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오는 사람 없어. 계속 줄기만 한다고.”
2025년에 팔순(만 나이 기준)을 맞는 김주경씨는 양사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다. 전북 고창군 성송면에 있는 마을로, 고창농악(고창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농민 음악)의 발상지다. 김씨 기억으로 한때 많게는 400여 명까지 살았던 마을. 하지만 2008년에 133명, 2016년엔 83명으로 줄더니 지금은 60여 명이 산다. 열에 아홉은 김씨와 같이 70대 이상이다.
“지금 이 집(옆집)도 빈집, 저 집(뒷집)도 빈집이야. 여기 살 사람이 없어.”
열 걸음 정도 걸어서 뒷집에 갔다. 한옥 현관문 앞에 사람 이름이 새겨진 문패가 붙어 있었지만 아무도 살지 않았다. 마당엔 이름 모를 잡초가 무성했다. 열려 있던 창을 통해 집 안을 들여다봤다. 금이 간 벽에 붙은 흰 벽지가 색이 누렇게 바랬고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살림에 필요한 집기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버님, 그래도 이 빈집을 새로 고치면 누가 찾아오지 않을까요?”
“누가 살긴 할까.” 김씨가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지속하는 지역(지방) 마을. 정부가 2021년 인구 감소로 소멸이 우려되는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한 곳만 전국 228개 시군구 중 89곳(39.0%)이다. 이처럼 지역 소멸 위기감이 커지면서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도시민들의 귀농·귀촌을 유도하는 정책과 사업이 확대되고 있다. 도시 청년에게 시골에 정착하거나 시골에서 사업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거나 일정 기간 농촌에 머물 수 있는 연수 프로그램을 제공한다든지, 시골에 있는 빈집 또는 낡은 집을 개보수하는 사업 등이 있다.
그런데 도시민과 도시 청년을 애타게 부르기만 하는 것이 답일까. 마을의 매력도를 높이는 일은 일차적으로 그 지역 주민들 몫이다. 도시 밖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 입장에서는 삶의 터전을 전원으로 옮기는 일이 절대 쉽지 않다. 시골 마을에 가서 무엇을 할지, 어떻게 살아갈지,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막막하다. 이들이 시골에 와서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도록 그 마을 주민들의 도움과 지지가 필요하다.
이처럼 전원생활을 원하지만 그것이 낯선 사람들과 시골 마을을 되살리려는 주민들을 서로 연결하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 연결 고리로서 2024년 첫발을 뗀 것이 자원봉사 활동을 접목한 프로젝트다. 자원봉사가, 과거엔 단순히 봉사활동을 하는 개인이나 기관이 누군가를 돕는 일회성 활동이었다면 이제는 다르다. 봉사 대상으로 여겨졌던 마을 주민이 봉사활동 주체로 참여하는 형태로까지 확장했다. 지역 특성과 필요에 맞춘 자원봉사는 지역 주민 간의 소통을 활성화하고, 주민 스스로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변화의 씨앗이 될 수 있다. 한겨레21은 재단법인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와의 공동 기획을 통해 자원봉사를 매개로 지역 바꾸기에 나선 현장을 방문했다.
“한국에도 아프고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정말 놀랐습니다. 그분들께 저희가 만든 마르코프차(당근김치)도 나눠드릴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2024년 3월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으로 온 고려인 리 루슬란(31)은, 8월24일 충북 제천시종합자원봉사센터(제천센터)와 함께 고려인 전통 음식인 당근김치를 제천 주민들과 함께 만들어 지역의 노인·장애인 복지시설을 찾아 나눠준 시간을 한국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꼽는다.
루슬란의 아내인 자릴카시노바 디나라(31)도 “(2024년) 6월9일 민속 명절인 단오를 앞두고 한국 전통 음식인 쑥개떡을 온 가족이 함께 만들어 복지시설에 나눠드렸는데, 함께했던 두 아들도 너무 좋아했다”며 “한국을 더 잘 알 수 있게 돼 기뻤고, 몸이 불편한 한국 사람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보람찼다”고 말했다.
한글이 익숙하지 않고 새로운 환경이 낯선 이주민은 대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제천센터가 2024년 한 해 동안 추진했던 ‘고려인 가족과 같이(가치)있는 오늘! 맛있는 자원봉사’는 이주민이 도움을 받는 수동적인 존재에 머물지 않고 봉사활동을 하면서 공동체에 기여하고, 그들 자신도 한국에 더 잘 어울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제천의 주력 산업이었던 시멘트 산업이 쇠락하면서 제천은 인구 감소 위기에 직면했다. 2003년 말 14만 명이었던 인구는 2024년 8월 말 기준으로 12만 명대까지 떨어졌다. 인구 구성도 문제다. 제천시는 2023년 12월 말 기준으로 65살 이상 인구의 비중이 25.9%로 초고령사회(20%)를 훨씬 웃돈다. 제천시 관계자는 “제천시 공업지역인 바이오밸리에 기업체를 유치하려고 해도 일할 젊은 노동자가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며 “키르기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 대사직을 지낸 김창규 시장이 취임하면서 고려동포를 제천시로 초청하는 방안이 추진됐다”고 했다.
제천시는 2023년 4월 ‘제천시 고려인 등 재외동포 주민 지원에 관한 조례’를 만들었고, 김창규 시장은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 등을 방문해 고려인 이주·유치 협약을 맺었다.
서울이나 인천, 경기 등 수도권이라면 굳이 지자체가 나서지 않아도 기업과 공장이 모이고, 자연스럽게 이주민도 찾는다. 이와 달리 제천과 같은 비수도권 지역은 적극적으로 정책을 세워 인구 유치에 나서야 했다. 제천시가 대원대학 기숙 시설을 임대해 고려인을 위한 숙박시설을 갖춘 ‘제천재외동포지원센터’를 세운 이유다. 제천시는 숙박과 일자리 연계뿐만 아니라, 가족과 함께 한국을 찾는 고려인 동포들을 위해서 자녀 교육까지 챙겨주고 있다. 2016년에 한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던 루슬란은 제천시가 공유한 홍보자료를 보고 가족과 함께 한국행을 택했다.
이러한 지자체의 고민에 동참하는 의미로 제천센터는 2024년도 프로젝트를 고려인 동포 가족과 함께 하는 봉사활동에 초점을 맞췄다. 제천 주민인 김병학(45)씨는 이 자원봉사 활동에 자원해 1년 동안 함께 했다. 병학씨는 “어린 시절 함께했던 친구들이 대부분 일자리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걸 보면서 안타까움이 많았다”며 “점점 늙고 비어가는 도시에 그래도 함께 살아보자고 찾아주는 고려인 동포들에게 도움을 주고, 동시에 봉사활동도 할 수 있어 보람이 컸다”고 말했다.
다시 고창군 양사마을로 돌아가보자. 고요한 마을을 깨우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주경씨 집에서 100m 내 거리에 있는 마을회관 현관 앞에 주민들이 모여 있다. 남성 노인 서너 명이 댑싸리와 대나무로 빗자루를 만들고, 여성 노인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 와서 이거 검사 좀 맡아봐. 이거 전부 내가 다 끈으로 매놨어.”
“아니, 이건 너무 크잖아. 할 줄도(빗자루 만들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뭘 한다고. (바닥에 있는 여러 빗자루를 보다가 댑싸리로만 만든 빗자루를 보고) 요놈, 요놈이 좋겠네.”
“그건 앉아서 씨는(쓰는) 놈이여.”
주민들은 성송면사무소에 기증할 빗자루를 만들고 있었다. 양사마을 이장 주영순(66)씨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어르신들이 요즘 들어 활기가, 활기가 이렇게 찬다고 할까요?” 주씨가 양손을 배 높이에서 이마 높이까지 올리며 말했다. “어르신들이, 마치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처럼 지냈는데 요즘은 기분이 업그레이드돼서. 엄청 좋아하세요.”
새 단장을 한 양사마을회관이 가라앉아 있던 주민들의 활기를 북돋웠다고 한다. 실내에 하나였던 화장실은 여자 화장실과 남자 화장실로 나뉘었고, 공간 확장으로 부엌이 새로 생기며 공용거실과 분리됐다. 벽걸이 에어컨이 설치돼 여름에도 시원한 상태에서 조리할 수 있는 부엌 옆엔 조리기구를 보관할 수 있는 수납장, 그리고 김치냉장고를 들인 창고가 새로 마련됐다. 2025년 봄이 되면 마을회관 뒤에 새로 조성된 돌담 정원에 꽃이 필 예정이다.
마을회관 리모델링은 고창군자원봉사센터(고창센터)와 오세훈 고창문화도시센터 시민추진단장, 자원봉사자들의 합작품이다. 고창센터에서 전북대 고창캠퍼스 한옥건축학과 학생들과 지역 봉사단체 ‘우리이웃’ 회원들을 모집했다. 이들 20여 명은 성송면 선량마을에 있는 모정(모가 나게 지은 정자) 리모델링 작업에도 참여했다. 고창군 내 마을 공동공간과 빈집 수리 프로젝트(‘활력 고창 집·정·원 스케일업’)를 제안한 오세훈 단장은 “마을 어르신들은 외부와의 교류가 줄면서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 절실히 필요했다”며 “리모델링이 마을 주민들에게는 단순한 수리가 아닌 삶의 일부를 되찾는 일이었다는 점에서 큰 책임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특히 오세훈 단장은 주영순 이장의 리더십이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마을을 바꾸려면 주민들 의지가 선행돼야 하는데, 이장님이 정말 적극적이세요. 댑싸리를 양사마을을 알리는 대표 브랜드로 만들고 싶으시대요. 봄에 심으면 가을에 녹색, 분홍색, 노란색, 주황색, 보라색을 띠며 봉긋하게 피는 댑싸리가 되게 예쁘거든요. 이걸 테마로 삼아서 마을을 예쁘게 꾸밀 수 있고, 그러면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고, 그러면 마을 주민들도 뭔가를 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될 것 같아요.”
하동 주민, 다른 지역 봉사자와 교류하며 관계 인구 늘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중앙정부와 지자체는 시골 마을의 정주 인구를 늘리는 데에 집중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귀농·귀촌 업무 담당 공무원들이랑 이야기하다보면 ‘어떻게 주소지 이전을 하지 않은 청년에게 정착지원금을 줄 수 있느냐’는 반응이 많았어요.” 청년들의 지역 이주에 관한 연구를 꾸준히 해오고 있는 우성희 듣는연구소 협동조합 연구원의 설명이다.
그런데 이제는 ‘관계 인구’가 주목받고 있다. 2016년 일본에서 발간된 책 ‘도시와 지방을 섞다’ 저자 다카하시 히로유키가 처음 사용한 이 용어는 도시생활에 피로를 느껴 자신이 마음에 드는 지역에 간헐적으로 방문하거나, 빈번히 들르지는 못하더라도 생산품 구매, 기부와 같이 어떤 형태로든 그 지역을 응원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런 관계 인구를 늘리기 위해 경남 하동군에서 하동군자원봉사센터(하동센터)와 주민공정여행협동조합 ‘놀루와’가 협업해 2024년 5~10월 진행한 프로젝트가 ‘하동 자원봉사 첫걸음, 인생 2막 첫걸음’이다. 하동군과 자매결연을 한 타지역 자원봉사자들이 하동군의 전통 민박과 마을회관에서 지내며 주민들과 함께 메밀전병을 부쳐 먹고, 짚신도 같이 만들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하동 녹차를 함께 마시며 서로 대화하고 교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들에겐 ‘섬진강 달마중’(섬진강변에 있는 악양면 평사리 공원에서 달마중하는 행사)과 같은 관광 프로그램도 제공됐다. 하동센터의 여상선 팀장은 “참가자들이 하동의 자연은 물론이거니와 마을 주민들이 너무 따뜻하게 환대해줘서 다음에도 꼭 다시 오고 싶다는 반응이 많았다”며 “특히 마을 주민들과 어울려 일하면서 깊은 교감을 느꼈다고 했다”고 전했다.
지속가능한 프로젝트는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지속적인 변화를 만드는 데 중요하다. 김의욱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 센터장은 “인구 감소, 고령화, 지역사회의 관계 약화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단기적인 이벤트나 일회성 지원을 넘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역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키우며, 지역 내 인적·물적 자원을 잘 활용하는 것이 장기적인 발전에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정부와 지자체는 다양한 방식으로 도시 청년들의 귀농·귀촌을 지원한다. 청년이 시골 마을에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데 땅이나 집, 일감과 같이 생존에 필요한 물적 기반은 중요하다. 이주민이 마을에 와서 어떤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조건이나 기대 없이 마을에 존재하는 다양한 구성원 중 하나로 존중하는 지역 분위기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마을이 외지인과 교류하려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지역사회 정서와 문화다. 새로운 것에 배타적인 문화, 뿌리 깊은 가부장적 질서는 걸림돌이 된다. 가부장적 문화는 특히 청년 여성에게는 삶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매우 큰 요소다. 비혼 여성이 마을에서 집을 구하기 어려운 일이 그 단적인 예다.
우성희 연구원은 “시골 마을은 공인중개사가 아니라 마을 이장의 도움을 얻어 집을 구할 수 있는데, 아이가 있는 기혼 여성과 비교했을 때 비혼 여성은 집을 구하기 어렵다. 마을에 결혼 안 한 젊은 여자가 오면 분란이 생긴다고 여기는 마을 주민들이 지금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지역 소멸 위기에 봉착한 지역이 도시 청년만 찾을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있는 청년에게 ‘지금 내가 사는 마을이 삶의 무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일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라도 성차별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우 연구원의 설명이다.
“지역에 계신 분들의 큰 고민 중 하나가 같은 마을에 사는 청소년들에게 ‘여기에서 살아도 비전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예요. 지역(지방)에 사는 10~20대 여성 청소년들을 만났는데, 미래에 어떤 일을 할지에 대해 많이 위축된 모습을 보였어요. 살면서 엄마를 비롯한 여성들이 가부장적 삶에 매여 있는 걸 많이 본 거죠. 남성과 똑같이 농사짓는데도 집안일은 여성만 하는 걸 보고 자랐거든요. 롤모델이 부재한 상황이에요. 성차별 문화를 바꾸는 게 비단 외지에서 온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많이 알아야 해요.”
김의욱 센터장은 “인구가 줄지 않고 활력을 띠는 지역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참여와 원주민의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유입된 인구가 원주민을 배려하고, 또 새로운 유입 인구를 만들어내는 점에 있다. 원주민과 이주민이 하나의 주민이 되어 그들이 주인공이 되는 것은 지역이 활력을 찾는 방안이 될 것”이라며 “시민 역량을 키우고 지역사회에 대한 공동체 의식과 연대 의식을 북돋는 데 자원봉사가 역할을 하길 바란다. 지역 활력을 도모하는 많은 시도가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고창(전북)=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제천(충북)=이재호 기자 ph@hani.co.kr
※이 기사는 재단법인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경찰 “경호처 또 막으면 체포…공수처와 윤석열 2차 영장 집행”
물리학자 김상욱의 ‘응원’ “한남동 키세스 시위대는 우주전사”
[단독] 계엄 해제 가결 뒤 ‘용산행 육군 버스’…탑승자는 계엄사 참모진
[속보] 공수처 “체포영장 기한 연장 위해 법원에 영장 재청구”
‘3무’ 공수처…준비 없이 영장, 의지 없이 퇴각, 책임 없이 일임
최상목의 자기합리화…‘석열이형’에게 미안해서 [1월6일 뉴스뷰리핑]
‘25년째 복역’ 무기수 김신혜, 재심서 ‘친부 살해 혐의’ 벗었다
이준구 교수 “윤석열, 어디서 법을 배웠길래…저렇게 무식할까”
‘관저 김건희 개 산책 사진’ 어디서 찍었나…“남산에서 보인다길래”
국회, 8일 내란·김건희 특검법 등 8개 법안 재의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