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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식물인간 만든 그 놈, 징역 5년’ 사건 재판 변화 일궈낸 연대의 힘

딥페이크 성폭력 대응 집회·재판 방청 연대 … 뙤약볕 아래든 폭우 속이든 우리의 싸움은 멈추지 않는다
등록 2024-09-27 20:04 수정 2024-10-01 09:21
2024년 9월21일 오후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앞 대학로에서 열린 ‘딥페이크 성착취 엄벌 촉구 시위: 만든 놈, 판 놈, 본 놈 모조리 처벌하라’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김채운 기자

2024년 9월21일 오후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앞 대학로에서 열린 ‘딥페이크 성착취 엄벌 촉구 시위: 만든 놈, 판 놈, 본 놈 모조리 처벌하라’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김채운 기자


“불안과 두려움이 아닌 일상을 쟁취하자.”

2024년 9월6일 저녁 7시,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열린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폭력 대응 긴급집회’에서 구호가 울려퍼졌다. 그날 오전 10시50분, 광주지방법원 결심공판을 모니터링하고 오후 5시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미팅을 한 뒤여서 꽤 지쳤지만, 보신각을 수놓은 각양각색의 깃발을 보는 순간 피로가 사라졌다. 흩날리는 깃발을 단단히 부여잡고 서 있는 수많은 활동가들은 내가 전국에서 만났던 이들이었다. 백래시의 광풍에도 ‘우리’는 싸움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각자의 길을 걸어 다시 ‘광장’에 모였다.

사건은 수도권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비 내리는 날씨에도 보신각에 모인 인원은 (주최 쪽 추산) 1천 명에 이르렀다. 이른바 2018년 ‘한양대 지인능욕 사건’의 피해자는 대신 읽은 발언문에서 공동행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학교 내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다 전보 대상자가 된 지혜복 교사는 10대 가해자와 피해자를 양산하고도 실태 파악은커녕 책임 회피에 급급한 교육 당국을 비판했다. 또 다른 피해자는 ‘살아남아 문제를 해결하자’고 연대를 촉구했다. 시민들과 활동가들은 구호와 함성으로 힘을 보탰다.

디지털성폭력 대응 활동을 하면서 지역 격차를 실감하고 있다. 수도권 중심으로 운동을 하다 보면 특정 지역에 갇힐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각 지역에서 싸움을 이어가는 이들을 만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지역의 반성폭력 운동과 수사, 재판 감시를 어떻게 할지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

9월10일에는 재판 모니터링을 위해 춘천지법에 도착하자 뙤약볕 아래서 기자회견(텔레그램딥페이크성폭력대응) 중인 ‘강원미투행동연대’를 만날 수 있었다. 강원 지역은 2019년 이후 춘천에서 ‘n번방’ ‘프로젝트n번방’ 등 디지털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지역 내 활동가들의 적극적인 방청연대가 이어지고 있다. 지역 기반 활동의 긍정적 모델이다.

9월11일에는 전북 전주로 향했다. ‘딸 식물인간 만든 그놈 징역 5년 구형’으로 알려졌던 ‘부산여행 동창생 폭행 식물인간 사건’의 2심 공판을 보기 위해서였다. 1심에선 결심 공판 이후 피해자 어머니가 쓴 글이 공개되면서 검찰이 뒤늦게 징역 5년에서 징역 8년으로 구형량을 높였고, 재판부 역시 권고형 범위를 넘어선 징역 6년을 선고한 뒤 양쪽에서 모두 항소했다.

2심은 불안했다. 여론의 관심이 줄고 피해자 쪽의 재판 참여가 제한돼 2심 재판부가 감형할 가능성이 커 보였다. 첫 공판에서 재판부는 사건 당시 피고인의 음주 정도에 대한 질문을 하고 바로 선고일자를 잡았다. 피고인이 형사공탁을 하고 지속적으로 반성문을 제출한데다 첫 재판에서 결심이 이뤄져 피해자 가족은 감형되지 않을지 불안했고 고립감을 느꼈다고 한다.

시민연대가 피해자 어머니의 청원(가해자만을 위하는 법·제도 개선 요청)을 부각하고, 탄원서를 모집하며, 한국여성변호사회에 연락해 피해자 변호사 선임까지 다시 했다. 그 결과 변론 재개 결정이 내려졌다. 재판부가 피해자 어머니의 양형증인신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시민들의 연대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제 딸이 잘못되면 가해자는 살인자가 돼 지금보다 더 높은 형량을 받을 수 있겠지만, 저는 오늘 제가 죽더라도 하루라도 더 살아 있는 딸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피해자의 어머니는 호소했다. 이례적으로 긴 시간을 내어 피해자 가족의 의견진술을 들은 재판부는 피해자 변호사가 제시한 공소장 변경(중상해→살인미수 혹은 상습특수중상해)에 대해 검토하겠다며 다음 재판 일정을 잡았다. 끝날 뻔한 재판과 피해자 가족의 싸움이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전주 재판이 끝난 뒤엔 곧바로 대전으로 향했다. 필로폰 투약 상태에서 연인을 잔인하게 살해한 엄아무개씨의 교제살인사건 1심 선고가 있었다. 엄씨의 선고 직전엔 직장 상사가 저지른 성폭력 사건 선고도 있었다. 피해자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자살했고, 피고인은 혐의를 전면 부인했으나 징역 8년형이 선고됐다. 피고인이 법정구속돼 나간 문으로 엄씨가 들어왔다. 재판부는 심신미약(필로폰 투약 등) 상태였다는 엄씨의 주장을 배척하고 징역 22년형(검찰 무기징역 구형)을 선고했다. 10년 넘게 연대활동을 하지만 피해자의 죽음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무력감과 체념, 슬픔이 나를 짓누르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로 했다.

전국에서 모여든 6천 명의 성난 여성들

그렇게 시작한 일이 피해자와 연대자를 위한 매뉴얼 만들기와 반성폭력운동 아카이빙, 법안 및 판결문 분석이다. 피해자들과 개인적으로 연대하고, 전국 수사기관과 법원을 누비며 모니터링하는 것과 별개로 여성 대상 폭력 및 살인사건과 관련한 객관적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는 작업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이번엔 2020년 6월25일부터 2024년 8월31일까지 ‘성폭력처벌법 제14조의 2’(허위영상물 등의 반포 등)와 관련해 확정된 사건의 1·2·3심 판결문 분석을 목표로 삼았다. 최근 김남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해당 법조 관련 1심 전수조사 결과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사건이 모두 87건이라는 대법원 설명과 달리 ‘대한민국 법원 판결서인터넷열람’으로 확인한 확정 사건 판결문만 200여 건에 이르렀다. 사건으로는 105건, 대법원·의원실 조사 내용보다 18건 많다.

9월21일, 판결문을 사건별로 분류한 뒤 서울 종로구 혜화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018년 ‘불편한 용기’ 집회 이후 6년 만의 혜화행이다. 자료 분석은 결국 현장과 사람에 기반한 것이고, 현장과 사람을 위한 것이다. 운동이 활자에 갇히면 생명력을 잃고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비가 올 예정이었지만 우비를 챙기고, 마스크와 간식 등 준비물을 꼼꼼하게 챙긴 뒤 지하철을 탔다. 혜화역 2번 출구에는 검은 길이 이어져 있었다. ‘딥페이크 성착취 엄벌촉구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이 검은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침수’가 포털사이트 검색어 상위권에 오를 만큼 악천후였으나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등 전국 각지에서 6천 명(주최 쪽 추산)이 모였다. 보답이라도 하듯 비는 그쳤고 바닥은 말랐으며 기온은 선선해졌다.

“만든 놈, 판 놈, 본 놈, 모조리 처벌하라.” 한목소리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간식을 나누다보니 어색함이 금방 사라졌다. 고등학생을 포함해 많은 여성이 단상에 올라 발언을 이어가자 우리가 만든 검은 길은 넓어지고 단단해졌다. 발언자 중에는 피해자와 연대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보겠다며 법원으로 달려왔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시작’을 기억하는 나는 시민들의 성장과 발전 가능성을 확신한다. 2018년 이후 마주한 백래시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체념할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우리는 다시 거리로, 광장으로 나섰다.

당신과 변화를 기다립니다, 광장에서

“거리로, 광장으로 나오라.”

변화를 위한 싸움의 시발점에서 망설이는 당신에게 말한다. 변화는 저절로, 알아서, 당연히 찾아오는 게 아니다. 싸우지 않으면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다. 혼자라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같이 검은 길을 만들고 다듬으며 광장으로 향하자. 우리의 싸움은, 변화는, 대한민국의 페미니즘은 이제 다시 시작이다. 여기서 당신을 기다리겠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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