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나면 글을 쓰고 우울하면 책을 본다. 책은 진창에 빠진 사람이 몸부림치는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다. 나는 글을 쓰며 해방된 이의 유산을 읽고 안도감을 느낀다. 손으로 죽죽 찢으면 그만, 불로 사르륵 태우면 그만인 것이 영영 마음에 머무른다. 남이 지은 글밥으로 나를 해 먹인다. 이따금 도서관 누리집을 구경하다가 나의 대출 이력을 본다. 책 제목에서 당시 내 마음이 떠오른다. 사랑의 감정에 혼란스러웠을 때, 발표 수업에서 능변가가 되고 싶었을 때, 달리기를 더 잘하고 싶었을 때가 있었다. 삶의 의미가 뭔지 정말 모르겠을 때도 책을 한 권 읽었다. 알베르 카뮈의 ‘시시포스 신화’다.
‘시시포스 신화’는 단 두 줄로 요약할 수 있는 에세이다. ‘왜 살아야 하나?’ ‘그냥.’ 이 책은 인간이 자살하는 까닭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저자 카뮈는 한 세기 전 같은 고민을 했던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처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카뮈는 한 인간이 원하는 대로 세계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자살의 원인으로 진단한다. 인간은 알고 싶으나 알 수 없고, 하고 싶으나 할 수 없다. 또한 살아 있으나 결국 죽는다. 이러한 무상함을 부조리라고 한다. 세계는 부조리하므로 삶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카뮈는 세계의 부조리함 때문에 죽음 또한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의미를 찾기 위해 죽어도, 죽은 자는 의미를 찾지 못한다. 살든 죽든 똑같으니 살아 있으면 그냥 살라는 말이다.
2023년 봄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렸다.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3개월이었다. 하루하루 버티기가 힘들어 인터넷에 철학책을 검색해 추천받았다. 내 직업은 글을 중심으로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이다. 창의적인 일을 좋아하고 도전 의식이 강한 내게 잘 맞는 직무라고 판단했다. 실상은 달랐다. 어느 하나 관행적이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사회 초년생에게 권한과 역할이 적다는 사실은 안다. 문제는 내 미래가 될 상사의 모습이었다. 상사들은 보드라운 새 수건이 닳고 닳아 부엌 걸레짝이 된 것처럼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우리 업무의 말 많은 규정보다 삼성전자의 조용한 주가 변동에 예민했다. 점심시간에 또래 동료들끼리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남들한테 직업 소개할 때 뭐라고 해? 편집자. 기획자. 그러다 5년차 선배가 말했다. “음, 난 까까라고 해.” 까라면 까는 일을 한다고. 그의 대답이 꽤 새삼스러웠다. 그 후 나는 아침에는 압사당하기 일보 직전인 지하철에서, 밤에는 이상하게 넓은 슈퍼싱글 침대 위에서 지난날을 반추하는 습관이 생겼다. 고심하며 직조해온 삶의 내일이 재미없고 뻔했다. 무의미했다.
내가 원하는 행복을 누리기에는 시작부터 잘못됐는데 왜 살아야 하는지 궁금해졌다. 20대니까 다시 도전하면 된다는 위로는 케케묵었다. 면접장에서 이렇게 관련 없는 일은 왜 했느냐는 ‘과거 공격’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학을 떼는 말이다. ‘시시포스 신화’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리하여 삶에 의미가 있다고 시인한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나는 자신에게 온갖 울타리를 만들어놓고 그 속에 나의 삶을 가두는 것이다.” 나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말이 의문문이 아니라 평서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조리는 나에게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즉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부터 이것이 바로 나의 깊은 자유의 이유다.” 오답 노트를 정리하듯 이런 문장들을 공책에 베껴 적었다. 분노와 우울에 침잠된 사람들끼리 치유받는 독서 알고리즘의 쾌거다.
카뮈는 우리에게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하기를 권한다. 시시포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매일 산꼭대기로 바위를 나르는 ‘영원한 형벌’을 받은 인간이다. 시시포스는 자신의 일생이 고통임을 안다. 그래서 그는 행복하다. 무거운 바위를 나르는 일에서 희망을 느낀다면, 시시포스는 정말로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시시포스가 된 나는 징역을 끝낸다. ‘시시포스 신화’의 위안이 나를 염세주의자로 만든 것은 아니다. 부아가 치밀고 무기력하며 때때로 너무 즐겁고 행복한 날들이 여전하다. 어떤 날이든 나는 알 수 없으면 알고 있는 것으로, 할 수 없으면 할 수 있는 것으로 보낸다.
평소 거의 읽지 않던 소설의 재미를 알게 됐다. 소설에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여러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감염병 사회에서 생존하려 발버둥 치는 인간 군상을 다룬 소설 ‘페스트’, 신성하고 싶은 영혼과 그렇지 않은 육체의 간극을 그려낸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삶의 부조리함을 더 깊이 들여다보았다. 책은 부정적인 감정을 상쇄한다. 끙끙대며 난제를 풀어가는 작가의 노동을 감상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의 풀이를 어떻게 이해할지 결정하는 주체는 책을 읽는 자신이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독서 뒤 남은 감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문장은 그 책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1년 만에 첫 퇴사를 했다. 그리고 동경하던 다른 직무의 인턴에 지원했다. 다 떨어졌다. 몇 달 뒤 첫 회사의 경쟁사에 입사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고, 도둑 소굴은 아직도 영 별로다. 우울하지는 않다. 깊은 자유 속에서 오늘을 살고 있다.
이사랑 leelibertad74@gmail.com
이력서 취미란에 ‘독서’라고 쓰는 사람들은 대개 ‘고전 콤플렉스’가 있다. 100권 또는 200권 고전 리스트만 보면 주눅이 드는 병이다. 그들에게 나의 처방전을 써준다. “걱정 마시라. 세계적인 석학들조차 리스트의 고전을 다 읽지 않았다. 읽은 척할 뿐이다. ‘100권 리스트 고전’보다 ‘다섯 권짜리 나만의 고전 리스트’가 더 중요하다.”
정말 그렇다. ‘나만의 고전’은 내게 제일 의미 있는 책이다. 두고두고 반복해서 읽는 아포리즘이다. 인생의 변곡점마다 찾는 휴식처다. 내 대뇌를 주기적으로 깨우는 친구다.
미지의 소리 8회차 주제는 ‘내게 깊은 위안을 준 책’이다. 선정작을 쓴 이사랑씨는 자신만의 고전을 공개했다. 그는 ‘시시포스 신화’에 등장하는 문장, “이것이 바로 나의 깊은 자유의 이유다”를 부제로 달았다. 책을 읽는 이유를 콕 짚어 일러줬다. 관념이나 사변에서 독서의 이유를 찾지 않고, 일과 삶의 고민 속에서 책을 읽는 이유를 찾는 모습이 미쁘다.
마침 세상도 변하고 있다. 성인 10명 중 6명이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난데없는 ‘텍스트 힙’(Text Hip) 열풍이다. ‘읽는 것은 멋지다’라는 구호인데, 엠제트(MZ)세대가 주도한다고, 미디어는 야단법석이다. 음식 인증 샷 대신 완독(完讀) 인증 샷을 올리고, 독서와 도파민의 합성어인 ‘독파민’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고 한다. 아이돌 장원영씨는 “염세주의적 쇼펜하우어를 통해 위로받는다”고 털어놨다.
좋은 일이다. ‘지적 허영’은 허용할 수 있는 유일한 허영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한때의 유행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독서인구 각자가 자기만의 지식 생태계를 그려갔으면 한다. ‘꼬꼬무(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법’을 추천한다. 독서에도 알고리즘이란 게 있다. 한 권을 읽으면 그 안에 다음에 읽을 책이 반드시 등장하게 돼 있다. 그렇게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만의 생태계 지도가 그려져 있을 것이다. 디지털 시대를 헤쳐나갈 강력한 아날로그 무기인 ‘읽기와 쓰기로 단련된 단단한 사고력’을 얻는 건 덤이다.
김창석 한겨레엔 교육부문 대표·한겨레교육 미디어아카데미 강사
분량: 원고지 10장(2천 자) 안팎
마감: 2024년 11월24일(일) 밤 12시
발표: 제1541호
문의·접수: leejw@hani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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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소리: MZ는 어떻다, 뭐가 다르다… 이런 구구절절한 제삼자의 평가는 이제 그만해주세요. MZ 당사자가 말하는 MZ. 4주마다 글을 공모해 심사 뒤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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