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던 아빠가 일터에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황효진씨는 경황없는 날을 보내고 있다. 주택관리사 시험을 통과하고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약 30년 근무한 황규운(68)씨는 2024년 12월, 한 입주민과 업무 관련 문제로 언쟁을 벌이던 중 스트레스로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은퇴를 4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뒤늦게 아빠 일터를 찾아가 함께 일하던 사람들을 만나며, 효진씨는 자신이 타인의 노동에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달았다고 했다.
“아빠 사건을 겪으며 어려운 일이나 부당한 일을 참고 견디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흔히들 ‘먹고살려면 더러워도 참아야지 어쩌겠어’ 하잖아요. 순간의 모면은 될 수 있지만, 결국 더 큰 해로 돌아올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의 노동 환경에도 영향을 미치고요. 바뀌질 않으니까. 하지만 무조건 ‘저항하라’고 말하기도 어렵죠. 그래서 노동자들이 세력화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아빠 직업인 주택관리사도 협회는 있지만, 노동조합은 없거든요. 아파트 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부당한 환경에 놓이기 쉽다는 거, 그 사람들이 모를 리 없어요. 하지만 이게 구조적 문제로 해석이 안 되고, 그냥 개개인이 운 나쁘게 인성 안 좋은 입주민에게 잘못 걸려서 벌어진 일로 여겨질 뿐이에요.”
한국에서 아파트는 중요한 거주 공간이자 투자 수단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해도 단지 밖으로 알려지기가 쉽지 않다. 특히나 관리사무소는 아파트 관리 업무를 위탁으로 하지만 자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없고 대부분 입주자대표회의를 거쳐야 한다. 그래서 입주민의 폭언, 갑질, 악성 민원 등에 노출되기 쉽다.
하지만 이 감정노동 피해에 대한 지원은 부족하다. “아파트 노동자들을 ‘내가 내는 관리비로 먹고사는 사람’ ‘밤낮없이 문제를 고치러 달려와야 할 사람’으로 여기는 시각을 접하며 어떤 기시감을 느꼈어요. 사람들은 자기한테 조그마한 권력이라도 주어질 경우 그걸 무의식중에 자꾸 휘두르려 하는구나, 나 역시 그런 적은 없었을까 돌아보게 됐어요.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왜 우리 그런 얘기 하잖아요. 소비자로서 어떤 주장을 해야 한다, 무슨 이슈가 있을 때 그 기업이나 거기 소속된 노동자들한테 뭔가를 행사해야 한다. 물론 그 방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도 분명 있지만, 내가 어떤 권력이나 권리를 가지고 그걸 행사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좀 바꿔야 하지 않나…. 재벌이 아닌 이상, 자신을 일개 소시민, 노동자, 직장인으로 여기다보니 내가 무슨 권력이 있냐고 생각하기 쉬운데, 관계에 따라 위계 같은 게 우리에게도 당연히 존재하거든요. 그걸 잘 의식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여성들을 위한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대학원에서 노동과 젠더를 연구하는 그에게 2025년의 목표를 물었다. “아빠 일을 겪으며 일을 병행하다보니 공부까지 하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휴학을 결정했어요. 이번 일로 인생이 내가 계획하고 생각하는 대로 흘러갈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오만한 거였구나. 그게 되게 어렵고 이뤄지기 힘들고 기적 같은 건데 이때까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왔다는 깨달음이 커요. 그래서 목표가 없습니다, 올해는.”
효진씨 아버지 사망은 산업재해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그 문제는 우리 노동과도 연결돼 있다.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궁금한 건 당신’ 저자
❶ 책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6523877&start=slayer
‘근면 성실한 노동자’ ‘일 잘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갖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관점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저자 케이시 윅스는 근면할 뿐 아니라 프로페셔널한 노동자가 돼야 한다는 노동윤리를 비판하고,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해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책은 우리가 쉴 틈도 없이 일하는 사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앞으로는 시간을 우리의 뜻대로 쓰기 위해 어떤 싸움이 필요한지 질문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❷ 브레드 스토리
https://www.youtube.com/@pan.monogatari
제빵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만큼 결과가 나오는 정직한 노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튜브 ‘브레드 스토리’ 채널을 보고 있으면 제가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빵을 만들고 판매하는 데 수많은 단계의 노동이 투입된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나는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나, 내 노동의 결과물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나 회의감이 들 때 이 채널을 자꾸만 보게 됩니다.
❸ 재료의 산책
https://www.youtube.com/@yonayonakoh
요리 연구가 ‘요나’님이 만드는 ‘재료의 산책’을 보며 그때그때 나오는 재료로 사부작사부작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습니다. 최근에는 토스트에 얹어 먹는 ‘브로콜리 딥’ 영상을 봤는데 아직 따라 해보지는 못했네요. 일하고도 시간이 넉넉히 남아야 요리할 의욕도, 체력도 생긴다는 점에서 요리는 저에게 무척 사치스러운 취미입니다.
*남플리, 남들의 플레이리스트: 김수진 컬처디렉터와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가 ‘지인’에게 유튜브 영상을 추천받아, 독자에게 다시 권하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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