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채식주의자들’ 앞부분에 아버지가 강제로 딸에게 고기를 먹이려고 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이 장면이 여러분 생각에는 알레고리 같아요, 아니면 사실적 묘사 같아요?”
학생들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듯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곧 얼굴이 굳어진다. 알레고리라고 생각한다는 학생은 한 명도 없다. 읽어본 학생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사실적 묘사라고 말한다. 학생들뿐만 아니다.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다음 ‘채식주의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본 대다수는 이 질문에 사실적 묘사라고 말했다. 이야기를 붙여보면 각자가 가진 끔찍한 기억들이 나온다.(아래의 사례는 기억의 보정에 따라 약간의 각색이 있다.)
현석(가명)은 비슷한 경험을 직접 했다. 현석의 아버지는 매일 고단한 노동을 하는 육체 노동자였다. 힘을 쓰기 위해서는 고기를 많이 먹어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한 현석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늘 고기를 먹이기를 원했다. 그래야 남자라고 말했다. 그중에서도 아버지가 ‘맹신’하던 고기는 개고기였다. 다른 고기야 먹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현석이지만 개고기는 질색이었다. 아버지에게 먹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돌아온 것은 격렬한 비난이었다. 그래서야 힘을 쓰겠느냐는 말부터 ‘남자’라면 먹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거쳐 급기야는 남자답지 못하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결국 현석은 억지로 먹고 토했다. 아버지 보라는 듯이 한 일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일상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를 다루는 수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폭력의 경험이다. 성폭력과 가정폭력, 그리고 학교폭력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의 이야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중 학교폭력 이야기에서 많이 나오는 것 중 하나가 먹을 수 없을 것을 먹도록 강요하는 일이다. 음식물을 일부러 땅에 떨어뜨린 다음 먹게 하는 것도 있고 침을 뱉고 난 다음 먹게 하는 것도 있다. 꺼리거나 못 먹는 음식을 일부러 먹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폭력이 두려워 먹으면 그걸 먹는다고 비웃는 이야기가 정말 많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라면 반대로 말해서 ‘내가 먹지 않는 것이 곧 나’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음식은 집단의 정체성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무슬림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돼지 삼겹살이 한국 국민의 ‘솔푸드’(마음을 위로하는 음식)로 여겨지기 때문에 육체 이주 노동을 온 무슬림은 일을 마치고 하는 뒤풀이나 회식 자리에서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초기에는 이래야 한국 사람이 된다며 강제로 먹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현재도 무슬림 이주 노동자들에게 종종 돼지고기를 강요하는 일이 벌어진다.
물론 직접 먹는 것과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저 장면은 폭력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는 폭력의 알레고리지만 폭력‘성’에 대해서는 사실에 가깝다. 아버지가 고기 먹기를 강요하던 장면에서 수혁(가명)에게 떠오른 것은 군 훈련소에서 여호와의증인 신자인 동기가 집총을 거부할 때 중대장이 보였던 모습이었다. 몇 차례에 걸쳐 위협적으로 집총을 요구했지만 그 동기는 끝내 거부했다. 중대장의 일장 훈시는 물론 그 뒤로 가혹한 얼차려가 있었다. 훈련소 생활이 끝나고 난 다음 사단 영창 방문이 있었는데 영창에 정자세를 취하고 있는 동기를 봤다. 집총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던 수혁에게 그 동기의 일은 매우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오히려 무조건 집총으로만 나라에 봉사해야 하는지,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인지를 생각하게 됐다. 나중에 ‘채식주의자’를 읽을 때 아버지가 고기 먹기를 강요하는 장면에서 집총을 강요하던 장면이 딱 겹쳤다고 한다.
민수(가명)가 저 장면에서 떠오르는 경험에 대해 한 이야기는 성매매였다. 아주 잘나가는 회사에서 영업을 담당했던 그가 했던 일은 접대였다. 다른 접대는 다 할 수 있었지만 이른바 ‘2차’와 관련한 접대는 정말 곤혹스러웠다. 그 일의 핵심은 접대받는 사람에게만 넌지시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자기도 같이 연루돼야만 상대는 안심하고 만족한다고 했다. 공모자가 돼야 한다. 대충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며 잘 빠져나왔지만, 한번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결국, 그는 접대하는 여성과 함께 호텔에 올라갔다. 도저히 성매매를 할 수 없었던 그는 상대 여성에게 쉬시라 하고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고 나왔다. 그 일은 그가 회사를 그만두는 계기 중 하나가 됐다.
사람들이 저 장면을 끔찍하다고 생각할까. 저 장면이 끔찍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강요받는 순간 구석으로 몰리며 자신이 완전히 발가벗겨져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과 절망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끔찍함이 강했던 사람들은 도저히 책을 읽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왜 고기를 강요했을까. 자식의 건강이 걱정돼서일까. 아니면 사위와의 관계를 생각해서일까. 아예 전자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후자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장인으로서 사위를 볼 면목이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딸이 다른 사람들처럼 사위와 원만히 지내기를 원하는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폭력적 강요는 관계를 맺고 유지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서다. 관계를 위해 먹지 못하는 것도 먹어야 하고 싫어하는 일도 해야 하고 때로는 일탈과 범죄행위에 공모도 해야 한다. 공모에 대한 압력이 강해질수록 개인의 성향과 선택은 들어설 여지가 점점 없어진다.
한국은 ‘평균’에 대한 압력이 높은 만큼이나 ‘일반’에 대한 압력도 높은 사회다. 평균에 대한 압력은 사는 정도와 수준에 대해 끊임없이 눈치를 보게 한다. 자신이 버는 연봉이 얼마인데 이 정도면 평타는 되는지를 물어보며 자기가 혹시 미달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게 만든다. 따라서 평균에 대한 압력은 그저 평균에 도달하라고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평균을 끊임없이 올려치기 한다. ‘평균 올려치기’라는 말이 나오게 된 이유다. 상위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머지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런 평균에 대한 압력은 동시에 ‘일반’에 대한 압력이기도 하다. 유별나서도 안 되고 나대서도 안 된다. 구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매우 흥미롭게도 취향의 영역에서 튀는 존재라 하더라도 관계에서는 절대 튀어서는 안 된다. 음식 취향이 어떻든 그게 취향의 영역이면 상관하지 않지만 그게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영역에 들어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채식이 혼자 하는 취향이면 괜찮지만, 회사 회식에 들어오거나 단체로 음식점에 가서 주문하는 것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왜 혼자 튀고 잘난 척해서 전체 진행을 방해하고 분위기를 흐리냐는 것이다. 바로 남들처럼 일반적으로 그냥 살면 안 되냐는 말이 나온다.
묘하게도 문화적 영역과 사회적 영역이 마치 두부모 자르듯이 잘리는 것처럼 생각한다. 취향은 문화적 영역에 속하고 관계는 사회적 영역에 속하는데 이 둘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요한다. 즉 문화적 취향이 사회적 영역으로 넘어오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그만큼 사회적 영역은 정해진 규율과 방식에 따라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적 취향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지 사회적인 것이 아니어야 한다. 혹 그런 문화적 취향을 개인을 넘어서는 것으로 추구하고 싶다면 그것을 공유하는 하위문화 공동체에서 추구해야 하지 결코 사회로 넘어와서는 안 된다고 못박는 것이다.
그런데 삼겹살은 왜 ‘취향’이 아닌가. 왜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인가? 반대로 말해보자. 왜 채식은 개인적인 취향이어야만 하는가? 왜 그것은 사회적인 것이 되기를 주장하면 안 되는가? 여기서 흥미롭게도 우리는 책 제목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책 제목은 ‘채식자’가 아니라 ‘채식주의자’이다. 채식‘주의’자는 나 홀로 채식하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채식이 사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사상을 사회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저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장하는 사람이기에 ‘주의자’인 것이다.
‘주의’가 ‘주의’인 첫째 이유는 현 상태의 부당성을 고발하고 드러내기 때문이다. 모든 주의는 현 상태를 지양돼야 할 것으로 폭로하는 것으로 자신이 제시하는 비전의 정당성을 획득한다. 채식자가 아니라 채식‘주의자’인 이 작품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한국 사회가 한편에서는 일반과 사회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폭력성, 다른 한편에서는 취향과 개인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주장을 가두어버리려는 폭력성, 그 양면의 폭력성 사회라는 것이다. 그 폭력성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실과 알레고리 양쪽 모두를 아우른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라는 점이다.
나아가 주의자는 자기 주장을 관철하는 사람이다. 권력을 쟁취해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여 관철하고 사회 전체에 폭력적으로 관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주의’가 ‘사상’일 경우 무엇보다 그가 관철하는 것은 그의 몸이고 삶이다. 그저 사는 사람이 그냥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일 수 있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이 바로 그렇다. 그는 남들에게 그렇게 살라고 관철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극단’으로 밀어붙일 뿐이다. 오히려 그가 그렇게 자기 삶을 사회에 아무런 폭력을 가하지 않고 ‘극단적’으로 밀어붙임으로써 그런 사람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는 ‘극단’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입을 벌리고 고기를 억지로 쑤셔 넣고 사람을 내팽개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한국 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각자의 사회적 경험에 말을 붙이는 ‘말걸기’이기도 하다. 수업 시간의 안팎에서 아버지가 고기를 강요하는 장면에서 폭력의 경험을 떠올리기를 해본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사회적 경험을 떠올려보기를 하고 나자 너무 끔찍해서 읽지 못했다고 하던 사람들이 다시 읽어보겠다고 하는 경우가 생겼다. 끔찍하다고 했을 때는 그 상황에만 매몰됐는데 기억을 떠올리고 나니 중단돼야만 하는 폭력성에 대한 각성을 통해 그 너머 무엇을 주장하려 하는지를 살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채식주의자’를 통해 현 상태 너머 ‘비전’에 대해 궁금해졌다는 것이다. 그 비전에 자신이 동참할 수 있는지 없는지와는 별개의 문제로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 책은 결코 끔찍한 이야기가 아니라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약속일 것이다. ‘채식주의자’라는 제목의 이 책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책이 각자의 경험에 말을 걸어 현실이 중단돼야 함을 각성하게 하고 선포할 때, 그 경험을 읽는 것을 통해 너머의 비전을 보고자 하는 ‘주의'에 관한 것인 한 이것은 어쩌면 모든 책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끔찍하더라도 책을 읽고 또 읽을 것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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