겠지만 단시간 근로자로 남는다면 소송한 의미가 없죠.” 항소 이유를 묻자 정 작가는 먼저 이렇게 말했다.
이 사건의 쟁점 중 하나는 정 작가가 ‘초단시간 노동자’인지 여부였다. 근로기준법상 1주에 15시간 미만으로 일하는 초단시간 노동자는 휴일이나 연차 유급휴가가 보장되지 않고 퇴직급여보장법도 적용되지 않는다. 연세대 쪽에선 정 작가의 강의 시간이 1주일에 15시간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퇴직금 등의 청구 자체를 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정 작가는 강의 준비 시간과 행정업무 등을 포함하면 초단시간 노동자를 넘어 단시간 근로자도 아니고 전임교원과 다를 바 없다고 맞섰다.
특히 연세대는 1심 재판 과정에서 정 작가가 강의 준비에 소홀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부커상을 언급하기도 했다. 연세대는 법원에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행정업무나 수업 준비 등에 소요되는 시간을 고려해도 실근로시간이 강의 시간의 2배 미만이라고 봐야 할 것”이라며 그 근거 중 하나로 작가로서 창작활동과 학술활동을 활발히 한다는 것을 들었다.
“최근 원고(정보라 작가)의 작품인 ‘저주토끼'가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를 만큼 열정적으로 작가 활동을 하였습니다. (…) 연세대에서 강의를 하면서도, 왕성한 작품 출간 및 외국 서적 번역 활동을 했고 (…) 강의 진행을 위한 업무가 원고의 전체적인 업무 내지 활동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연세대 준비서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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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작가는 이 내용을 처음 보고 ‘이게 진짜 상대 쪽에서 낸 의견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재밌더라고요. 그러니까 제가 강의만 열심히 하지 않고 준비해야 할 시간에 이렇게 딴짓을 많이 했다는 주장을 하고 싶었나봐요. 심지어는 출판사에다 제가 쓴 번역서나 소설집 인세를 얼마나 받았는지 사실조회 요청까지 보냈어요. 이런 거 열심히 했으니 강의 준비는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죠.”
법원은 이런 연세대 쪽 주장을 전부 기각하고 정 작가가 초단시간 노동자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다만 정 작가의 소정근로시간에 대해선 실제 강의 시간뿐 아니라 강의를 준비하고 행정업무를 하는 시간까지 포함해 강의 시간의 3배로 봐야 한다며 ‘단시간 근로자’로 판단했다.
앞서 대법원은 2024년 7월, 대학 강사들이 강의와 수반 업무를 수행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은 통상적으로 강의 시간의 3배라는 판단을 내놨다. 다만 3배는 절대적 기준은 아니고 여러 사정을 아울러 참작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대학 강사의 소정근로시간은 강의를 준비하는 시간도 포함해야 한다는 판결은 이전에 하급심에선 종종 나왔다. 그런데 2023년 서울고법에서 강의 시간만을 소정근로시간으로 인정한다는 판결이 나왔고, 대법원에서 이 2심 판결을 파기환송하면서 이런 판례를 내놓은 것이다.

정보라 작가가 2025년 2월7일 경북 구미역 앞 한 카페에서 한겨레21과 인터뷰하고 있다. 정 작가는 이날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용승계를 위한 희망뚜벅이 행진에 참여한 직후 인터뷰를 진행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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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작가의 1심 판결도 이러한 판례를 적용해 나온 결과다. 정 작가는 무엇보다 대법원에서 3배가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고 했음에도 1심 법원이 3배를 기계적으로 적용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3배라는 기준이)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해요. 어떤 수업을 맡느냐에 따라 준비 시간이 달라지기도 해요. 예를 들어 ‘강사법’(개정 고등교육법)이 시행되기 직전인 2018~2019년 대대적으로 강사가 해고된 적이 있거든요. 강좌들이 폐쇄되면서 20명이 듣던 수업에 40여 명이 몰렸어요. 그만큼 더 노력이 들어가게 돼요. 전공자를 대상으로 한 수업과 타전공자를 대상으로 한 수업도 다르고요. 그런데 그걸 무조건 3배라고 하는 건 현실성이 없죠.”
정 작가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본인이 10년 동안 강사로 재직하면서 준비했던 수업자료와 학생들 채점자료, 현장학습 관련 자료 등을 전부 제출했다. 아울러 러시아어 교강사 회의록 등 행정업무를 했던 기록도 정리해 냈다. “1시간짜리 강의 자료를 준비할 때 보통 2시간이 걸려요. 한 학기에 6학점(1주에 6시간) 강의를 한다고 하면 대략 강의에만 18시간이 들어가는 거고요. 과제를 한 번 내면 한 주에 채점하는 데 3시간 정도 걸리거든요. 두 과목이면 6시간, 그리고 출석부도 정리에 1시간이라고 치면 주에 25시간 정도예요. 시험 기간엔 일일이 코멘트를 해서 주기 때문에 평균 15시간은 더 걸리고요.” 시험 기간이 아니더라도 실제 노동시간이 강의 시간의 4배가 넘는 셈이다. 정 작가는 학기마다 보통 9~15학점 강의를 맡았는데, 시험 기간이 아니더라도 주 40~60시간을 일한 셈이다. 그는 자신을 ‘초장시간 근로자’라고 표현했다.
대학 강사들과 함께 퇴직금 집단소송을 진행 중인 박중렬 비정규교수노조 위원장도 강사들의 소정근로시간을 산정할 때 강의 시간의 3배를 일괄적용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박 위원장은 “대법원의 판례는 강의 시간만으로 근로시간을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시간 계산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선 명확히 제시하지 않았다”며 “강의 시간의 3배를 곱하는 것이 일응(일단)의 기준이 될 순 있지만 각각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따져보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비정규교수노조는 2021년 국립대 강사 201명과 사립대 강사 25명을 모아 법원에 집단소송을 냈다. 이 소송은 아직 1심 판결이 나오지 않았다. 박 위원장은 “원고로 참여한 강사 중엔 강의 시간이 주 5시간 미만인 분도 있다”며 “강의 시간은 주에 3시간이라도 준비하고 연구하는 시간이 주 5시간 강의하는 분보다 더 많을 수 있다. 이런 분들도 실제 일한 것에 상응하는 퇴직금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저희의 주장”이라고 말했다.
다만 모든 강사가 소송을 통해 소정근로시간을 따지는 방식은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아니다. “비정규교수노조에서 강사들 실태조사를 몇 번 했어요. 전공이나 학생 수 등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최대한 상세한 조사를 통해 교육부가 현실에 맞는 지침을 만들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2023년 11월 국회에서 열린 ‘대학강사 근로시간과 소정근로시간 토론회’에 교육부에서도 사람이 왔는데, 소정근로시간 산정에 관해 입장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계획도 없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거겠죠.”(정보라 작가)
2024년 10월에도 국회에서 비슷한 토론회(‘ 대학 내 노동 차별 개선의 법과 제도적 과제 ’)가 열렸다. 당시 비정규교수노조 조합원을 대상으로 소정근로시간 관련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한 배성인 성공회대 교수는 “매번 소송을 진행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고 최적화된 방법은 정부의 실천적 의지이지만 기대 난망”이라며 “정규직 전임교원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법률을 제정하거나 강사법을 전면적으로 다시 개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 작가도 한때는 정교수가 되고 싶었다. 그것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있던 학과의 강사 수는 전임교원의 두 배가 넘었다. 하는 일은 비슷한데 받는 돈은 전임교원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그러나 전임교원으로 가는 문은 극히 좁았다. 기회조차 잘 오지 않았다. 가끔 오는 기회를 잡으려면 평소에 밉보일 수 없었다. “나중에 밉보일까봐 미운털 박힐 만한 짓은 애초에 할 수 없어요. 저도 한 교수님으로부터 직접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눈에 띄면 안 되고 미운 짓 하면 안 된다고.”
2021년 2학기를 마지막으로, 정 작가는 교수를 포기하고 학교를 나왔다. 정교수 전환은 꿈이고, 현실은 부품이라는 생각만 남았다. “강사를 정교수로 채용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돈 때문이에요. 강사의 정규직 전환 따위는 없어요. 강사는 그냥 컴퓨터 부품 같아요. 학교에서 그 정도로 생각하는 거 같아요.”
학교를 나오고 1심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정 작가는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것을 비롯해 여러 차례 국제 도서상 후보가 됐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지만,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더는 없다. 다만 재판으로라도, 강사 재직 기간 정교수와 다를 바 없이 일했다는 판단을 구하기 위해 정 작가의 싸움은 계속된다.
구미(경북)=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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